일본 제국의 동양사학자로 교토 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에치젠노쿠니(越前国, 지금의 후쿠이현쓰루가시) 출신이다. 1896년에 도쿄대학 문과대학 한문과를 졸업하고, 1898년에 동대학원 동양사 전공으로 수사(修士)가 되었으며, 1910년에 문학박사가 되었다. 청나라로 유학하고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기 이전부터 동양사 교육에 진력하여, 1898년에 출간한 『중등동양사(中等東洋史)』는 동양사 교과서가 되었다.
교수로 부임한 이후 나이토 코난, 가노 나오키와 함께 쿄토학파 동양사학을 확립하였는데, 청나라 고증학의 전통과 서양의 문헌학적 방법을 총합하여 중국사 및 동서교섭사에 우수한 업적을 남겼다. 1923년에는 송대(宋代)의 남해무역사(南海貿易史)를 연구한 『포수경의 사적(蒲寿庚の事蹟)』으로 제국학사원상을 수상하였다. 「대완국의 귀산성에 대하여(大苑国の貴山城に就いて)」라는 논문으로 서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시라토리 구라키치, 후지타 도요하치(藤田豊八) 등과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주요한 제자로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있다.
그러나 1919년 발표한 <지나인들 사이에서의 식인육 풍습>이라는 논문은 현대에도 우익을 중심으로 계속 확대재생산되는 공자식인설 및 중국의 인육 기호설의 원조가 되기도 하였다. 요즘은 대만계 우익논객인 황문웅 및 그의 주장에 찬동하는 극우파 및 각지의 혐중파들이 이걸 확산하나, 원조는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