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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로종(보리심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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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
2.1. 세속 보리심2.2. 승의 보리심
2.2.1. 공성의 이해
2.2.1.1. 인무아(人無我)2.2.1.2. 법무아(法無我)
2.2.1.2.1. 마음(의식)의 공성
2.2.2. 공성과 자비의 관계
2.2.2.1. 자비의 토대: 불성으로서의 공성2.2.2.2. 자비의 함양: 연민과 상호의존성2.2.2.3. 오해: 자비와 공성은 모순되는가?
3. 원보리심과 행보리심
3.1. 원(願)보리심
3.1.1. 사무량심3.1.2.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
3.2. 행(行)보리심
3.2.1. 보리심계3.2.2. 육바라밀
3.2.2.1. 보시바라밀3.2.2.2. 지계바라밀3.2.2.3. 인욕바라밀3.2.2.4. 정진바라밀3.2.2.5. 선정바라밀3.2.2.6. 지혜바라밀
3.2.3. 사섭법
4. 로종(blo sbyong) 소개5. 관련 서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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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제불(一切諸佛)의 자비의 총체인 관세음보살[1]
파일:green_tara.jpg
일체제불(一切諸佛)의 사업(이타행)을 상징하는 따라(Tara)보살
제14대 달라이 라마, 《평화로운 마음, 선한 마음》
어머니가 편치 않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일체중생에게도 고통을 완전히 없애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때 연민심(憐愍心)이 제대로 생긴 것이다. 이때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수습차제ㆍ상편》(게쉬 소남 걜첸 譯)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에서
발심(발보리심)은 남을 위해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깨달음(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구하는 마음이다.』
라고 자신의 뜻(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타인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두 가지의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보리도차제광론》(게쉬 소남 걜첸 譯)

티베트 불교는 대승 불교로서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을 강조한다. 보리심의 원인으로는 대비심(大悲心)을 들 수 있다. 대비심이란 일체 중생이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비심을 원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갖게 되며, 이러한 보리심(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유정(有情)을 보리살타, 즉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한다.

쫑카파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대승의 마음이자 입문인 보리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승의 성문(聲聞), 독각(獨覺)들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배워서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을 얻을 수 있고, 해탈을 얻으면 다시 윤회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승의 관점에서 소승의 허물 제거하는 것과 공덕 쌓은 것은 일부만이기에(번뇌장煩惱障만 제거되고 소지장所知障[2]은 남아 있기에) 자신의 뜻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타(利他)를 이루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소승 아라한의 경지를 이루어도 궁극에는 대승(=구경일승究竟一乘)에 들어가야 한다고 대승 입문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윤회의 바다에 떨어진 것과 같이 일체 중생들 또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의 눈이 멀어서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보고 부처의 종성(種姓)(=불성佛性) 가진 이들이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과 그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대승에서는 말한다. 자기만을 위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 같은 존재들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대승의 바른 수행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오직 일시적으로 남을 도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남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정진하는 것이다.

대승은 반야승(般若乘)과 금강승(金剛乘)으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중 어디에 입문하더라도 입문은 오직 보리심뿐이다. 즉, 대승의 기준은 보리심이다. 아직 보살행(菩薩行)을 완벽히 실천하지 못해도 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보살에 해당한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보리심은 부처가 되는 원인 중에서 보살만의 공통적이지 않은 원인이고, 공성을 인식하는 반야의 지혜는 성문‧독각‧보살이 추구하는 깨달음의 공통적인 원인이다. 마치 똑같이 물과 거름(=반야의 지혜)을 주더라도 씨앗(=보리심)에 따라 서로 다른 싹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반야의 지혜로 소승과 대승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방편인 보리심과 위대한 보살행들로 소승과 대승을 나누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다 갖춰진 수행이 되려면 방편과 지혜 양쪽을 모두 갖춰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방편의 핵심인 보리심과 지혜의 핵심인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만약 지혜와 방편 중 한쪽만 닦아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정도만을 추구한다면, 무아(無我)를 인식하는 지혜만 닦으면 된다. 하지만 대승의 보살이 되고 싶다면 반드시 보리심도 함께 닦아야 한다.

보리심에 대해 정진하여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어날 정도로 보리심이 생기면, 이것으로 까마귀에게 모이를 조금 주는 것같은 사소한 행위조차 모두 보살의 행(行)이 된다. 반면 보리심 없이는 온 우주를 보석으로 가득 채워서 주어도 보살의 행이 되지 않는다.

《수습차제》에 따르면 일체 중생을 자신의 외아들처럼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한 명도 빠짐 없이 고통에서 구제하려는 대비심(大悲心)과, 대비심을 바탕으로 삼아승지겁 동안 위 없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견고한 보리심이 밤낮 없이 저절로 일어날 때 처음 대승에 입문하는 보리심이 생겼다고 본다.[3] 그 밖에도 《현관장엄론》에서는 보살의 수준에 따라 22 종류의 보리심이 있다고 설하였다. 이처럼 보리심은 대승의 입문인 동시에 핵심 중의 핵심이다.
작은 시냇물을 마실 힘도 없다면
큰 바다의 물을 어떻게 들이킬 수 있겠는가.
이승二乘(성문승과 연각승)도 능숙하지 못하다면
대승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지장십륜경》(법장 譯)
벤첸라마 롭상예세, 《보리도차제의 마르티 일체지로 나아가는 지름길》(법장 譯)

보리심의 동기 발현과 보리심의 실천(반야승의 육바라밀, 사섭법과 금강승의 본존 요가 등)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인 람림(보리도차제)의 삼사도(三士道) 중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람림의 체계에 따르면 예비수행(가르침을 듣고 설하는 법, 선지식을 섬기는 법 등), 하사도(下士道,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다음 생의 행복을 위해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멀리함), 중사도(中士道,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목적으로 계정혜戒定慧를 수행함) 등을 근간으로 삼아 상사도에 입문하게 된다. 보리도차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람림(보리도차제) 참조.
"생각하는 것은 남을 돕고자 생각 하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 《보리도차제광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장애를 없애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모든 성취를 가져오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아름다운 용모, 무병장수, 많은 중생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중생의 가난함과 괴로움, 슬픔을 없애는 것은 보리심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보리심 수행의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보리심이 일어나게 되면 악업을 정화하고 모든 복덕자량을 쌓는 것입니다.
보리심의 관한 법을 여러분들이 듣고 접한 것은 굉장히 큰 기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최대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체중생들을 성불의 지혜로 내가 이끌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러한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심하세요.
제14대 달라이 라마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처음에는 일체 중생을 위한 보리심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지만, 60년 넘게 보리심에 대해 사유하고 수행한 끝에 최근에 와서야 진정으로 보리심을 발하게 되었다."고 법문 중에 종종 언급한다. 달라이 라마도 평생 동안 수행한 끝에 진정한 보리심을 낼 수 있었고, 올바른 보살들은 여러 겁에 걸쳐 보리심을 수행한다고 경전에서 언급하였는데 일반 수행자들이 오랜 기간 보리심 수행에 정진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승에 입문하려는 수행자는 우선 경론에 의거하여 (보리심의 원인인) 사무량심, 보리심, 보살도의 정확한 의미와 학처(學處) 등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 동기와 행위를 점검하며 보리심을 지속적으로 증장시켜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깊이 사유하신 부처님들께서
보리심의 이익이 가장 광대함을 발견하셨으니
중생이 보리심에 의지해서 불법(佛法)을 수행한다면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지복을
반드시 얻게 되나이다.
《입보살행론》(석혜능 譯)

《입보살행론》 등의 대승 경론들에서는 보리심의 공덕과 이익이 무량함을 다양한 측면으로 찬(讚)했다. 보리심의 공덕이나 이익은 초학자가 보리심에 관심을 갖고 대승에 입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이러한 공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보리심을 발하기 위해서는 결국 공덕을 바라는 마음마저 버려야 한다. 보리심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과 대비되는, 오직 일체 중생을 위한 이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 여성의 몸을 한 붓다 "따라(Tārā)"

따라는 붓다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신(身), 구(口), 의(意), 사업(事業), 공덕(功德) 중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붓다의 행위인 사업(Skt. karma, Tib. phrin las)을 상징하는 본존이다. 붓다의 행위는 영원히 지속되고, 모든 곳에 편만하며, 자연히 이루어지는(rtag khyab lhun grub)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산스크리트어로 '따라(Tārā)'는 '별', '항성', '행성'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티베트어 명칭은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는 불모(佛母)'라는 뜻의 '돌마(sgrol ma)'이다. 한역(漢譯)에서는 '다라(多羅)'라고 음역하거나, 티베트어 명칭과 같은 뜻을 가진 '도모/구도불모(度母/救度佛母)'라고 의역한다.

따라는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화현한 보살 혹은 여성 수행자의 몸으로 성불한 붓다로 알려졌다. 한 설화에 따르면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하여도 거듭 중생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관세음보살이 좌절하여 벽에 자신의 머리를 찧자, 이내 몸이 천 갈래로 찢어져 천 개의 팔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이 되었다고 한다. 그 때 관세음보살의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에서 각각 녹색 따라와 백색 따라가 화현했다고 전해진다. 두 따라보살은 관세음보살을 향해 "관세음보살께서 지금까지 중생을 이롭게 하였고 앞으로도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니 낙심치 마십시오. 저희가 당신을 도와 중생을 어리석음에서 구제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다.

따라의 여러 존격 중, 모든 따라 존격들의 원천이며 장애를 제거하는 본존인 녹색 따라(Skt. Śyāmatārā; Tib. sgrol ljang)와 장수(長壽)를 주관하는 본존인 백색 따라(Skt. Sitatārā; Tib. sgrol dkar)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티베트에서는 관세음보살 신앙 못지 않게 따라보살 신앙이 발달되어 있으며, 《21존(尊) 따라보살 예찬문(Skt. Namastāraikaviṃśatistotraguṇahitasahita; Tib. sgrol ma la phyag 'tshal nyi shu rtsa gcig gis bstod pa phan yon dang bcas pa)》 등을 널리 독송한다.

도상(圖像)에서 녹색 따라보살은 오른손으로 여원인(與願印), 왼손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한 채 왼손에 청련화(靑蓮花, utpala)를 들고 있다. 앉은 자세는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펴고 왼쪽 다리는 접어 왕(王)이 유희(遊戱)하는 자세를 취한다. 또한 관세음보살과 마찬가지로 따라보살도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있다.

2.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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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타락시타의 제자이자 날란다 사원의 12대 학장
까말라쉴라(Kamalaśīla)
이렇게 뿌리인 연민심을 수습하여 익숙해진 다음에는 보리심을 수습(修習)한다. 보리심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이다.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해심밀경》, 《수습차제》등에서는 진리를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의 두 층위로 설명하는 이제설(二諦說)에 입각하여 보리심을 각각 세속(世俗) 보리심(속제 보리심, saṁvṛiti cittotpāda)승의(勝義) 보리심(진제 보리심, paramārtha cittotpāda)으로 정의하였다.

2.1. 세속 보리심

세속 보리심은 연민으로써 모든 유정(有情)을 윤회로부터 꺼내고자 서약하는 것이다.
《해심밀경》(자홍 譯) #
세속 보리심이란 연민심으로 모든 중생을 확실하게 고통에서 건져내기로 서원한 다음,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보리(무상정등각)를 염원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첫 마음을 일으키는 것(초발심初發心)이다.

세속 보리심은 또한 《보살지》의 〈계품〉에서 보여준 의궤에 따라 보살의 율의에 청정하게 머무는 스승에게서 [보리심계를 받아]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와 같이 세속 보리심을 일으킨 후에는 승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세속 보리심이란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자량도(資糧道)에 입문할 때 대비심(大悲心)을 원인으로 삼아 일으키는 보리심이다. 일반적으로 보리심이라면 주로 세속 보리심을 뜻한다. 티베트 불교의 보리심 수행 전승인 로종(blo sbyong)도 주로 세속 보리심을 계발하는 수행이다. 그러나 부처의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이 모두 양립되어야 한다.

2.2. 승의 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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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을 존격화(尊格化)한 반야불모[4]
공성과 자비를 핵심으로 하는, 매우 명료하며 부동(不動)하여 희론(戱論)의 극단을 떠난 것이다. [...]

