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1:31:21

크래쉬 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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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sh Holly
1. 프로필2. 소개3. 인생사

1. 프로필

파일:CrashHolly_bio.png
본명 Michael John Lockwood
출생 1971.8.25
사망 2003.11.6 (향년 32세)
신장 175cm
체중 102kg
출생지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피니쉬 크래쉬 코스[1], 스프링보드 불독, 더블 언더훅 DDT[2], 크래쉬 랜딩[3]
커리어 WWF 유로피언 챔피언 1회
WWF 월드 태그팀 챔피언 1회
WWF/E 하드코어 챔피언 22회
WWF 라이트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2. 소개

마이클 존 락우드는 1989년에 제리 몬티, 마이클 모데스트, 릭 톰슨에게서 훈련을 받고 프로레슬링계에 데뷔한다. 링 네임은 조니 피어슨이라는 이름으로 Bay Area Wrestling에서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1996년 부터는 APW에서 에디 O. 그래디라는 링 네임을 사용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던 마이크 모디스트(Mike Modest) 덕분에 일본 스타일의 경기를 접하게 된다. APW에서 스파이크 더들리를 만나며 우정을 쌓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추천으로 ECW로 이적하게 된다.

경기를 본 ECW 임직원들은 크래쉬 할리를 아주 높게 평가했다. 크리스 벤와다이너마이트 키드를 연상시킨다는 극찬을 보내면서 ECW에 참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음주 문제가 가끔 불거졌고 도장에서 훈련을 하는 시간보다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장에 페인트칠하기, 링을 설치하고 의자를 배치하는 일은 물론 신입 선수가 주로 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크래쉬로써는 입단 당시에는 듣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수입이 많아진 것도 아니다. 게다가 ECW의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도 못했기에 동료 선수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결국 당시 ECW에서 선수 겸 트레이너의 역할을 담당하는 태즈, 버버레이 더들리, 마이키 윕렉과 충돌하면서 점점 힘들어지게 된다. 1997년 11월, 경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취 상태가 되어서 참가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ECW를 떠나게 된다. ECW를 떠나기 직전에 프로모터 폴 헤이먼에게 사과를 해서 두 사람의 사이의 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1998년쯤에 WWE와 계약을 맺게되고 1999년 8월 19일 RAW를 통해 설정상 하드코어 할리의 사촌으로 WWE에 데뷔한다. 그리고 기믹상 자신의 몸무게를 400 파운드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커다란 체중계를 들고 나오기도 하였다. 1999년 10월 17일에 기믹 상 사촌인 하드코어 할리와 함께 월드 태그팀 챔피언에 오르지만 11월 14일에 챔피언을 빼앗기게 된다. 하드코어 할리가 부상을 당하자 크래쉬는 알 스노우와 함께 활동하였고, 이후 2000년에 스맥다운으로 이적하고 하드코어 디비전에서 맹활약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테스트를 이기면서 하드코어 챔피언에도 등극하게 되며 하드코어 챔피언에 무려 22회 등극했다는 업적을 세우게 된다.[4] 윌리엄 리갈을 이기고 유러피언 챔피언에도 등극하게 된다.

크래쉬는 다른 선수들이 공항, 쇼핑몰 등 경기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타이틀 탈환을 목적으로 심판을 대동하고 와서 공격해오는 만큼이나 크래쉬 또한 하드코어 타이틀 방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한번은 민 스트리트 파시가 공격해오자 APA에 보호를 의뢰하기도 했었다. 물론 APA 또한 돈보다 타이틀을 선택하여 크래쉬의 의뢰를 받아주지 않고 공격하려 했고, 이게 APA가 민 스트리트 파시 등 다른 선수들과의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0년 말에 하드코어 할리가 부상에서 돌아오고, 몰리 할리가 할리 커즌스에 합류하면서 테스트, 알버트, 트리쉬 스트래터스와 대립을 하게 된다. 그 후엔 더들리 보이즈와도 대립을 하는데 더들리 보이즈 일원이었던 스파이크 더들리가 몰리 할리와 로미오와 줄리엣스러운 연애 플래그를 끊게 되면서 흩어지게 된다.

크래쉬 할리는 싱글로 전환한 후 WWF 라이트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하고 2002년에 WWE가 WWF에서 WWE로 개명하자 스맥다운으로 완전히 드래프트 되면서 활동하게 된다. 빌 디못에게 공격당하고 부상을 당하면서 몇 개월간 공백을 가지다가 2003년에 스맥다운에 복귀하여, 매트 하디셰넌 무어와 함께 매티튜드 일원으로서 활약한다. 하지만 복귀한지 얼마되지 않은 2003년 6월 30일 WWE로부터 방출당하게 된다.

WWE에서 방출당한 크래쉬는 2003년 7월에 NWA의 새로운 단체인 NWA-TNA와 정식 계약을 맺고 '매드 마이키'라는 링 네임으로 활동하게된다.

2003년 11월 6일 안타깝게도 크래쉬 할리는 향년 3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에 대해서 자신의 친구였던 스티비 리차드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구토를 했고 이 때 이물질에 기도가 막히면서 결국 질식사로 사망했다고 세간에 알려졌었는데 정확하진 않다. 하지만 훗날 그의 사망 이유가 자살로 밝혀지게 된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2003년 7월 이후 크래쉬 할리는 4개월 째 친구 스티븐 리차드의 집에 살았다고 한다. 크래쉬의 사망 당일 리처드는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크래쉬가 머물고 있던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계속 받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리차드의 요구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 달라고 하였고 이에 경찰이 들어가자 크래쉬 할리는 스티비 리차드의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그의 시신은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로완 카운티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인생사

할리는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시절에 캘리포니아 패시피커에 위치한 Terra Nova High School에서 프로레슬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프로레슬링 도장을 다니면서 배우려고 했지만 프로레슬러로써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슈퍼마켓인 쉐이프 웨이에서 일한 적도 있다.

1999년에 N'keigh Wheeler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하지만 2003년, 그가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부인과 이혼 수속을 밟으면서 별거에 들어가게 된다. 별거 중에 예전 여자친구와 다시 결합하려고 하던 상태였다.

2002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솔즈베리에 레슬링 도장을 세우기도 하지만, 경영 악화로 9개월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불평을 늘어놓는 빈도가 더욱 늘어났다. WWE에서 도와주지 않기에 망했다는 말을 하기도...


[1] 핀레이, 셰이머스 피니쉬로 사용하였다.[2] TNA로 이적 후에 피니쉬로 사용하였다.[3] AJ 스타일스가 스타일스 크래쉬라는 기술명으로 피니쉬로 사용중이다.[4] 물론 27회나 등극했던 레이븐에 비할 바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