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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917년 8월 이후 |
재위 | 세르비아 크냐지 |
892년 ~ 917년 | |
아버지 | 고이니크 |
아들 | 흐발리미르 |
가문 | 블라스티미로비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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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세르비아 공국 7대 크냐지(Knyaz).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에게 폐위되었다.2. 행적
세르비아 공국 5대 공동 크냐지였던 고이니크의 아들이다. 고이니크가 형제 스트로지미르와 함께 큰형 무티미르에게 축출된 뒤 불가리아로 보내졌을 때, 그는 인질로서 붙들렸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달마티아로 피신한 뒤 크로아티아 반(Ban) 브라니미르의 보호를 받았다. 891년 무티미르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프리비슬라프가 제6대 크냐지가 되었다. 892년, 페타르는 크로아티아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국으로 돌아왔고, 프리비슬라프를 크로아티아로 몰아낸 뒤 크냐지가 되었다.그는 크로아티아인들이 자기를 복위하는 걸 도운 것에 별다른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894년, 프리비슬라프의 동생인 브란이 왕위를 되찾으려고 크로아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쳐들어왔지만 패배하고 체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896년, 스트로지미르의 아들인 클로니미르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세르비아를 침공해 세르비아 요새 중 하나인 도스티니카를 점령했다. 이에 페타르는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 클로니미르를 전투 도중 처단한 뒤 도스티니카를 탈환했다.
그 후 발칸반도의 강대국인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와 동시에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며, 세력을 확장해 자후믈레, 파가니아, 트라부니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자후믈레 주판 미하일로 비셰비치는 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드리아 해의 어느 섬으로 피신했다. 그러던 10세기 초,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동로마 제국 소속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 랍도초스 페타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고, 그는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그에게 이를 갈고 있던 미하일로는 이 사실을 불가리아 통치자 시메온 1세에게 알렸다.
917년 8월 20일 앙키알로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시메온 1세는 세르비아로 눈길을 돌렸다. 테오도르 시그리차와 마르마이스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은 시메온 1세의 지시에 따라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불가리아인들은 페타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페타르는 이에 응해 협상하려고 찾아왔다가 체포된 뒤 불가리아로 끌려갔다. 이후 브란의 아들인 파블레가 차기 크냐지가 되었다. 페타르는 감옥에 갇혔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