승의 보리심은 출세간이며 희론의 극단에서 벗어난 것, 매우 명료하며, 승의의 유경(有境), 무구(無垢), 부동(不動), 바람 없을 때의 버터램프의 이어짐과 같이 매우 밝은 것이다.
《해심밀경》(자홍 譯) #
승의 보리심이란, 세간을 벗어난 것이며 모든 희론을 여읜 것이고, 극히 밝은 것이며, 수승한 의미의 영역이다. 오염이 없는 것이며, 흔들림이 없으며 바람 없는 곳의 버터불처럼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성취는 항상 공경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요가를 수습하여 익숙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까말라실라,《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승의(勝義) 보리심은 곧 공성(空性)을 바르게 인식하는 무분별의 지혜를 뜻한다. 승의 보리심은 공성을 현량(現量), 즉 직접 지각으로 인식하는 견도(見道) 이상의 보살부터 갖게 된다.

2.2.1. 공성의 이해

2.2.1.1. 인무아(人無我)
■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라는 논리(Skt.ekânekaviyogahetu, Tib.gcig du 'bral ba'i gtan tshigs, 離一多因): 무아(無我)에 대한 네 가지 핵심

① 부정해야 할 대상을 명확히 알기
- དགག་བྱ་ [각쟈] : 부정해야 할 바, 부정의 대상, 무엇이 없다고 할 때 그 것.
- 무아의 의미를 찾을 때 "진실로/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인식(=실집實執)"으로 파악하는 것을 부정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5] 등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는 없으며,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실집이라고 한다.
- 실집을 소멸시키려면 부정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부정해야 한다. 오온에 의존하지 않고 진실로/실제로 존재하는 '나', 혹은 자성으로 존재하는 '나'가 무아의 의미를 찾을 때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만약 부정 대상을 부정하지 못하거나, 부정 대상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면 단변(斷邊) 혹은 상변(常邊)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예를 들어 무아에 대한 설명 중 '없다'고 할 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윤회, 인과, 업, 해탈 등을 모두 부정하는 단변에 떨어지게 된다. 유(有)ㆍ무(無)의 두 가지 아(我) 문단 참조.

② 충족함을 명확히 알기
- ཁྱབ་པ་ [캽빠] :  충족함.
- 만약 '나'가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배중률(排中律)에 의거하여 오온과 하나이거나 아니면 여럿으로 존재하는 것 말고는 없음을 충족한다.[6]
- 예를 들어 '노르부'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다면, 노르부는 집 안 또는 집 밖 둘 중 하나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가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오온과 하나이든지 오온과 여럿이든지 둘 중 하나를 충족함이 확실하다.

③ 하나가 아님을 명확히 알기
- '나'와 '나의 오온'이 진실로 하나라면, '나'와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행동'처럼 아(我)와 아소(我所)로 나눠서 구분할 수 없다.
- 이렇게 '나'와 '나의 오온'을 하나라고 보게 되면, '나'가 하나인 것처럼 다섯인 '오온'도 하나라고 해야 하거나, '오온'이 다섯이듯 '나'도 다섯이라고 해야 한다.
- '오온'이 생멸(生滅)하는 것처럼 '나'도 찰나마다 생멸해야한다.

④ 여럿이 아님을 명확히 알기
- '나'와 '나의 오온'이 진실로 다르다면 논리적 고찰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다름이어야 하니, '나'와 '나의 오온'은 본질과 실체 등 모든 측면에서 완벽히 무관한 서로 다름이어야 한다. '분별식(分別識)으로 인식되는 상相(=반체返體)'의 측면에서는 '나'와 '나의 오온'이 다르지만 본질로서는 다르지 않다면[ngo bo gcig la ldog pa tha dad, 體性一 返體異] 이는 거짓된 현상(=속제俗諦)의 존재방식이고 자성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다.
- 또한 '나'와 '나의 오온'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면, 만약 질병, 노화, 죽음이 발생하여도 '나'는 그러한 것들을 겪지 않게 된다. 따라서 '나'는 생멸 등 오온의 특성을 갖지 않는 잘못이 있게 된다.
- 만일 '나'와 '나의 오온'이 다르다면, 오온을 제외하여야 '나'를 규정할 수 있게 된다.

∴ (아집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자성으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

이일다(離一多) 논리는 나가르주나의 《중론》 제18품과 제22품 등에서 처음 등장하며, 역시 나가르주나에 귀속된 《공칠십론》과 아르야데바의 《사백론》, 찬드라키르티의 《입중론》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후 자립논증 중관학파 계열인 샨타락시타의 《중관장엄론》에서 이일다 논리는 처음으로 종(宗)ㆍ인(因)ㆍ유(喩) 삼상(三相)의 형식을 갖춘 추론식의 형태로 등장하였고, 역시 자립논증 중관학파 계열인 까말라쉴라의 《중관광명론》에서도 공성을 확립하는 《중론》의 5종 추론식 중 하나로 등장한다. 이일다 논증인은 귀류논증 중관학파 계열인 아띠샤에 의해서도 공성을 확립하는 4대 논리 중 하나로 채택되는 등, 인도와 티베트에서 자립논증학파와 귀류논증학파를 막론하고 공성을 확립하는 대표적인 논리로 활용되었다.

언설(言說: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승의의 의미를 설하지 못한다. 승의의 의미를 지각하지 않으면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중론》
언설을 인정하지 않고서 우리는 설하지 않는다.《회쟁론》
세속제는 방편이며, 승의제는 방편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 둘의 차별을 모르는 이가 삿된 악도에 들어가게 된다. 《입중론》
(문) 만일 시간도 없고 인과(因果)와 조합도 없으면 다른 무엇이 있는가? 그러므로 이것이 없음을 말하는 자(=단견자斷見者)이다.
(답) 답하겠다. 아니다. 당신이 시간 등이 본성으로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뿐이며, 이것들은 의존하여 가립되는 것이다.《붓다팔리따(불호중론주)》
나는 사물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緣起)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백론주》
우리는 행위와 행위자, 과보(果報) 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이것들이 자성이 없다'고 확립하는 것이다.《명구론》
또한 어떤 이가 말하길, 중관학파는 없음을 말하는 자이다. [...] 그렇지 않다. 중관학파는 의존하여 생김을 말하는 자이다. 《명구론》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중관학은 없음(단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불교학자들 중 일부는 4구 부정을 근거로 중관 논리를 '모순율ㆍ배중율 등 형식 논리에 대한 비판 혹은 초월'[7]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일다를 통한 무자성성(無自性性) 논증에서 알 수 있듯, 기실 중관학파는 배중률 등 형식 논리적 타당성(validity)을 충족하는 논증을 활용하여 승의제인 공성을 확립해왔다. 만약 몇몇 중관학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중관의 4구 부정이 형식 논리에 대한 비판이나 초월을 의미한다면, 논증의 결과로 인해 논증의 원칙과 전제가 부정되어 스스로의 논증을 파기해야 하는 역설을 초래하게 된다. 즉 승의제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세속제만을 부정하게 되어 세속제에 의지하여 승의제가 성립하는 이제(二諦)의 체계가 붕괴되고,[8] 또한 이제로써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제거하는 중도견(中道見)을 상실하여[9] 단변(斷邊)에 떨어지는 과실이 생겨난다.

중관의 4구 부정을 온전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나가르주나 이래로 중관학파가 자성으로 성립하는 법을 부정하고 의존하여 성립하는 법을 건립해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중관학파는 궁극적 실상의 부정 대상인 자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로 '자성으로 성립하는 4구'를 부정한 것이지 4구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며, 형식 논리의 경우에도 논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자성으로 성립하는 것을 부정할 뿐 형식 논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부정 대상인 법의 아(我) 내지 법의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4구 등으로 성립하는 법 자체를 부정하게 되면 상술한 바와 같이 단변에 치우치게 된다. 이는 단지 세속법을 부정하는 것일 뿐 승의의 공성을 인식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도리어 정리지(正理知)에 의한 공성의 인식을 저해하여 결과적으로 아집에 조금의 해도 가할 수 없다.

논리 체계는 중관학파를 포함하여 모든 불교학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체계이다. 쫑카빠에 따르면 귀류논증학파와 자립논증학파의 차이도 논리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성의 성립 여부에 있다. 일반적인 논증식 체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宗]ㆍ원인[因]ㆍ비유[喩]라는 세 가지 양상[三相] 각각이 자성으로 성립한다고 여기는 자립논증학파의 자립인(自立因)을 비판하는 것이 (자립논증학파를 비롯한 하위 학파들과 구분되는) 귀류논증학파만의 특징 중 하나라고 쫑카빠는 규정하였다.
사이토 아키라 外, 《공과 중관》(남수영 譯)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이태승,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
인강(김수연), 《이일다(離一多) 논리를 통해 고찰한 쫑카빠의 중도관》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온 외에 별도로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아트만', '참나'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은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며 믿음, 신념의 영역에 해당한다. 설사 주관적 체험을 인정하더라도 이들의 '아트만', '참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오온의 일부인 의식의 특정한 상태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서도 깊은 잠에 빠지거나 기절한 것 같은 무기(無記), 혼침(昏沈)의 상태를 경험한 후 이를 "분별망상이 끊어진 자리", "참나" 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주의를 요한다. 혹은 일부 수행자의 경우 세간의 선정삼매나 그와 유사한 명상 상태를 경험한 뒤 이를 자신의 진정한 자아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명상 중의 각종 체험이나 삼매(三昧, samadhi)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이를 통해 번뇌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질 수는 있지만, 무아ㆍ공성에 대한 바른 지혜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윤회의 근원인 아집을 제거할 수 없으며,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고 진정한 '나'라고까지 여긴다면 도리어 아집이 더욱 공고해지는 폐단을 초래하여 해탈과 성불은 더욱 요원해진다.
불교의 소승과 대승, 그리고 대승의 현교와 밀교 등 모든 가르침에서는 무아의 견해를 설하고 있다. 행(行)의 측면에서는 삼보에 귀의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에 있으며, 견해의 측면에서는 사법인(四法印)을 인정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다. 사​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일체법이 공(空)하고 무아(無我)임을 모든 불교도가 인정한다.

불교의 4대 학파(유부, 경량부, 유식학파, 중관학파)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무아는, '나'(아트만, 원질)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부분으로 나뉠 수 없는 하나도 아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유식학파에서 주장하는 법무아의 견해는 마음과 마음의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관학파에서는 현상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법무아를 주장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중관의 열쇠》 (게시 소남 걀첸 譯)

외도와 불교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행위 측면에서 삼귀의(三歸依), 견해 측면에서 사법인(四法印)의 인정이다. 사법인 중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오온에 의존하지 않는 아(我)가 존재하지 않음 혹은 상일주재(常一主宰)[10]의 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브라만교도같은 외도들은 무상(無常)하고, 부분이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오온과 달리, 오온과 별도로 존재하는 상일주재하는 인아를 주장하므로 불교도나 불교 수행자는 될 수 없다. 소승 부파 중 윤회의 주체로서 오온과는 다르지만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非卽蘊非離蘊] 뿌드갈라(Pudgala, 補特伽羅)의 존재를 주장한 독자부, 정량부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무아설을 위배했다는 혐의로 '불법에 붙은 외도[附佛法外道]'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11]

근현대 불교학자들 중에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나 미즈 리스 데이비스(Mrs. Rhys Davids)처럼, 상대부정(Skt.paryudāsa-pratiṣedha, Tib.ma yin dgag)같은 문법적 요소나 경전의 일부 구절을 근거로 "오온은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지만, '아트만', '참나' 등 오온을 제외한 나머지 무언가는 아(我)이며, 자성(自性)이 있다"는 식의 비아설(非我說) 혹은 진아설(眞我說)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오온과 별도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 "'나'와 오온이 여럿이다"란 주장과 별 반 다를 바 없는 가설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는 이미 상술하였고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승 논사들에 의해 논파당하였다.

