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16 22:39:51

퐁디셰리 공방전



파일:744px-Pondicherry_siege_1778.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8년 8월 21일 ~ 10월 19일 인도의 퐁디셰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2. 배경

1778년 3월, 프랑스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미국 독립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참에 인도에 남아있는 프랑스인들의 거점인 퐁디셰리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퐁디셰리 총독 기욤 드 벨콩브는 영국군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퐁디셰리의 방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대포들을 해안 가까이 이동시켜 영국 해군에 대비했고, 프랑스 수비대를 퐁디세리에 집결시켜 다가올 영국 육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또한 영국군이 퐁디셰리를 포위했을 때 영국군이 교두보로 삼을 만한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했고, 프랑수아 장 바티스트 올리비에 드 트롱졸리 제독이 이끄는 함선 3척을 배치시켰다. 이후 8월 10일 영국 해군이 공세를 개시하면서 퐁디셰리 공방전이 발발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육군 사령관 헥터 문로 중령, 해군 사령관 에드워드 버논 제독
  • 병력: 영국 정규군 1,500명, 세포이 9,000명, 함선 6척.

3.2. 프랑스군

  • 지휘관: 기욤 드 벨콩브
  • 병력: 프랑스 정규군 700명, 세포이 400~600명, 함선 3척.

4. 전투 경과

1778년 8월 10일, 에드워드 버논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선 5척이 퐁디셰리로 접근했다. 이에 프랑스 해군은 퐁디셰리 해안가에서 육군 포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분전했고, 버논은 2시간 동안 교전한 뒤 철수했다. 그러던 8월 14일, 프랑스 해군은 2척의 영국 수송선을 발견했다. 이에 프랑스 해군은 추격에 나섰으나 그만 영국 해군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프랑스 함대는 상당한 선원과 해병을 잃고 퐁디셰리로 퇴각했고, 사틴 호는 영국 해군에게 붙잡혔다. 이후 트롱졸리 제독은 더이상의 해전을 포기하고 일드 프랑스로 귀환했다.

한편, 8월 21일에 헥터 문로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퐁디셰리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포위전에 그다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벨콩브는 그 틈을 타 방벽을 좀더 높이 쌓으며 적의 공세에 대비했다. 9월 1일 밤, 영국군은 기술자들이 포위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3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또한 도시 북서쪽 보루와 남쪽 보루를 공격하기 위해 포대를 설치하고 9월 3일에 새번째 포대를 남서쪽에 설치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맞서 수백 명의 병사들을 영국군의 남쪽 포대로 파견해 위장 공세를 가하다가 후퇴하게 했다. 이에 영국군 3천 명이 후퇴하는 적을 섣불리 추격했다가 프랑스군 포대의 집중 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영국군은 9월 내내 포위 작전을 진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적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영국군 포병대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점진적으로 성벽 가까이 이동했고, 9월 19일엔 영국 포병대가 쏜 포탄이 플아스 포병 사령관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0월 6일엔 영국군 참호가 적의 내부 도랑까지 이르렀고 프랑스군의 포대는 적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은 야습을 몇차례 감행해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지만, 적군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퐁디셰리를 끈질기게 공격하면서 10월 14일 무렵엔 북서쪽 보루와 남쪽 보루가 폐허로 변했다. 결국 벨콩브는 10월 15일 전쟁위원회를 소집해 영국군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10월 18일 항복했다. 이로서 퐁디셰리 공방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정규병 1,500명 중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세포이 9,000명 중 8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800명의 정규병 중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세포이 400~600명 중 1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무기와 깃발을 소지한 채 퐁디셰리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로써 프랑스인들을 인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영국은 여세를 몰아 1779년 말라바르 해안의 마헤 항을 점령했다. 그러자 마이소르 왕국의 티푸 술탄이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는 마헤 항을 멋대로 점령한 것에 분노해 1780년 7월 카르나틱 일대를 침공하면서 마이소르 전쟁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