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는 예루살렘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적으로, 2007년부터 약 6년 동안 고고학자 요셉 가핑켈과 사아라 가노르의 감독으로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사아라임이나 북이스라엘, 필리스티아의 요새였다고 추정하고 있다.2. 조성된 시기
시기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해당 유적은 건설된 지 약 20~30년 뒤에 파괴되었고, 헬레니즘 시기에 재건되었다.후기 철기시대에 나타는 토기의 특징이 바로 red slip과 hand burnish(마름질)이다. 키르벳 케이야파의 원형 그릇은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으나 각진 토기는 마름질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으며, 필리스티아 지방의 토기와도 다르다.
3. 시사점
유다 왕국에서는 LMLK 인장을 통해 세금을 확보했다. 해당 씰은 히스기야 시기에 처음 발행되었는데, 키르벳 케이야파는 최대 BC 10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루살렘과 라기스에서 발견된 표본을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한 양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이는 유다의 초기 도시라는 의견과, 초기 유다의 도시계획과는 무관하며 가나안의 도시였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4. 논쟁
요셉 가핑클 교수는 해당 유적이 BC 1000년 즈음에 나타난 유다의 초기도시라 주장하였다. 이에 핑켈슈타인은 방사선 연대 측정 결과를 거론하면서 섣부른 판단으로 학계가 뒤집히길 바라는 것이냐며 비판했다.[1]케이야파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필리스티아 토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후기 철기시대에 등장하는 블레셋-아슈도드 토기가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가핑클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케이야파가 정말 10세기 초의 유다와 관련된 장소이며, 후기 철기시대 초의 것이라면 성서적 저연대론은 허물어지겠으나, 사실 가핑클의 주장 또한 비약이 없지는 않다. 가핑클 교수는 충분한 담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에도 반대자들을 향해 "20~30년 전에 성경의 전통은 신화적에 불과하다고 말한 사람들이니, 새로운 정보를 싫어한다"며 도발한 바 있다.[2] 핑켈슈타인 외에도 징거-아비츠 등 이 주장에 의문을 가지거나 비판하는 학자들도 분명히 있다.[3][4]
[1] https://www.academia.edu/457421[2] And these are the people who 20~30 years ago, said bibical tradition is Mythological. Of course, they don't like new info![3] Crying King David: Are the Ruins Found in Israel Really His Palace?[4] Was Khirbet Qeiyafa a Judahite City? The Case against It Vol. 17 (2017): Volume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