한편 석가모니는 상주론자들이 비록 불교도는 아니지만 인과를 부정하는 단멸론자보다는 훨씬 우월하다고 보았다. 상주론자들은 대체로 인과와 업의 상속을 부정하지 않기에 선한 행위를 실천하여 좋은 과보를 누리고, 수행을 통해 공덕자량을 일부 쌓을 가능성이 있다. 인과를 부정하면 자량을 쌓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어 해탈과 성불은 물론이고 선도(善道)에 태어나는 것마저 불가능하므로, 차라리 승의제의 공성을 부정할지언정 세속제의 인과를 인정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상견(常見)으로 인해 쌓을 수 있는 자량의 한계는 있다. 자량도(資糧道)에서부터 무학도(無學道)에 이르기까지 오도(五道)의 모든 과정은 공성 인식에 의해 나아가게 되며, 공성 인식은 단견(斷見)과 상견같은 변견(邊見)의 대치법(對治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자량도(정확히는 자량도의 중中 이상)에서부터 공성 인식을 통해 상견이 소멸되기 시작하여 가행도(加行道)의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면 상견은 완전히 극복되므로, 상견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세제일법 이상의 과위를 얻을 수 없다.
■ 쫑카빠의 이변중관설 비판과 무차(無遮)로서의 공성

티베트 불교의 대학자 쫑카파(tsong kha pa)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견해(yod min med mun gyi lta ba)"처럼, 4구(四句)/4변(四邊)[12]으로 성립되는 일체의 인지를 여읜 것이 제법의 실상(實相)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이희론(離戱論)' 혹은 '이변중관설(離邊中觀說)'을 제법의 실상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상술한 "비유비무"의 경우, '유(有)'와 '무(無)'는 직접 모순이므로[13] '비유(非有)'라고 판단함은 곧 '무'라고 판단한 것과 같다. 그럼에도 재차 '비무(非無)'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율ㆍ배중률(排中律)에 위배되므로 세간에서조차 진실이라고 인정될 수 없다.

또한 이와 같이 논리적 정합성을 무시한다면 논리 체계와 논리 체계에 기초한 사성제(四聖諦), 인과(因果)와 연기(緣起) 등이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아집(我執)으로서의 분별이 아닌 정리(正理, rigs shes: 논리적 인식)에 의거하여 집착을 멸하고 실상을 찾는 바른 분별 역시 저해하게 되고, 인과와 연기에 대한 믿음과 공성의 인식이 공존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공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사소한 판단마저 불가능하게 되고, 아집을 완전히 제거한 부처와 아라한들은 '나', '너'같은 피아(彼我)나 선악(善惡), 인과 등의 분별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식의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결론이 도출되는 등 다양한 모순과 폐해를 초래하게 된다.

쫑카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변중관설은 반야ㆍ중관의 진의와 거리가 먼 피상적ㆍ단편적ㆍ축자적 해석이고 공성을 인식하기 위해 논파해야 할 부정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릇된 인식에 해당한다. 쫑카파의 중관 사상과 이변중관설의 주된 차이는 《반야경》같은 경전의 가르침과 논리적 분석으로써 궁극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부정 대상(Skt.pratiṣedhya, Tib.dgag bya)의 파악에 있다. 부정해야 할 대상을 부정할 뿐 어떠한 정립적 함의도 내포하지 않는 무차/절대부정/비정립적 부정(Skt.prasajyapratiṣedha, Tib.med dgag, 無遮)[14]이 곧 공성의 정의이다. 공성이 무차인 이유는 경론에서 공성을 '무자성(無自性)', '무아(無我)'와 같이 단지 부정대상의 부정일 뿐이라고 정의하며, 또한 공성을 지각하는 분별지(分別知)가 직접적으로 부정대상을 부정하며 공성을 지각할 뿐 간접적으로 어떠한 정립법도 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성은 부정 대상의 부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공성의 인식을 위해서는 먼저 부정 대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부정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과도하게 부정하면 단멸변(斷滅邊)에 치우치게 되고, 과소하게 부정하면 상주변(常住邊)에 치우치는 허물이 있게 된다.

이변중관설은 중관의 부정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4구부정(四句否定, catuṣkoṭi-vinirmukta)' 등의 중관 논리를 도식적으로 적용하여 (4구/4변으로 성립하는) 제법(諸法)의 체계까지 과도하게 부정하는 오류를 야기했다고 비판받는다. 어떠한 불교 학파도 제법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으며, 만약 토대가 되는 제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법의 실상인 공성도 존재할 수 없다. 즉 이변중관설은 분석의 경계가 과도한 나머지 제법의 실상을 인식하는 논리가 아니라 단지 제법을 파괴할 뿐인 논리로 변질되었고, 승의제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부정 대상인 아(我)를 지나치게 부정하여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가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이제(二諦)의 체계마저 부정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변중관설은 중관학파는 커녕 인도의 대소승 어느 학파의 견해에도 속하지 않는 불교 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실제 이변중관설이나 그와 유사한 견해들의 영향으로 공성에 대한 정견(正見)을 확립하지 못한 채 단멸론이나 상주론에 치우치는 경우를 반야 사상이 발달한 대승불교권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모든 인지를 차단하는 무심무념(無心無念)만으로 자신이 공성을 지각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었다고 착각하거나, 깊은 잠이나 기절 상태처럼 무기(無記)에 빠지거나 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 등의 특정한 선정(禪定)에 들어가 인지 작용이 정지된 상태를 공성에 대한 지각이라 여기는 사례가 그러하다.[15][16] 또한 보리심ㆍ바라밀행ㆍ오도십지(五道十地)ㆍ성불(成佛) 등 근(根)ㆍ도(道)ㆍ과(果)의 체계를 무시하며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일삼는 것과 혹은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음을 최상의 수행으로 여기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대상의 비존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멸론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때문에 겔룩에서는 이변중관설을 단멸론으로 간주한다. 여기에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불가설적(不可說的) 실재'를 상정하거나 혹은 비차/상대부정/정립적 부정의 방식으로 공성을 해석할 경우 단멸론과 상주론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는데, 가령 이변중관설을 옹호하며 쫑카파를 비판한 싸꺄의 샤캬 촉덴은 이후 중관에서 유식을 거쳐 최종적으로 '세속제는 공하지만 승의제는 불공(不空)'이라는 타공(gzhan stong, 他空) 사상에 귀착하게 된다. 이러한 극단들은 모두 붓다가 "심오하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말한 공성을 지각하는 바른 인식(量, pramāṇa)이 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승의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아는 것이 공성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쫑카파는 《의취선명(意趣善明, dGongs pa rab gsal)》에서 승의(don dam)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설명한다. 첫째는 공성을 지각하는 정리지(正理知, rigs pa'i shes pa)로서의 승의이다. 이는 공성을 지각하는 문(聞)ㆍ사(思)ㆍ수(修) 세 가지의 지혜, 논리적 인식을 말한다. 이러한 승의는 존재하며 그의 측면에서 성립하는 것도 존재한다. 공성은 이와 같은 측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승의로 존재하는 것은 실집(實執, bden 'dzin)이 아니다. 상술한 '이일다인(離一多因, Skt.ekânekaviyogahetu, Tib.gcig du 'bral ba'i gtan tshigs)'도 공성을 확립하는 대표적인 정리(正理) 중 하나이며, 공성을 사유하는 분석 명상의 주제가 된다.

둘째, 부정 대상으로서의 승의이다. 이러한 승의는 공성의 부정 대상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측면에서 성립하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실집이 된다. 쫑카파에 따르면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궁극적인 부정 대상언설분별(言說分別)의 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제법의 본성 즉, 언설분별의 식에 의해 세운 것이 아닌 자성(自性)이다. 다시 말해 일체법은 명칭, 언설로 가립(假立)되었을 뿐임에도 자성 그 자체를 아(我)로 여기는 것이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부정대상이다. 예를 들어 상술한 이일다인 같은 논리적 분석을 통해 '나'라고 이름 붙여진 토대인 오온(五蘊)의 측면에서 '나'라는 이름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명의무득名義無得]을 알 수 있다.[17] 즉 명칭 의미인 '나'를 명칭의 토대인 오온의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곧 '나'가 승의/진실/실제로(또는 자성/자상(自相)/자체(自體)로)[18] 성립하는 것으로서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한 아공(我空)의 부정대상이 된다.[19] 경론에서 "유(有)ㆍ무(無)ㆍ비유비무(非有非無)ㆍ역유역무(亦有亦無)"와 같은 4구를 부정하는 것 또한 부정 대상인 '승의/진실/실제로(또는 자성/자상/자체로) 성립하는 4구'를 부정한 것일 뿐, 4구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 승의제와 세속제를 구분할 때 승의제란 공성을 지각하는 정리지의 측면에서 성립된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체법이 승의로 존재하지 않고[승의무勝義無], 세속으로만 존재한다[세속유世俗有]'고 말할 때의 승의는 부정대상으로서의 승의이다. 즉 공성은 승의제(=공성을 인식하는 정리지의 측면에서 성립된 것)이지만, 공성 역시 승의유/진실유/실의유(=부정 대상인 승의/진실/실의(實義)로 성립하는 것 또는 자성/자상/자체로 성립하는 것)가 아니며 세속유/가유(假有)/언설유(=분별식에 의지하여 언설로 가립된 것)일 뿐이다.[20]

단, 상술한 '이변중관설 비판'과 '무차로서의 공성'은 쫑카파와 쫑카파를 개조(開祖)로 삼은 티베트 불교 최대 종파인 겔룩의 중관 사상에 해당한다. 사꺄의 탁창 로짜와(stag tshang lo tsa ba), 고람빠(go rams pa), 샤꺄 촉덴(shakya mchog ldan) 등은 도리어 자종(自宗)의 이변중관설을 진정한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로 간주하고 쫑카파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 중 고람빠는 《변별정견(辨別正見, Lta ba’i shan ’byed theg mchog gnad kyi zla zer)》에서 "비유비무"처럼 일체의 변(邊)을 여의는 사꺄의 중관 사상을 '이변중관설', 겔룩의 쫑카파의 중관 사상을 '단변중관설(斷邊中觀說)', 조낭의 돌뽀빠의 중관 사상을 '상변중관설(常邊中觀說)'이라고 명명하면서 쫑카파와 돌뽀빠의 견해는 양 극단에 치우친 잘못이 있다고 보았다.[21] 사꺄 외에 까규, 닝마 학자들 일부도 자신들 종파 고유의 명상 방식이 이변중관설과 부합한다고 여겨 고람빠의 견해를 수용하게 된다.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마츠모토 시로,《티베트 불교 철학》(이태승 外 共譯)
박영란,《 <密意解明(dGongs pa rab gsal)>에 나타난 중관학파의 부정대상(dgag bya)》
Constance Kasso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Gorampa>
2.2.1.2. 법무아(法無我)
그대가 [자성(自性)이 성립하지 않는] 자아를 보듯이
모든 법(法)에도 그렇게 적용해야 한다.
모든 법은 허공과 같아
자성이 전혀 없다.
《삼매왕경(samadhirajasutra)》

오온(五蘊) 등 일체 대상의 무아(無我), 즉 법무아(法無我) 역시 위에서 설명한 인무아(人無我)를 확립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확립된다.[22] 예를 들어 항아리의 경우, 항아리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구성된다. 항아리를 이루는 여러 작은 부분, 입자들은 근취인(近取因,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항아리를 만드는 장인의 노력 등은 구유연(俱有緣, 부수적인 원인)이 되어 항아리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원인과 조건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되는 항아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며,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중생의 의식은 마치 법의 자성, 즉 법아(法我)가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므로, '나' 뿐만 아니라 법에 대해서도 상술한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라는 논리' 등으로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석 끝에 전도(顚倒)된 인식의 대상은 해체되어 사라지고, 마음에 떠올렸던 인식 대상은 단지 분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며 그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되어 법무아(法無我)를 깨닫는다.

