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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91801><colcolor=#FFF>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페르디난도 2세 Ferdinando II de' Medici, Granduca di Toscana | |
출생 | 1610년 7월 14일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피티 궁전 | |
사망 | 1670년 5월 23일 (향년 59세)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피티 궁전 | |
재위 |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
1621년 2월 28일 ~ 1670년 5월 23일 | |
배우자 |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1632년 결혼) |
자녀 | 코시모 3세, 프란체스코 마리아 |
아버지 |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막달레나 |
형제 | 마리아 크리스티나, 잔카를로, 마르게리타, 마티아스, 프란체스코, 안나, 레오폴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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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2. 생애
병약한 아버지가 일찍 숨을 거두면서 10살의 나이에 토스카나 대공위에 올랐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섭정을 맡았으며, 18살이 되고서야 친정을 펼쳤다. 정치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고 온화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1630년 이탈리아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다른 토스카나의 귀족들은 도망치기 바빴지만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는 대공령을 지키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감염 방지를 위한 각종 노력과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대공국 인구의 약 10%를 감소시켰고,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가장 뛰어난 업적으로는 과학계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는 점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페르디난도 2세는 스스로 과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니콜라스 스테노 등의 과학자들을 후원했다. 현대 기생충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체스코 레디의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갈릴레이를 끝까지 지지하고 후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파문을 당하고 종교 재판에 참석하자 직접 재판을 참관했다. 후에 갈릴레이가 종신형을 받았다가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을 때, 그를 피렌체로 데려가 연금을 주면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643년에 교황령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카스트로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군대에 패배하면서 나라의 재정이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전염병과 전쟁으로 페르디난도 2세 집권 말기의 토스카나 대공국은 혼란스러웠다. 인구는 감소했고, 경제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49년의 긴 집권 끝에 1670년 5월 23일,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3. 가족관계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는 온건한 성격과 인품으로 인망이 좋았다. 그러나 가정은 제대로 돌보지 못해 가족사가 상당히 막장이다. 본인이 여자보다 남자를 더 선호했으며, 상극인 아내를 만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1632년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우발도 델라 로베레의 딸이자 사촌동생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와 결혼했다.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는 활발한 성격에 과학에 관심이 많은 반면 비토리아는 엄격하고 종교적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관심사와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도 했지만,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의 동성애 성향이 문제가 되었다. 페르디난도 2세는 잘생긴 남자 시종이랑 시시덕거리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지만 첫 아이와 두번째 아이 모두 태어난지 며칠 안 되어 사망했다. 결혼하고 9년이 지나서야 후계자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태어났다. 부부는 자식의 교육 문제로 충돌했다. 결국 코시모 3세는 어머니 비토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랐는데, 예술과 과학을 중시하는 토스카나 대공가와 맞지 않게 종교에만 몰두하는 인물로 자랐다.
코시모 3세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는 프랑스 왕가와 통혼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 왕실의 승인으로 루이 13세의 조카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루이즈[1]를 며느리로 들였다. 그런데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대놓고 자신이 훨씬 열등한 집안에 시집갔다고 신세한탄을 했다. 그녀는 향수병에 시달리면서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난동을 부렸다. 페르디난도 2세는 며느리에게 계속 그 모양으로 굴면 수녀원으로 보내겠다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먹히지 않았다. 훨씬 기가 쎈 아내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는 오만한 며느리와 허구한 날 싸웠고, 대공저인 피티 궁전은 악마의 거처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