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12:25:47

톰 크린

1. 개요2. 일생
2.1. 어린 시절2.2. 첫번째 남극 탐험2.3. 두번째 남극 탐험
2.3.1. 혼자 구원을 요청하다.
2.4. 세번째 그리고 마지막 탐험2.5. 탐험 이후
3.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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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린(Thomas Crean)
1877년 7월 20일 ~ 1938년 7월 27일 (향년 61세)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 영국이 주도한 남극 탐험에 3번이나 참여한 극지 탐사의 숨겨진 주역이다.

2. 일생

2.1. 어린 시절

크린은 1877년 아일랜드 카운티 케리의 아나스카울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지역 가톨릭 학교를 다녔지만 12살 때 농장이었던 집안일을 돕기위해 퇴학하게 된다.

1893년 10월 15살 때 크린은 영국 해군에 입단하게 된다. 다양한 군함에서 복무하던 중 1901년 12월 크린은 로버트 스콧이 이끄는 디스커버리 탐사에 자원하게 된다.

2.2. 첫번째 남극 탐험

1902년 2월 8일 크린을 태운 디스커버리 호는 남극의 맥머도 만에 도달한다. 맥머도 만의 헛 포인트에 정박해 있는 동안 크린은 어릴적 농장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했고 당시의 다른 동료들은 효율적인 일 처리 능력과, 유머감각, 친화력이 높은 크린을 무척이나 신뢰했다.

남극의 겨울이 되자 디스커버리 호는 얼음에 갇혀버렸고 결국 크린과 다른 선원들은 1904년 얼음이 녹을때까지 남극에서 머물러야 했었다. 이후 해군으로 복귀한 크린은 탐험대장 스콧의 추천으로 해군 부사관으로 진급하게 된다.

2.3. 두번째 남극 탐험

1910년 섀클턴의 유명세로 조바심이 난 스콧은 남극점 정복을 결심하고 준비에 나서게 된다. 지난 디스커버리 호 탐험 이후 크린을 신뢰하고 있었던 스콧은 탐험에 크린을 스카웃 했고 그렇게 크린은 테라 노바 호의 탐험대 일원으로서 다시한번 남극으로 향하게 된다.

3개월간의 보급기지 건설을 끝마치고 11월 1일 스콧 탐험대는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다. 그러나 스콧의 오판과 남극의 혹독한 환경은 그들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남극점까지 150마일을 남겨둔 시점에서 크린은 남극점 정복 멤버에서 제외되었고 윌리엄 래슐리, 에드워드 에반스와 함께 베이스 캠프로 귀환해야 했다.[1] 체력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1100km 지점의 베이스 캠프로 귀환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의 행군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기서 크린의 용기가 드디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2.3.1. 혼자 구원을 요청하다.

1912년 1월 크린과 래슐리, 태디는 남극점 정복 멤버들과 작별하고 베이스 캠프로 귀환을 시도한다. 때로는 방향을 잃기도 하고 빙하를 썰매로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위험한 시도를 하는 등 어찌저찌 나아간 크린 일행이었지만 2월 11일 베이스 캠프를 160km 남긴 시점에서 에드워드 에반스가 괴혈병으로 쓰러진다. 크린과 래슐리는 에반스를 썰매로 운반하며 나아가 2월 18일 베이스 캠프로 부터 35km 지점의 코너 캠프에 도달했지만 식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크린은 동료들과의 의논 끝에 자신이 홀로 베이스 캠프로 가 구조를 요청하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윽고 그는 식량으로 쓸 비스킷 3개와 초콜릿 몇개만 챙기고 홀로 떠나게 된다. 18시간 후 크린은 베이스 캠프에 무사히 도착해 다른 동료들에게 래슐리와 에반스의 상황을 알렸고 몇시간 뒤 앳킨스와 게로브가 개썰매[2] 를 이끌고 코너 캠프로 가 이 둘을 무사히 구출하게 된다.

그러나 남극점을 정복하러 떠난 스콧 일행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그렇게 침울한 상황과 함께 크린은 영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영국으로 귀환한 크린은 극지 훈장과 에반스를 살린 공로를 인정받아 래슐리와 함께 알버트 메달을 수여받게 된다.

2.4. 세번째 그리고 마지막 탐험

1914년 어니스트 섀클턴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에 합류한다. 일찍이 디스커버리 호의 탐험에서 크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 있었고 또한 스콧 탐험대에서의 그의 공로를 들은 섀클턴은 스콧만큼이나 그를 신뢰했고 그렇게 크린은 인듀어런스 호의 이등 항해사로서 다시한번 남극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러나 1915년 1월 20일 인듀어런스 호는 얼음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되었고 결국 10월 27일 섀클턴은 배를 포기하고 탈출을 시도한다.[3] 탐험대의 목적이 생존으로 바뀐 순간에도 크린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렇게 1915년 4월 20일 탐험대가 앨리펀트 섬에 상륙한지 5일째 되던 날, 섀클턴이 제안한 사우스조지아 섬의 구조 요청에 필요한 5인에 자원했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끝내 사우스조지아 섬 후스빅 만에 도달했고 이후 섬에 잔류한 모든 대원들을 구조하게 된다.

2.5. 탐험 이후

1916년 11월 영국으로 돌아와 3번째 극지 메달을 수여받은 크린은 몇 달 뒤 1917년 9월 5일 고향에서 엘리 헤일리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 또다른 남극 탐험을 생각중이던 섀클턴에게 다시 한 번 탐험 제의를 받지만 부양해야할 가족과 해군 전역 후의 계획이 따로 있었던 크린은 섀클턴의 제의를 거절하게 된다. 이후 함선에서 시력 문제로 말썽을 겪은 크린은 3월 24일 의병 제대를 했고 이후 전역때 생각해두었던 펍을 운영하게 된다. 1938년 크린은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지만 수술 시기가 늦어버려 복막염으로 발전해버렸고 끝내 그의 생일이 지난지 7일이 되는 7월 27일 향년 만 6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Ballynacourty에 있는 가족 묘지에 묻히게 된다.

3. 여담

  • 남극 탐험을 3번씩이나 떠나고도 살아남은 전무후무한 인물 중 하나지만 그럼에도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데, 이는 그의 출신배경도 한 몫했지만[4] 그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에게는 3명의 딸이 있는데 이중 둘째 딸 캐서린은 간질을 앓고 있었으며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성격이 친화적인데다 유머스러워 다른 동료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한 때 대장이었던 스콧과는 여러모로 대조되는 부분이다.
  • 현재 아나스카울에 가면 그가 운영한 사우스폴 펍이 남아있다.


[1] 크린의 전기를 쓴 마이클 스미스는 에드거 에반스보다는 차라리 크린을 데리고 갔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에드거 에반스는 손을 다쳤기 때문.[2] 아문센 vs 스콧 대결에서 스콧은 개썰매를 베이스캠프를 구축할 때만 쓰고 정작 남극점 정복에는 쓰지 않는다.[3] 이때 크린은 인듀어런스 호에서 태어난 3마리의 새끼 썰매견들을 애지중지했었는데 나중에 생존을 위해 이들을 죽여버렸다.[4] 영국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은 많이 차별받는 존재다. 이 때문에 동등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승진이나 대우등에서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