위에서 언급한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라는 논리' 외에도 《중론》의 5종 논리, 《입중론》의 7종 논리 등 다양한 논리적 추론들을 통해 무아, 공성에 대해 그릇됨 없이 바르게 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집중 명상(Skt. sthāpyabhāvanā; Tib. 'jog sgom)을 통해 샤마타를 획득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분석하는 명상인 분석 명상(Skt. vicārabhāvanā, Tib. dpyad sgom)을 통해 비파샤나를 획득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샤마타 수행과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샤마타, 비파샤나 수행과 그 결과로 얻게 되는 비파샤나로 수행과 결과를 명확히 구분하는 편이다. 보살은 샤마타비파샤나를 함께 닦아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 곧 승의 보리심을 점차로 발현하게 된다.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통해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점차 강화될수록, 공성(空性)이 연기(緣起)의 의미가 되고, 연기는 공성의 의미가 됨을 더욱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의 수승하고 바른 지견(智見)과 일치한다. 그 밖에 공성에 대한 설명은 티베트 불교/중관학 참조.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게셰 소남 초펠 譯)

법에는 가유(假有)와 실유(實有) 2가지가 있다. 가유와 실유를 정의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자기동일성(identity)의 인식 여부이다. 어떤 법이든 그것을 인식할 때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해서 인식해야 한다면 가유이고(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성격, 형상 같은 오온의 특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 어떤 법이든 그것을 인식할 때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하지 않고 법 자체의 동일성, 즉 자성(自性, svabhava)이나 자상(自相, svalaksana)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유이다. 따라서 오온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자아 혹은 개아(個我, pudgala)는 가유이고 실유가 아니다.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하고 단지 명언(名言)으로 가립(假立)되었을 뿐이라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자립논증 중관학파 이하의 하위 학파들은 모두 자아를 가유라고 주장하지만 오온 등의 법(法)은 독립적 실유로 여기는 미세한 아집(我執)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대승의 유식학파에서 아뢰야식을 건립하는 것 또한 실유의 자아를 건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2.1.2.1. 마음(의식)의 공성
세간의 유정은 대부분 식온(識蘊)을 헤아려 ‘나[我]’라고 집착하고, 그 밖의 다른 온을 헤아려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까닭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이한정 譯)

흔히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견문각지見聞覺知) 인식 작용을 하는 마음(의식)을 변치 않는 '나', '자아', '영혼' 등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러한 마음(의식) 또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찰나생 찰나멸을 반복하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6식(六識)[23]의 각각은 원인들, 즉 각각의 6식 자체의 인식 기능, 대상, 즉각적인 조건 등에 의존하고 있다. (2) 식(識)의 경험이 하나로 단일하게 보일지라도, 그 경험은 깊은 정념 속에서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짧은 순간들의 식(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3) 각 순간의 식(識)도 바로 전 순간의 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바로 다음 순간의 식(識)에게 영향을 준다. 이들 서로 다른 순간들의 식(識)은 단절된 사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연속을 형성한다.
“어리석은 사람아, 조건이 없으면 식(識)이 발생할 일도 없기 때문에, 식(識)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갈애 멸진의 긴 경(MN 38:5)》

석가모니는 ‘식(識)’이 자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사띠(Sati) 비구는 의식이 조건들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저절로 존재하며,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주하며, 업(業)을 만들면 그 과정에서 변화되는 일이 없이 그 업의 결과를 경험한다고 믿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식 또한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며 사띠 비구를 심하게 질책했다.
실재하는 것은 없다.
오온, 원소, 감각, 감각 기관,
주체, 객체가 온전하게 사라진
법무아와 동일한
내 마음은 본래 발생한 적이 없는
공성 그 자체이다.
《구햐싸마자 딴뜨라(Guhyasamāja tantra)》(양지애 譯)
실재하지 않는 표면적인 현상들의 시자(侍者)들이여, 들으시오!

내 안에 별도로 실재하는 대상은 없으니, 이는 곧 자생(自生)하는 청정의식의 견해이다.
과거에 지나간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미래에 발생할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현재에 나타나는 것도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지 않는다.
업(karma)은 실재하지 않는다.
찰나는 실재하지 않는다.
무지는 실재하지 않는다.
지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지혜는 실재하지 않는다.
윤회는 실재하지 않는다.
열반은 실재하지 않는다.
명지(明知, vidyā) (=릭빠rig pa)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
청정의식의 현현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인식 주체로부터 발생한다.[24]
《yi ge med pa rgyud(The Tantra Without Syllables)》[25]
질문: 원심(原心, gnyug ma'i sems) 혹은 정광명(淨光明, 'od gsal)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합니까? 의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자성(無自性)일 수 있습니까?

제14대 달라이 라마: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때로 문헌들에서 원심 혹은 정광명은 원인과 조건들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는 언급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일반적으로 "발생된 현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서로 다른 함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것들은 "발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들이 무명(無明)과 무명으로 인한 행위들의 발생물이기 때문입니다. 부연하자면 발생되었다는 것은 원인과 조건들로 인해 발생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한 개념적인 사고 과정에 의해 "발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헌들에서는 붓다의 행위가 연속적이고 중생들이 존재하는 한 붓다의 행위도 중단없이 계속된다는 의미에서 붓다의 행위는 항상하고 본래 생겨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연속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붓다의 행위는 때로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생원시광명심(俱生原始光明心, gnyug ma lhan cig skyes pa’i ’od gsal gyi sems) 또한 연속성의 측면에서 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연속은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특정 관점에서 보자면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구생원시광명심은 외부의 원인ㆍ조건들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 영향을 받거나 일시적인 의식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내재된 변치 않는 심상속(心相續)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원심(原心)-현재 찰나의 의식-은 이전 찰나의 의식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유념해야합니다. 승의제와 세속제를 동시에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전지(全知)한 붓다의 의식, 즉 붓다의 지혜에 있어서도 이전 찰나의 의식으로부터 현재 찰나의 의식이 생겨난다는 사실은 유효하며, 붓다의 지혜 또한 인지(認知) 상태 또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붓다의 지혜가 인지 상태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붓다의 지혜로 변하게 될 요인인 구생원시광명심 또한 인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지를 자신의 본성/법성(法性)으로 갖지 않는 것이 인지를 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번째 관점에서 보면 구생원시광명심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합니다.
H.H. the Fourteenth Dalai Lama, Nyoshul Khenpo, 《Dzogchen: Heart Essence of the Great Perfection》

마음은 윤회와 열반 등 모든 인식하는 현상의 토대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거친 의식은 정광명(淨光明) 같은 초미세의식에 용해되고, 환생할 때 거친 의식은 초미세의식의 기반으로부터 다시 나온다. 거친 의식에서 건설적인 생각과 파괴적인 생각이 생겨서 업(業)을 만든다. 번뇌에 찬 생각의 결과로 윤회가 오고, 출리심과 보리심과 지혜와 같은 도덕적 마음 상태의 결과로 열반을 성취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부처의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이후에도 부처의 명료하고 인지(認知)하는 본성을 가진 마음(의식)의 연속은 계속 이어지며 이를 단절할 원인은 없다고 본다.[26] 이러한 부처의 심상속(心相續) 또는 지법신(知法身, ye shes chos sku)의 원인이 되는 가장 미세하고 청정한 마음, 즉 금강승에서 말하는 구역 전승(舊譯傳承, rnying ma) 족첸의 릭빠(rig pa)나 신역 전승(新譯傳承, gsar ma) 무상요가 딴뜨라의 구생원시광명심(俱生原始光明心, gnyug ma lhan cig skyes pa’i ’od gsal gyi sems)[27] 또한 객진(客塵)번뇌[28][29] 같은 외부의 원인과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단절됨 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일반적인 의식과 달리 릭빠나 원심(原心, gnyug sems)은 외부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무시(無始)이래로 항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하는 특성을 가지므로, 세간에서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는다", "항상하다"라고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릭빠나 원심 역시 전(前) 찰나의 동류(同類)의 의식에 의존하여 후(後) 찰나의 의식이 발생하면서 끊임없이 생(生)ㆍ주(住)ㆍ멸(滅)하고 인지 작용을 하는 의식의 연속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릭빠나 원심 또한 무상(無常)하고, 찰나로 나뉘어지고, 조건에 의존하는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진실로 존재하지 않으며 외도(外道)의 항상하고[常], 나뉠 수 없는 하나이고[一], 독립적인[主宰] '아트만', '참나' 등과 같지 않다.

릭빠나 원심을 아트만과 같이 자성(自性)으로 성립하는 실체로 혼동하지 않으려면,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설명처럼 동일한 표현에도 다양한 함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30] 가령 "발생한다"는 표현도 (1) 번뇌와 번뇌로 인한 행위, 혹은 개념적/분별적 사고에 의해 발생하는 것과, (2) (연기(緣起)의 일반적 의미로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항상하다"는 표현도 (1) 아트만처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2) 릭빠와 원심처럼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生)ㆍ주(住)ㆍ멸(滅)하는 의식의 흐름으로서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

정광명 같은 미세한 마음/의식은 윤회와 열반을 얻는 기반이지만, 마음 또한 '마음'이라는 명언(名言)으로만 가립(假立)되었을 뿐 그것의 독립적이고 불변(不變)하는 실체를 찾고자 한다면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즉 마음의 본성/법성을 안다는 것은 '인식주체(혹은 마음/의식)의 무자성=인식주체의 공성'을 온전히 깨닫는 것과 같다. 무상요가 딴뜨라 등 금강승의 공성에 대한 견해와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공성에 대한 견해는 일치한다. 금강승에서 미세의식을 강조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그러한 의식을 활용하여 마음의 본성인 공성을 인식하기 위함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H.H. the Fourteenth Dalai Lama, Nyoshul Khenpo, 《Dzogchen: Heart Essence of the Great Perfection》

2.2.2. 공성과 자비의 관계

2.2.2.1. 자비의 토대: 불성으로서의 공성
"대해(大慧)야, 내(=석가모니불)가 설하는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자아와 다르다. 대혜야, 여래·응공·정등각은 성공(性空)·실제(實際)·열반·불생(不生)·무상(無相)·무원(無願) 등의 여러 말로 여래장을 설했다. 어리석은 범부들을 무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분별이 없는 여래장을 설했다. 미래, 현재의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 여래장을 자아로 집착해서는 안된다. (...)

대해야, 내가 여래장을 설한 것은 자아에 집착하는 여러 외도들을 다스려서 허망한 견해를 떠나 3해탈에 들어가 속히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자아와 다르다. 만약 외도의 견해를 떠나고자 하면, 무아인 여래장의 뜻을 알아야한다."
《대승입능가경》(김성철 譯)

불교에서 지혜와 함께 자비를 강조하므로 불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자애심, 연민심, 보리심 등의 도덕적이고 선한 마음은 거친 의식에 해당하며 초미세의식 자체는 선악(善惡)을 떠난 중립적인 의식이다. 또한 미세의식과 거친 의식 모두 궁극적 본성은 공성(空性)이며 선악의 분별은 조건지어진 연기(緣起)에 해당한다. 자애심, 자비심, 보리심 등의 도덕적인 마음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의식이므로 후천적인 계발과 함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도-티베트 불교의 윤리론, 수행론에 토대가 된다.

만약 "본래 부처", "자성불(自性佛)"같은 레토릭처럼 중생이 본래부터 일체지(一切智)와 십력(十力) 등 붓다의 특성/공덕을 자성/본성으로 갖는 존재라면, 자신의 자성/본성과 어긋나게 번뇌에 오염될 수 없고 붓다의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신(三身)의 공덕[31][32]을 이미 구족(具足)하였으므로 번뇌를 제거하고 공덕을 갖추기 위한 가르침과 수행은 불필요했을 것이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할 이유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중생의 마음의 실상(實相)과 부처의 마음의 실상이 모두 공성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전자는 중생의 마음이 장애를 가지고 있을 때의 특성인 마음의 자성/본성이며 후자는 중생의 마음이 장애를 벗어났을 때의 특성인 마음의 자성/본성이기 때문에 둘의 본질은 같지 않다. 만약 부처와 같이 번뇌장과 소지장을 비롯한 모든 마음의 장애를 없앤 상태가 중생에게 내재한다면 중생이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중생은 공성에 대한 직접적 지각을 가질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한 부처와 같은 자성법신이 중생에게도 존재한다면 자성법신과 본질이 하나인 지법신(知法身)/일체지(一切智) 또한 중생에게 존재해야 하므로 중생 또한 전지(全知)할 것이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33]

이처럼 불성ㆍ여래장 교설과[34] 그로부터 파생된 레토릭들을 축자적,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불성ㆍ여래장은 장차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칭한다'와 같은 적극적, 수행론적 해석이 요구된다. 유식학파에서는 여래장을 '(미래에) 부처의 공덕이 될 마음의 청정한 종자(種子)'로 해석하며,[35] 중관학파[36]에서는 '그러한 마음의 본성인 공성(空性)/무자성성(無自性性)'을 여래장으로 본다.[37][38] 마음의 본성이 내재적 실재성(inherent existence), 즉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번뇌에 염오(染汚)될 수 있고, 또한 번뇌를 소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중론》 등에서 천명하듯, 만약 마음에 자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로 인해 어떠한 연기적(緣起的) 사태도 성립할 수 없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그리하여 실제에는 연(緣)의 화합에서 싹이 나옵니다. 또한 스스로에서 나지[自生] 않으며, 또한 남에게서 나지[他生] 않으며, 또한 스스로와 남이 합하여서 나지[自他合生] 않으며, 또한 자재천(自在天)에서 나지[自在天生] 않으며, 또한 때와 방위에서 나지[時方生] 않으며, 또한 본성(本性)에서 나지[本性生] 않으며, 또한 원인 없음에서 나지[無因生] 않으니, 이를 생기는 법의 차례라고 합니다.
《불설도간경》(김성구 譯)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느 곳에서든 자체로부터건, 남(他)으로부터건, 그 양자에서건, 무인(無因)으로건 사물[=존재]들의 발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중론》(김성철 譯)
《중론 개정본 - 산스끄리뜨 게송의 문법 해설을 겸한》(김성철 譯)

비(非)불교도들은 무상(無常)한 오온(五蘊)과 별도로 자성을 가진, 즉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이며 불변하는 존재인 지바(jīva), 아뜨만(atman), 자재천(自在天, Īśvara) 등을 상정한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존재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성립된 연기법계(緣起法界)와 어떠한 상호작용도 할 수 없는 공허한 관념들일 뿐이다. 자재천 등 창조주로부터의 발생이 존재한다는 비불교도들의 주장은 일찍이 대승 논사들에 의해 논파당한 바 있다.

발생은 자기로부터의 발생[自生], 타자로부터의 발생[他生], 자기와 타자로부터의 발생[自他生], 원인 없는 발생[無因生] 네 가지로 나눌 수 있고 그 외에 다른 발생은 없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논사인 찬드라키르티에 따르면 자재천 등으로부터의 발생은 무인생을 제외한 자생, 타생, 자타생 3가지 중 하나에 해당한다. 먼저 존재가 자성(自性)으로 성립하는 자기로부터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존재하고 있음에도 자기 자신에 의해 항상 발생하게 되는 과잉포섭(atiprasanga)의 오류에 빠지게 되므로 발생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존재가 타자(여기서 타자란 자기와 완전히 상이(相異)한 것으로서 '타성(他性)=타자의 자성(自性)'으로 성립하는 독립적 실체를 의미한다)로부터 발생할 경우 등불로부터 깊은 어둠이 생기는 등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타자를) 발생시키지 않는 모든 자에게 있어서도 타자라는 점은 동일하기 때문이다.[39]

자기와 타자로부터의 발생은 자기로부터의 발생과 타자로부터의 발생 각각에서 야기된 오류들을 통해 부정 가능하다. 따라서 외도들의 주장처럼 자재천이나 아뜨만 등이 인(因)과 연(緣)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실체라면 그로부터의 발생은 존재할 수 없으며, 도덕적 의식이나 관념, 행위 등도 발생할 수 없다.
《쁘라산나빠다 1》(김정근 譯)
자재천은 허공도 아니고 부동성이기 때문에
자아(個我)도 아니다. 앞에서 논했던 것처럼
[전지전능하고] 불가사의한 창조주라고 해도
불가사의한 것을 주장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입보리행론》
제14대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최로덴 譯)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라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거짓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이간질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욕지거리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꾸며 대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탐욕스럽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분노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다.’
《이교도의 경(Titthāsutta)》
《앙굿따라니까야》(전재성 譯)

설사 절대자가 논리를 초월하여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하거나 세계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라도, 《입보리행론》등의 경론에서 지적하듯 (바른 인식[量]으로써) 성립불가능한 것, 식(識)의 적합한 인식 대상[所知]이 아닌 것, 비존재에 대해 논하는 것은[40]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다. 또한 《이교도의 경(Titthāsutta)》 에서는 만약 절대자라는 근본 원인이 있다면 마땅히 악업과 번뇌가 존재하는 책임도 절대자에게 있음을 지적한다. 더군다나 절대자가 선한 존재라면, 전능하고 선한 절대자가 악을 존재케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와 같은 딜레마까지 해명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영원불변하고 순선무악(純善無惡)한 절대자나 혹은 그러한 절대자를 내면화한 자아라는 관념은 그것의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에 대한 갈애(渴愛, tṛṣṇā)인 유애(有愛, bhava-taṇhā)를 충족시켜 일시적 만족감을 주고 경우에 따라 도덕법칙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는 있다. 어떤 이에게는 절대자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절대자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도덕적 정서를 고취하고 도덕율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일시적인 내적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는 중도(中道)에서 벗어난 극단적 견해인 상견(常見)으로서 아집(我執, ātma-grāha)의 소산이라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아집으로 인식하는 것과 일치하게 (아집의 인식대상인)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유아(有我)는 '그러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무아와 양립할 수 없는 직접 모순이다. 따라서 무아를 인식하면 자연스럽게 유아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며, 아직 유아에 대한 인식이 남아있다면 이는 무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된다. 때문에 아(我)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견지하는 한, 무아의 인식을 통한 아집의 소멸은 불가능하며 아집으로부터 비롯된 탐욕, 분노 등 일체 번뇌의 근본적 소멸 역시 불가능해진다.
나아가 선법(善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공력(功力)이나 수습(修習)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며, 둘째는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를 곧 생득선(生得善, 선천적으로 획득된 선)과 가행득선(加行得善, 후천적 노력에 의해 획득된 선)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공력이나 수습에 의하지 않고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所依身) 중의 종자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성취'라고 하고, 만약 소의신 중의 종자가 이미 손상된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불성취'라고 한다.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譯)
(문) 어떠한 것이 생득선(生得善)입니까?
(답) 예전에 한결같이 익힌 것에 연유해서 이와 같은 과보를 성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체적인 성품에 연유해서 이 같은 처(處)에 태어나서 사유하지 않고도 자유로이 경계에 따라[任運] 즐거움에 머물게 된다.
《대승아비달마집론》(이한정 譯)

물론 불교도 도덕성의 선천적 측면을 인정한다. 그러나 본질주의적 입장과 달리 불교에서는 선천적 도덕성 또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결과라고 본다. 과거 생(生)의 행위 내지 업(業)에 의해 개개인의 타고난 도덕적 정서, 인지, 행동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결정론과 본질주의를 배격하고 변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진화론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진화론이 유전자 중심의 유물론인데 반해 불교는 업 종자로 변화를 설명하는 비(非)물질주의라는 차이가 있다. 통상적 의미의 도덕성은 업 중에서도 유루(有漏)의 선업(善業)과 무루업(無漏業)에 의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41] 그리고 과거의 업에 의해 형성된 도덕성은 조건에 따라 발현될 수도, 발현되지 못할 수도 있고 또한 강화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
부처님 색신(色身)의 원인도 끝없는 세간처럼 헤아릴 수 없다면, 법신(法身)의 원인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모든 결과 역시 [니야그로다 나무처럼] 작은 원인으로부터 커다란 결과가 생긴다면 부처의 원인이 되는 헤아릴 수 없는 두 자량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결과가 생기는 것은 확실하다네.

대왕이시여, 요약하면 부처님들의 색신은 복덕자량에서 생기고 법신은 지혜자량에서 생긴다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자량만이 부처를 이루는 원인이 되니 속히 부처를 이루게 하는 핵심인 복덕과 지혜를 항상 닦고 실천해야 하네.
《중관보만론》(게시 소남 걀첸 譯)

도덕성의 강화와 같은 마음/의식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마음/의식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공(空)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번뇌는 일시적이며 마음/의식의 본성은 공성으로서 필요한 조건이 모이면 어떠한 결과도 발생할 수 있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중생은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하게 붓다의 지혜와 자비, 원만성취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이를 구경일승(究竟一乘)이라 한다. 단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체 공덕을 두루 갖춘 원만한 부처의 과위(果位)를 얻으려면, 무수히 많은 부처의 공덕과 상응하는 무수히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때문에 그러한 조건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도(道)를 오랜 기간 충분히 수습(修習)할 필요가 있다.
■ 불성(佛性)과 불(佛)의 차이

열반을 원인과 조건으로 형성되지 않는 무위법(無爲法)이라하는 이유는, 대승 학파의 경우 열반이 곧 모든 장애가 사라진 청정한 마음의 본성인 공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공성 자체는 원인과 조건으로 형성되거나 조작되지 않는 무위법에 속한다. 때문에 중관학파에서는 아직 마음의 장애를 제거하지 못한 중생의 가장 미세한 마음의 본성인 공성/무자성성(無自性性)을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고 어떠한 조건으로도 변하지 않는 자성주불성(自性住佛性)이라 하며, 자성열반(自性涅槃)이라고도 일컫는다.

자성주불성 혹은 자성열반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소멸된 청정한 부처의 마음의 본성인 공성/무자성성, 즉 자성법신(自性法身) 혹은 실제 열반을 성취하는 토대가 된다. 자성주불성은 도제(道諦)인 오도(五道)와 십지(十地)의 과정을 거쳐 불과(佛果)를 얻는 시점에 자성법신으로 변화한다.[42] 여기서 불과를 이루기 위한 보살의 수행 과정인 대승 오도(성문, 연각의 오도와 구분해야 한다)와 보살 십지는 지혜와 공덕으로써 번뇌장과 소지장을 제거하는 유위(有爲)의 작용이다.

열반은 곧 공성이고, 공성은 무위법이므로 열반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오도십지와 같은 유위의 도제(道諦)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자성주불성(=불성佛性)과 자성법신(=불佛), 자성열반과 실제의 열반을 구분하지 못한 착각의 소치이다. 전자는 마음의 장애를 제거하지 못한 중생의 마음의 본성이고 후자는 마음의 장애를 모두 제거한 부처의 마음의 본성이므로 본질이 같지 않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번뇌와 번뇌의 습기(習氣)를 제거하지 못한 중생임에도 부처를 자처하는 "무지한 부처"와 같은 모순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중생의 마음의 본성과 부처의 마음의 본성이 공성이라는 점은 동일할지라도, 번뇌장과 소지장을 제거하지 못하면 실제의 열반을 얻은 것이 아니다.

실제의 열반을 얻기 위해 방편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로 번뇌장, 소지장과 같은 마음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성주불성 뿐 아니라 증장불성(增長佛性)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중관학파에 따르면 증장불성은 붓다의 지법신/일체지로 변화할 유위의 현상을 가리킨다. 자성법신은 공성으로서 무위법이지만 승의제를 인식하는 일체지와 세속제를 인식하는 일체지를 비롯한 일체종지(一切種智)인 지법신, 그리고 보신, 화신 등은 모두 유위법으로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실제의 열반, 그 중에서도 궁극적인 열반인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얻으려면 오도십지를 통해 법신과 색신의 원인인 무량한 지혜자량과 공덕자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2.2.2.2. 자비의 함양: 연민과 상호의존성
제14대 달라이 라마, 《부정적인 감정 극복하기》
성문 연각 등은 능인으로부터 태어나고
부처님은 보살로부터 태어나시니
자비심과 둘이 아닌 마음(공성)과
보리심은 보살들의 씨앗이다.

연민심이란 승리자의 원만한 결실로
이것의 씨앗이며 성장시키는 물과 같고
오랫동안 수용하는 대상을 성숙시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자비를 찬탄하는 것이다.

먼저 나라고 자신을 애착하고
나의 것이라고 사물에 집착이 생겨나니
도르래처럼 자유가 없는 중생에게
자비를 일으키게 한 모든 것을 공경한다.

중생은 움직이는 수면 위의 달과 같이 흔들리고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본
이러한 보살의 마음은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 자비로 순응하고

보현(普賢)의 원력으로 잘 회향하여
환희에 머무는 그것을 초지(初地)라 부르며
그때부터 초지를 얻게 되었으므로
보살이라 불리는 호칭을 얻는다.
《입중론》(양지애 譯)

불교에서의 자비는 신이나 아뜨만, 참나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인 공성에 근거한 자비이며, 자비의 최종 형태 또한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가 결합한 무연자비(無緣慈悲)이다.[43] 무연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필수불가결하지만, 지혜만으로 무연자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심은 지혜와 방편에 해당하는 각기 다른 법(法)이기 때문이다.

단, 지혜와 자비를 함께 수행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발달할수록 무명(無明)에 얽매인 중생들에 대한 연민이 늘어나고, 자비심을 수행하면 공성에 대한 명상이 용이해지며 일시적으로 거친 번뇌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의하면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는 성문, 연각, 보살 삼승이 모두 가지고 있지만 대비심을 원인으로 하는 보리심 없이는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보살은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 뿐 아니라, 원만한 부처의 과위를 얻는 종자이며 육바라밀 등 보살행의 실천을 증장시키는 대비심(大悲心)에 대해서도 수행하여야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반야학의 권위자인 겔룩의 학승 게셰 빨덴 닥빠(dpal ldan grags pa)는 대비심의 정의에 대해 '일체중생을 대상으로 모든 허물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저절로 생긴 연민심'이라고 말하였다. 수없는 전생 동안 일체 중생이 나의 어머니 아닌 적이 없으며, 때문에 그들 또한 이번 생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 지모(知母), 내 어머니였을 적 은혜를 기억하는 염은(念恩),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보은(報恩), 모든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자심(慈心) 등 네 가지를 대비심의 공통적이지 않은 주된 원인으로 삼는다.

진정한 대비심은 꾸밈없이 저절로 일어날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대비심에 익숙해지게 하는 조건들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마치 집착과 같은 번뇌도 익숙해지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 같이 대비심도 익숙해질수록 저절로 꾸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샨띠데바의 《입보살행론》에서 “익숙해지면 쉬워지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에서도 “마음이 자비 등에 익숙해지면 저절로 생기게 된다.”라는 등의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비심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 설명하자면, 무아를 닦는 것과 같이 대상을 뚜렷하게 보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경우에 주로 족곰(집중명상)을 해야 하는 것과 달리, 자비를 닦는 것과 같이 마음의 힘을 증장시키려 하는 경우에는 주로 여러 가지 이유에 관해 분석하는 쬐곰(분석명상)을 해야 한다. 대비심에 관한 분석명상에서 처음에는 부모, 가족, 친지 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자신에게 손해도 이익도 주지 않은 주변 사람, 나중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원수까지 대상을 확장해나간다. 또는 질병, 기아, 형벌, 혹한과 혹서, 도살, 폭행, 재난 등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들을 사유하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를 발원하고, 그 뒤 업과 번뇌에 시달리는 삼계(三界)의 모든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를 바라는 대자대비심이 가슴 속 깊이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익숙해진다.
게셰 빨덴 닥빠, 《공성과 자비에 대한 고찰의 요지(སྟོང་ཉིད་དང་བྱམས་བརྩེའི་སྐོར་རྟོག་འཆར་གནད་བསྡུས།)》(게셰 소남 걀첸 譯)

게셰 빨덴 닥빠가 설명한 전통적인 대승 불교의 자비 함양법은 '칠종인과법(七種因果法)'이라 일컬어지며, '칠종인과법'을 토대로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이라는 자비와 무아, 연기 개념이 결합된 더욱 심오하고 광대한 수행법을 익히게 된다. 자타상환법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중생들 역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기심과 자기 집착으로 인해 남들을 희생시키며, 그 결과 행복을 바라면서도 정작 죄책감과 근심, 두려움을 얻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근시안적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의 행복을 원하게 되면 그 결과 행복한 타인들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행복해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과 남의 입장을 바꿔 자신의 행복에서 타인의 행복으로 목표를 전환하는 것을 자타상환법이라고 한다. 자타상환법을 장애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나(我)', '나의 것(我所)'이 실재한다는 아집에서 벗어난 무아(無我)와 나와 남이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성(緣起性)을 인지해야 한다.[44]
2.2.2.3. 오해: 자비와 공성은 모순되는가?
(외도) 만일 [나(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유정(有情)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냐고 한다면
(중관) [해탈·성불의] 결과를 위해 행한 것을
무지로 인해 잘못 알고 곡해한 것일 뿐이다.

(외도) [실제로] 유정이 없다면 [세세생생 자비심을 닦은] 결과(성불)는 누가 받느냐고 하면
(중관) [진제(眞諦) 면에서 자비수행으로 성불하지 못함은] 사실이지만 무지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아집을 제거해야 하지만 바로 막지 못한다.
《입보리행론》<지혜품>(게셰 소남 걜첸 譯)

서양의 일부 불교학자들은 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대승 불교의 가르침이 모순된다고 이해하였다. 예컨대 예수회 사제이며 뛰어난 불교학자였던 하인리히 두몰린(Heinrich Dumoulin)은 지혜와 자비의 합일에 대해 "이 관점의 문제점은 인간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장처럼 덧없는 인간 존재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도와주고 구원하는 사람도 없고, 도움과 구원을 받는 사람도 없음을 알아차림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실체의 환상에 얽매이지 않으면 보다 활동적이고 자유롭게 자비를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비심도 틀림없이 실재가 아니고 그런 자비심은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고통받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8세기 경 중관논사였던 샨띠데바도 유사한 의문에 직면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샨띠데바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중생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속(世俗)에서는 중생도 존재한다고 답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속 세계의 유효성 안에서 명언(名言)으로 가립(假立)된 자아가 환(幻)과 같이 가유(假有)로 존재하며, 자비를 베푸는 대상 역시 세속의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말한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논쟁의 상대자는 만약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비를 베푼 결과, 즉 성불(成佛)은 누가 받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샨띠데바는 질문 내용이 역시 승의(勝義)에서는 사실이나 그러한 질문은 논점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오해라고 답한다. 승의로서는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중생이 없지만 세속에서는 고통받는 중생이 엄연히 존재하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고통의 원인인 아집(我執)을 제거하는 해탈과 성불의 도(道)에 종사할 수 있다.

여기서 고통의 원인인 아집은 사물과 사태에 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인식을 가리킨다. 아집의 제거는 아집의 인식대상인 일체법의 아(我) 내지 자성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하다. 앞서 말한 승의에서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말도 무자성(無自性)과 같은 의미이다. 즉 부정해야 할 대상은 자성이지 (고통, 자비, 윤회, 해탈, 성불과 같은) 세속의 인과(因果)가 아니다. 경전에서 일체법을 꿈이나 환영 등에 비유할 때, 이는 꿈과 환영 등이 비록 실재하지는 않지만 현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일체법 역시 자성이 없지만 행위의 체계는 타당함을 의미한다.[45] 자성을 부정하더라도 인과는 여전히 작용하며, 만약 인과까지 부정하면 허무주의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또한 까르마 까규의 스승인 제9대 따렉 꺕괸(sgra legs skyabs mgon) 린뽀체는 공성에 의해 자비심의 효력이 줄어들지 았으며 오히려 공성을 바르게 이해할 때 진정으로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인에게 세속제에 해당하는 자비심을 가지더라도, 승의제인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가 결합해야만 비로소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 모든 고통은 아집에서 비롯되고, 현상을 꿈처럼 보는 것은 아집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공성의 지혜와 자비가 결합할 때, 별개의 독립적인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져있다는 이원적(二元的) 인식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불이(不二)의 인식으로 진정으로 무한하고 열린 자비를 발현할 수 있다. '자기'와 '타자'가 독립적 실체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아집을 제거하지 않으면 결코 근본적으로 자비로워질 수 없고 끊임없이 삶에 고통을 초래하게 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의 지혜명상》(최로덴 譯)
따렉 꺕괸,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이창엽 譯)

3. 원보리심과 행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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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란다 사원에서 《입보살행론》을 설한 샨티데바[46]
보리심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나니
발원하는 원보리심과
발원한 것을 실행하는 행보리심이나이다.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것과
실제로 가는 것이 다르듯이,
현명한 이들은 이 두 가지 보리심의 차이를
순서대로 알아야 하나이다.
《입보살행론》(석혜능 譯)

《입보살행론》에서는 보리심을 원보리심(願菩提心)행보리심(行菩提心)으로 구분한다. 원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소망이다. 그리고 행보리심은 원보리심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보살계와 육바라밀, 사섭법 등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을 각각 눈과 다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원보리심을 통해 가야할 곳을 보고, 행보리심을 통해 그곳에 이르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자립논증 중관학파는 육바라밀 중의 어느 한 가지 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의 보리심을 행보리심, 그렇지 않은 상태의 보리심을 원보리심으로 구분하고,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보리심계(보살계)를 받기 이전의 보리심을 원보리심, 보리심계를 받은 이후의 보리심을 행보리심으로 구분한다.
범천 譯,《현증장엄론 역주》

3.1. 원(願)보리심

3.1.1. 사무량심

사무량심이란 자애, 연민, 기쁨, 평등(慈悲喜捨)이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뜻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무량(無量)이라고 부르는 것은 먼저 편파성이 없으므로 무량한 중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욕계심(欲界心)의 다섯 가지 장애[47]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선정(禪定) 상태이기 때문이다. 초선(初禪)을 닦은 수행자가 태어나는 공간인 범천(梵天)의 이름을 따서 사무량심을 사범주(四梵住)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사무량심이 범천의 일원인 천신(天神)들의 온순하고 거룩한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에서 사무량심은 《보살장경(Bodhisattva Piṭaka sutr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무량심은 보리심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보리심 수행에 앞서 먼저 사무량심을 수행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사무량심을 수행할 때 사용되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갖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고통 없는 행복(=해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애증(愛憎)의 차별에서 벗어나 평등심에 머물게 하소서.
"~와 ~의 원인들"이라는 구절은 특별히 자애와 연민을 일으킬 때 덧붙인다. 이는 중생들이 업(業)과 인과(因果)의 법칙을 이해하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이해해서, 행복을 가져오는 원인들을 만들고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들을 더이상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이다.

또 다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이 평등 속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렇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을 그렇게 머물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들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것들을 갖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그것들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들을 갖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그것들을 갖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좋은 세계에 환생하고 해탈의 더 없는 행복을 잃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것들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 그들이 그것들을 떠나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위의 형태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처음에 언급된다. 이는 나머지 자무량심, 비무량심, 희무량심이 특정 대상에게 편파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위의 형태는 (1) 소망 (2) 발원 (3) 결심 (4) 요청의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술할 보리심 수행 가운데 하나인 ‘칠종인과법’의 요약이기도 하다.

《현관장엄론》에서는 사무량심이 선정(禪定)을 수반하지 않는 이상 무량한 마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무량심에 대한 명상은 보리심을 증장하기 위해서 행해질 수도 있고, 선정을 계발하기 위해서 행해질 수도 있다.

사무량심만 수행하면 지혜가 발현되지 않아 범천에서 환생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사무량심을 일으키는 주체인 나 자신과, 사무량심의 대상인 일체 중생과, 사무량심을 일으키는 행위 세 가지 모두 상호의존적이므로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공성(空性)에 대한 지혜가 수반될 때[48]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3.1.2.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

티베트 불교는 보리심을 모든 수행의 동기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성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해탈로 이끄는 것이 목적임을 잊지 않게 한다. 또한 보리심을 강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을 증장(增長)하는 구체적인 수행법이 존재한다는 점이 티베트 불교의 특징이다. 보리심을 계발하는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의 전승으로는 로종(blo sbyong)이 있다. '마음 다스리기'라는 뜻의 로종에는 보리심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아상가의 1) 인(因)과 과(果)에 대한 일곱 가지 가르침(칠종인과법)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르주나의 2) 자신과 남들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교환하는 것(자타상환법)이다.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을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고찰함으로써 자신의 심성이 보리심에 가까워지도록 수행한다.
1. 칠종인과법(七種因果法)
(1) 지모(知母): 모든 중생이 수많은 전생 가운데 우리의 부모 아니었던 적 없는 것을 인식함.[49]
(2) 염은(念恩): 그들이 우리의 부모였을 때 베풀었던 친절에 대해서 고찰함.
(3) 보은(報恩):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함.
(4) 자애심(慈心): 부모였던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람.
(5) 연민심(悲心): 부모였던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람.
(6) 열의(熱意):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위대한 결심.
(7) 그 결과 모든 중생을 위해 부처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이룸

칠종인과법에 위대한 결심이 들어간 이유는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인 무량한 자애심과 연민심(사무량심)은 소승(小乘)의 성문과 독각에게도 있지만, 일체중생의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없애는 행(行)을 "내가 하겠다"는 것은 대승(大乘) 아니고는 없기에 용감하게 더욱 위대한 결심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생각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생각(=사무량심) 정도로는 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진심으로 이것을 행하는 짐을 짊어져야겠다는 마음(=보리심)의 차이를 분별해야 한다고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설했다.
2.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중생들 역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기심과 자기 집착으로 남들을 희생시키며 죄책감과 근심, 두려움을 얻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행복을 원하면 행복한 타인들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행복해진다. 따라서 자신과 남의 입장을 바꿔 자신의 행복에서 타인의 행복으로 목표를 전환하는 것을 자타상환법이라고 한다. 자타상환법을 장애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나, 나의 것이 존재한다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무아(無我)와 나와 남이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성(緣起性)을 인지해야 한다.
자타상환법은 단순히 남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는 수행을 의미한다. 쫑카파는《보리도차제광론》에서 "이것(자타상환법)은 남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눈[眼] 등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수행이 아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남을 무관심하게 외면하는 이 두 마음의 태도를 바꿔서 남을 나처럼 귀하게 여기고 나를 남처럼 외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타상환법은 칠종인과법을 포괄하는 더욱 심오하고 광대한 수행이면서 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수행자들에게 적합한 수행이고, 또한 궁극적으로 권장되는 수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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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행37송》의 똥렌 수행에 관한 삽화.[50]

자타상환법과 관련된 티베트 불교 특유의 명상법으로 똥렌(gtong len)이라는 것이 있다. 티베트어로 '똥와(gton ba)'는 '주다', '렌빠(len pa)'은 '받다'란 뜻으로 합쳐서 '주고 받기'란 뜻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눈 앞에 있다고 시각화한 다음 행복, 풍요 같은 나의 공덕의 결과를 날숨에 실어보내고 다른 사람의 모든 문제점, 고통, 번뇌들은 들숨을 통해 대신 흡수하는 명상법이다. 이를 통해 남과 나 사이의 분별을 없애고 보리심을 키운다.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는 자기 자신이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로 타인의 업을 대신 받지는 않으며 보리심의 증장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실제로 행복과 고통을 주고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두 대상이 전생부터 이어온 굉장히 가까운 업연(業緣)이 있을 때만 가능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세를 함양하도록 훈련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똥렌의 목적은 인격, 용기, 열의의 위대한 힘을 얻고 보리심을 함양하는데 있다"고 설명하였다.
Dalai Lama XIV, 《In My Own Words: An Introduction to My Teachings and Philosophy》
제14대 달라이 라마, 《우리는 같습니다》
게셰 텐진 남카, 《똥렌(주고 받기 수행)》

3.2. 행(行)보리심

3.2.1. 보리심계

3.2.2. 육바라밀

3.2.2.1. 보시바라밀
3.2.2.2. 지계바라밀
3.2.2.3. 인욕바라밀
3.2.2.4. 정진바라밀
3.2.2.5. 선정바라밀
3.2.2.6. 지혜바라밀

3.2.3. 사섭법

4. 로종(blo sbyong) 소개

5. 관련 서적

소원을 들어주는 모든 보석보다
더 소중한 모든 존재를 위하여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니
언제나 제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기고
마음 깊이
다른 사람을 윗사람으로 받들게 하소서.

그 무엇을 행하건 내 마음을 잘 살피기를
그리고 나와 남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단호히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매우 부정적이며 고통에 억눌려
성품이 밝지 않은 사람을 보면
마치 귀한 보물을 찾은 듯이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남들이 나를 시기하여
부당하게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해도
좌절은 내 몫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는 그들에게 바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몹시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변함없이 그를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요약하면 이익과 기쁨은
직간접으로 내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께 드리며
내 어머니의 모든 상처와 고통은
은밀히 내가 떠맡게 하소서.

이러한 모든 행이 세속 팔풍(世俗八風)[51]에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영임을 깨달아
애착 없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수심팔훈》(양지애 譯)

로종과 관련된 문헌으로는 《중관보만론(보행왕정론)(Ratnāvalī)》, 《보살지(Bodhisattvabhūmi)》,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Bodhicaryāvatāra)》, 《마음을 다스리는 8가지 게송(수심팔훈, 수심팔송)(blo sbyong tshigs rkang brgyad ma)》, 《수심칠요(blo sbyong don bdun ma)》, 《보살행37송(rgyal sras lag len so bdun ma)》 등이 있다. 이 중 《입보리행론》은 "보리심의 왕(王)과 같은 법맥"이라 일컬어지며 보리심을 수습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핵심적인 논서로 취급된다.

국내에 번역된 관련 서적은 다음과 같다.
(일부 서적은 절판된 점 참고 바람)

#중관보만론/보행왕정론
#친우서
#보리심석론
#보살지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
#수심칠요
#보살행37송
#수심팔훈
#용감한 보살의 보배염주
#로종 쵠차 콜로
[1] 본 탱화의 관세음보살은 팔이 4개인 사비(四臂)관음이다. 4개의 팔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상징하고 흰 색 몸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정수리에는 근본 스승(本師)인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있으며 가운데 양 손에는 여의주,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 왼손에는 백련(白蓮)을 들고 있다.[2] 일체종지(一切種智)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3] 대승의 입문인 보리심 뿐 아니라 소승의 입문인 출리심도 마찬가지로 밤낮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육십송여리론》의 주석처럼 "불타는 집에 갇혀 있던 이들이 그 곳을 벗어나고, 감옥에서 갇혀 있는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하려는 듯"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밤낮 없이 일어날 때 비로소 출리심이 생겼다고 본다.[4] 대승불교 상징 체계에서 자비는 부격(父格), 지혜는 모격(母格)에 해당한다. 자식이 아버지의 종성(種姓)을 따르듯, 반야 지혜는 성문ㆍ연각ㆍ보살 삼승(三乘)의 공통적인 원인이지만 자비의 정도에 따라 각각의 승(乘)이 구분되므로 자비를 아버지, 지혜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이다. 티베트 불교 도상에서 보통 반야불모는 가운데 두 손으로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사진의 불상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고 있다) 나머지 양 손에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저와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5] 오온 대신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ㆍ식(識)의 육계(六界)나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삼문(三門)처럼 '나'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적ㆍ정신적 요소들을 포괄할 수 있는 다른 대상으로도 대체 가능하다.[6] '하나(Tib. gcig, Skt. ekatva)'와 '여럿(Tib. du, Skt. kati)'은 불교논리학 용어이다. 일체법은 '하나'와 '여럿' 둘 중 하나로 구분 가능하며 제3의 분류는 없다. '하나'는 명칭과 의미 면에서 모두 동일함을 의미하고 '여럿'은 명칭과 의미 어느 한 면에서라도 다름을 의미한다. 모든 법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과 하나이고 타(他)와 여럿이다.《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뒤다체계의 논리방식》(게셰 텐진 남카 譯)[7] 불교학자 가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는 발생과 소멸, 같음과 다름, 오고 감 등을 동시에 부정하는 나가르주나의 논법이 형식 논리적으로 배중률에 어긋나지만, 승의가 아닌 세속의 일을 논의할 때는 나가르주나 역시 형식 논리에 부합하는 이론을 사용한다고 보고 나가르주나의 논법을 '형식 논리의 초월'이라고 표현했다.[8] 승의제와 세속제 양자(兩者)는 상호배타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성을 갖는다. 승의제와 세속제는 불교논리학적으로 상호배제모순이다. 승의제와 세속제 둘은 여럿이면서 공통기반이 없기 때문에 모순이고, 식(識)이 승의제와 세속제 둘 중 어느 하나임을 지각하면 다른 한 쪽이 필연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모순 중에서도 상호배제모순에 해당한다(불교논리학에서의 모순에 대한 정의와 서구논리학에서의 모순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모순 대신 '상위相違'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한 연기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무자성을 성립할 수 없고, 무자성이 성립해야 연기가 성립 가능하기 때문에 승의제와 세속제는 상호의존관계이다.[9] 중관학파에서는 승의제인 공성/무자성성을 통해 독립적 실체인 자성이 존재한다는 상변에서 벗어나고, 세속제인 연기를 통해 분별과 명칭에 의해 가설된 현상마저 비존재한다는 단변에서 벗어나 중(中)을 이룬다. 불교에서의 중 혹은 중도(中道)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그 가운데 '견해로서의 중'은 변견(邊見)인 단견과 상견을 여읨을 의미한다.[10] 상(常): 상주성(常住性), 일(一): 무분(無分)의 일(一), 주재(主宰): 독립성[11] 독자부나 정량부 역시 상일주재로 존재하는 인아를 부정하므로 불교학파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충족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12] 인간의 모든 사고, 판단, 인지는 "A이다(A)ㆍA가 아니다(~A)ㆍA이면서 A가 아니다(both A and ~A)ㆍA인 것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neither ~A nor ~(~A))"라는 4가지 유형 중 하나에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13] '직접 모순'은 불교논리학 용어이다. 두 대상 중 어느 한 대상을 배제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 대상이 성립하여 제3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14] 무차/절대부정/비정립적 부정과 달리 비차/상대부정/정립적 부정(Skt.paryudāsapratiṣedha, Tib.ma yin dgag, 非遮)은 부정 대상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간접적으로 부정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을 정립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5] 모든 무분별식이 곧 공성을 수습(修習)하는 식인 것은 아니다. 감각대상을 인식하는 오근식(五根識), 깊은 잠, 기절, 무상정과 멸진정 등은 모두 무분별이지만 공성을 수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심무념(無心無念)'이라며 생각을 없애는 것은 기실 공성을 수습하는 것도 무분별도 아니다. 공성의 부정 대상인 '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를 잠시 인식하지 않는 정도일 뿐이며, 또한 '분별을 없애야 한다'는 상념도 일종의 분별로서 '무심무념'을 위해서는 그러한 분별을 끊임없이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까말라쉴라는 마하연과의 논쟁에서 이러한 '무심무념'의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16] 인도-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무분별지는 견도위(見道位)에서부터 현량(現量)으로 공성을 직접 지각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무분별지를 얻기 이전에 먼저 자량위(資糧位)에서 법(法)의 청문(聽聞)을 통해 공성을 수습하는 문혜(聞慧) 혹은 사찰지(伺察知), 청문한 내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공성을 수습하는 사혜(思慧) 혹은 비량(比量), 공성에 집중하는 지(止) 혹은 수혜(修慧)를 차례로 얻고, 가행위(加行位)에서 공성을 관찰하여 경안(輕安)을 이룬 관(觀) 혹은 수혜(수혜는 지와 관을 모두 포함한다)를 얻는 도(道)의 차제(次第)를 거쳐야 한다. 이처럼 무분별지는 단순히 생각, 분별을 멈춘다고 얻어지는 인식이 아니며 오히려 가행위까지의 공성을 수습하는 분별지를 원인으로 삼아 발생한다.
일체의 인지, 판단, 분별 등을 차단하는 것만으로 공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앞서 언급한 '이변중관설' 혹은 '비유비무'의 견해에서 비롯된 수행 방식이다. 이러한 '무심무념'의 추구는 단변(斷邊)에 치우치기 쉬우며, (무분별지의 원인이 되는) 공성을 수습하는 바른 분별을 저해하고, 사고력ㆍ기억력을 감퇴시키는 등의 폐해를 초래한다고 쫑카빠는 지적한 바 있다.
[17] 제법의 실상을 찾을 때는 반드시 명칭의 토대 가운데 명칭 의미(=법法)를 찾아야 한다. '찾아야 하는 법'과 '찾는 토대'가 본질이 하나이며 서로 '명칭의 토대'와 '명칭 의미'라는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에서 경찰이 도둑을 찾는 것처럼, 군인이 적이 오는 방향을 찾는 것처럼, 혹은 물건 주인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처럼 찾으면 찾아야 할 대상과 찾는 토대가 서로 무관하기 때문에 목적인 찾는 대상을 찾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느 방향에서 존재하는가?' 따위의 방식으로 '나'의 실상을 찾는 것은 찾는 대상인 '나'와 찾는 토대가 서로 무관하기 때문에 '나'의 실상을 찾는 올바른 방식이 될 수 없다.[18] 쫑카빠가 정의한 자립논증 중관학파와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차이에 따르면,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 실제로 성립하는 것과 자성으로 성립하는 것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의미가 다르다. 자립논증 중관학파 역시 실제로 성립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지만, 귀류논증 중관학파와 달리 언설 수준에서 자성이 성립하는 것은 인정한다.[19] 단, 겔룩 내에서도 각자의 견해에 따라 부정대상의 정의에 미묘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모든 겔룩 구성원들이 종조(宗祖)인 제 쫑카빠와 그의 상수제자로서 "마음의 아들(thugs sras)"이라 일컬어지는 겔찹제, 케둡제 부자삼존(rje yab sras gsum, 父子三尊)의 사상과 저서를 중시한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법맥, 학통, 인물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령 데뿡 로셀링 강원 출신의 대표적인 현대 학승 중 한 명인 게셰 빨덴 닥빠는 부정대상을 명명처/명칭 대상 가운데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명명처/명칭 대상의 측면에서 성립하는 것'과 공성의 부정대상인 '자신의 본성으로 성립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게셰 빨덴 닥빠,《현자들께서 기뻐하시는 중관의 난제에 관한 요지를 밝힌 견해》(게셰 소남 걜첸, 인강(김수연) 譯)[20] 참고로 티베트의 불교 교의강요(敎義綱要) 텍스트 중 하나인《둡타》에서는 귀류논증중관학파가 정의하는 이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속제는 "명언(名言)을 관찰사택(觀察思擇)하는 양(量:바른 인식)으로 얻어지는 대상이면서 명언 관찰사택의 양(量)이 그 대상에 의하여 명언 관찰사택하는 양(量)이 되는 것"이고, 승의제는 "궁극(=공성)을 관찰사택하는 량으로 얻어지는 대상이면서 궁극 관찰사택의 량이 그 대상으로 인해 궁극 관찰사택의 량이 되는 것"이다. 세속제의 사례로는 항아리 따위가 있고 승의제의 사례로는 항아리의 공성 따위가 있다.꾄촉 직메 왕뽀,《불교 철학의 보물꾸러미》(박은정 譯)[21] 이후 고람빠의 주장은 겔룩의 학승들에 의해 재반박되며 논쟁은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람빠는 당시 흥기하던 겔룩을 견제할 요량으로 학문적 논쟁 수준을 넘어 쫑카파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고람빠의 저서들은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파괴되거나 강원에서 배제되었고 수 세기 후 제13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비로소 산실(散失)된 저서들의 수집이 허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람빠의 저서들은 중앙 정권의 감독이 소홀한 부탄과 동(東)티베트를 중심으로 면면히 전해져 현재까지도 사꺄빠 교학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 논서로 취급된다.[22]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공성의 부정대상인 인아(人我)의 아(我)와 법아(法我)의 아(我)는 동일한 아이며, 다만 아의 소의(所依)인 토대에 따라 인아와 법아로 구분될 뿐이다. 아가 개아를 토대로 성립하면 인아, 아가 오온을 토대로 성립하면 법아가 된다.[23] 전오식(前五識)인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식과 제6식(第六識)인 의(意)식을 가리킨다. 티베트 불교는 중관학파의 견해를 따르기 때문에 유식학파에서 주장하는 제7식 마나식, 제8식 아뢰야식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금강승에서 말하는 미세의식들 또한 제6식에 포함된다.[24] 영역자인 말콤 스미스(Malcolm Smith)의 설명에 따르면 "실재하지 않는 인식 주체"는 이제(二諦)의 합일을 의미한다.[25] 비말라미뜨라와 빠드마삼바와에 의해 티베트에 전해진 족첸 17 딴뜨라 중 하나이다.[26] 대승불교에서는 윤회를 지속시키는 업과 번뇌 등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되면 오염된 온(蘊) 또한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명료하고 인지하는 본성을 가진 청정한 마음의 연속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러한 연속을 단절시킬 다른 원인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부처의 출생부터 반열반까지의 일생인 12상(相)(동아시아 불교의 8상(相)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는 붓다의 생애를 12개의 항목으로 분류한다)은 중생을 교화하여 수행으로 이끌기 위해 보인 방편에 해당하며, 반열반 이후에도 부처의 청정한 마음의 연속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부처는 번뇌에 오염된 오취온(五取蘊)이 아닌 부처의 지혜와 공덕(功德)으로 구성된 사신(四身)을 통해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제도행을 끊임없이 행하고 있다.[27]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족첸 전승의 주요 스승들인 롱첸 랍잠(klong chen rab 'byams), 직메 링빠('jigs med gling pa), 제5대 달라이 라마 아왕 롭상 갸초(ngag dbang blo bzang rgya mtsho), 그리고 특히 도둡첸 직메 텐뻬 니마(rdo grub chen 'jigs med bstan pa'i nyi ma)를 인용하면서 족첸에서의 릭빠와 무상요가 탄트라인 구햐사마자 탄트라에서의 원심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의미라고 보았다.[28] 객진(客塵, གློ་བུར།). 번뇌는 모든 법의 체성(體性)에 대하여 본래의 존재가 아니고 일시적인 존재이므로 객(客)이라 하고, 미세하고 수가 많으므로 진(塵)이라 함.[29]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自性淸淨心 客塵煩惱染)'이라 하여 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지만 일시적인 객진번뇌에 의해 염오(染汚)되어 부정(不淨)하게 되었다는 불교 교설을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이라 한다. 심성본정설은 초기불교ㆍ부파불교에서부터 논의되었던 주제로, 후대에 등장하는 여래장 교설의 시초로 여겨진다. 상좌부와 대중부는 심성본정설을 따르는 반면, 설일체유부는 심성본정설을 부정하였다.[30] 특히 밀교 경전은 많은 부분이 상징, 비유, 암시 등 모호하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해석에 주의를 요한다. 때문에 반드시 법맥 스승의 직접적 가르침과 주석서 등에 의지해야 하며, 이는 밀교를 수행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함부로 밀교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다.[31] 붓다의 몸의 공덕은 32상(相) 80종호(種好), 말의 공덕은 세간의 모든 중생이 각각 동시에 질문하더라도 전혀 혼동하지 않고 하나의 음성으로써 각각의 중생이 이해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언어로 들리게끔 답할 수 있는 것 등의 60가지 공덕, 마음의 공덕은 여소유지(如所有智)와 진소유지(盡所有智)이다.[32] 중생의 신ㆍ구ㆍ의를 삼문(三門)이라고 표현하는데 반해 부처의 신ㆍ구ㆍ의는 삼신(三身)이라고 표현한다. 문을 통해 왕래하듯 중생은 신구의를 통해 업을 짓고 업의 과보를 받으므로 신구의가 업의 문(門)이 되지만, 부처는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부처의 신구의는 불신(佛身), 즉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으로서의 신(身)으로 표현하는 것이다.[33] 자성법신과 지법신을 비롯한 붓다의 사신(四身)에 대한 정의는 근(根), 도(道), 과(果) 문단을 참고할 것.[34] 엄밀히 말해 불성 개념과 여래장 개념은 차이가 있다. 논서에서는 불성의 두 종류인 자성주불성과 증장불성 가운데 자성주불성을 여래장과 직접적으로 연관짓는다.[35] 《유가사지론》<보살지>에 따르면 보살의 종성에는 본성주종성(本性主種姓)과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이 있다. 본성주종성은 '보살이 가진 6처의 특별한 양태이며 그와 같은 양상으로 연속적으로 내려온 것이고 무시이래로 자연적 성질에 따라 획득된 것'이고, 습소성종성은 '이전에 선근(善根)의 반복연습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종성은 종자(種子, bīja)라고도 불리는데, 종자는 식물학적 메타포로서 미래에 다른 상태로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나타낸다.《보살지》(안성두 譯) 이 중 본성주종성이 후대의 여래장 교설과 연관이 있지만, 《보성론》에서 볼 수 있는 일원적(一元的) 종성론과 달리 《유가사지론》의 본성주종성은 삼승(三乘)의 종성에 차별을 두는 다원적(多元的) 종성론에 해당하며 유식학파가 주장하는 구경삼승(究竟三乘) 혹은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의 근거가 된다.야마베 노부요시(Nobuyoshi Yamabe),《Once Again on “Dhātu-vāda”》[36] 정확히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여래장 정의에 해당한다. 일체법의 무자성을 논하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와 달리,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일체법이 진실로/실제로 성립함을 부정하면서도 언설(言說) 수준에서 성립하는 자성을 인정한다.[37] 중관학파도 유식학파처럼 자성주불성(自性住佛性: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불성)과 증장불성(增長佛性: 수행에 의해 발달되는 불성)을 말하지만 정의가 다르다. 중관학파에서 자성주불성은 '아직 번뇌가 없어지지 않은 마음의 공성(空性)'으로 붓다의 자성법신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증장불성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무루식無漏識)을 위한 종자(種子)'이며 붓다의 지법신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위(有爲)의 현상들을 가리킨다. 증장불성에는 보살지(菩薩地)를 순차적으로 성취하면서 점차 발달되는 자애, 자비, 지혜, 보리심, 믿음 같은 도덕적인 의식 상태 뿐 아니라 중립적인 심식(心識)까지 포함된다.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38] 유식학파에서는 중생에게 무시이래로 끊임없이 내려온, 법성으로 증득한, 무루식의 종자를 자성주불성이라고 하지만 중관학파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무루식의 종자 역시 인(因)과 연(緣)으로 제작될 수 있고 따라서 조작이 가능하므로 자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성이면 곧 본성이고, (본래부터 존재하고 어떠한 조건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본성과 개조(改造)는 서로 모순이 된다.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39] 찬드라키르티가 타성(他性)으로 성립하는 타생(他生)을 부정하는 논증은 데이비드 흄의 인과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40] 학파마다 주로 쓰는 용어에 차이가 있을 뿐 존재, 성립, 대상, 소지(所知), 소량(所量), 법(法)은 모두 동의이다. '양(量:바른 인식)이 지각하는 것'이 성립의 정의이다. '식(識)이 지각하는 것'이 대상의 정의이다. '식의 대상으로 적합한 것'이 소지의 정의이다. '양이 아는 대상'이 소량의 정의이다. '자신의 본질을 지니는 것'이 법의 정의이다.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41] 예시로 든 생득선(生得善)은 유루(有漏)의 선법(善法)에 해당한다.[42] 공성 그 자체는 무위법으로 불변한다. 한편 자성주불성은 중생의 심식(心識)의 특성/본성인 공성이고 자성법신은 부처의 심식의 특성/본성인 공성이므로, 기반이 되는 심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둘은 불교논리학적으로 모순인 서로 다른 두 법(法)이다. 두 법에 대하여 편의상 "자성주불성에서 자성법신으로 변화한다"고 표현했으나, 실제로는 심식이 변화했을 뿐 자성주불성이나 자성법신이 새로 발생하거나 소멸된 적이 없으며 둘은 동질관계(본질이 하나인 관계)나 인과관계도 아니다.[43] 대비심(大悲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①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상(無常)이나 무자성(無自性)임을 깨닫지 않고 일으킨 대비심.
②법연자비(法緣慈悲): 법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자성임을 깨닫지 않고 무상임을 깨달은 지혜로 일으킨 대비심.
③무연자비(無緣慈悲): 무자성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자성임을 깨달은 지혜로 일으킨 대비심.
[44] 심리학에서 병리적 의존 관계를 일컫는 상호 의존(codependency)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심리학에서 다루는 상호 의존은 보살펴 주는 자와 보살핌을 받는 자 사이에 한 쪽 혹은 양 쪽 당사자가 상대방을 심리적ㆍ정서적ㆍ신체적ㆍ영적으로 과도하게 의존하여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불균형한 관계를 의미한다.
한편 불교에서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은 상호의존적 연기(緣起)를 가리키므로 상술한 상호 의존과 의미하는 바가 전연 다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아함경》의 구절처럼, 상호의존적 연기란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여 성립하는 존재들이며 타자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건립되는 존재는 없다는 보편적 진리를 뜻한다.
예를 들어 '원인'과 '결과'는 인과적(因果的) 연기에서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는 순차적ㆍ일방향적 관계지만, 상호의존적 연기에서는 원인에 의지하여 결과가 성립하고, 원인 역시 결과에 의지하여 그러한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성립하는 동시적ㆍ상호의존적 관계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인과적 연기를 주로 다루지만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상호의존적 연기, 의존하여 명칭으로 가설(假設)될 뿐인 연기와 같은 연기의 보다 심오한 의미를 다룬다.
[45] 경전에 나오는 꿈, 환영, 신기루 등의 비유는 공성을 증득한 성자(聖者)가 인식하는 미세한 세속제(kun rdzob phra mo)를 의미한다. 공성만을 인식하는 등지(等至)에서 출정(出定)하여 후득지(後得智)로 대상을 인식할 때 일체법이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고 명언(名言)으로 존재함을 알게 되는데, 이를 일체법이 가유(假有)임을 증득한 성자가 인식하는 미세한 세속제라고 일컫는다. 예를 들어 염주는 세속제이지만, 염주가 마치 환영과 같이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고 명언으로 존재하는 것은 세속제 중에서도 미세한 세속제에 해당한다.[46]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입보살행론》을 날란다 사원의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던 중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구절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7]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48]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 삼륜체공(三輪體空), 삼륜무상(三輪無相)이라 한다.[49] 칠종인과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장 은혜로운 대상이라 여겨지는 어머니를 연상하라고 권고한다. 사회적 통념 뿐 아니라 불교적 관점에서도 부모는 소중한 인간의 몸을 낳아 준 근본으로서, 공경의 대상인 '복전(福田)' 중 하나인 '은전(恩田)'이라 일컬어지는 가장 은혜로운 존재 중 하나다.[50] 삼계육도(三界六道)의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똥렌 호흡을 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51] 행복을 방해하는 일상의 8가지 불행의 씨앗. 1) 물질의 소유로 인한 기쁨. 2) 소유한 물질을 잃어버림으로 인한 실망과 분노. 3) 칭찬과 인정으로 인한 기쁨. 4) 비판과 비난을 받을 때의 분노와 좌절. 5) 좋은 평판과 명예를 갖을 때 느끼는 기쁨. 6) 나쁜 평판과 굴욕을 갖을 때 느끼는 분노와 좌절. 7)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적 쾌락으로 인한 기쁜 감정. 8) 오감으로 느끼는 불쾌한 감정으로 인한 분노와 좌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