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yale Paşa.
1515? ~ 1578
1. 개요
1554년부터 1567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해군 총사령관[1]을 역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며, 부재상에까지 올랐다. 하이르 앗 딘을 비롯해 오스만의 다른 쟁쟁한 해군 지휘관들에게 밀려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16세기의 지중해를 오스만 제국의 앞마당으로 만드는 데 크게 한 몫을 한 인물이다. 특히 16세기 중엽 이후로 활동한 다른 대표적인 해군 지휘관들과 달리 바르바리 해적이 아니라 오스만의 중앙 관료 출신이라는 점이 이색적이다.기독교권에서는 피알리 파샤(Piali Pasha)나 피알레 파샤(Piale Pasha)라고도 불렀다[2].
2. 초기 생애
정확한 출생 년도와 출생지는 불분명하다. 헝가리인이거나 크로아티아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 참가했다가 오스만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고 전해진다. 이후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지만 관료 수업을 받고 관료가 되었으며, 황궁의 문지기들을 지휘하는 자리를 거쳐 겔리볼루의 총독으로 부임했다.3. 해군 총사령관 시절
피얄레 파샤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40세 전후의 나이인 1554년에 해군 총사령관직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하이르 앗 딘을 비롯한 바르바리 해적들을 신하로 삼아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역사가 있지만, 오스만 제국은 해적들을 신하로 삼기 전까지 육군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해군은 비교적 등한시했다. 초창기의 오스만 해군은 독립적인 군대라기보다 육군을 실어나르는 수송선단 정도에 불과했으며[3], 따라서 이 해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직도 중하급 관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걸쳐 해적들을 신하로 삼기 시작하면서 해군의 규모도 늘어나고 중요성도 점차 커지게 되었는데, 특히 하이르 앗 딘이 1533년부터 1546년까지 13년 동안 해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해군 총사령관의 지위가 수직상승해 주요 대신 급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1546년에 하이르 앗 딘이 은퇴한 이후, 오스만 조정은 해적을 해군 총사령관에 앉히는 대신 중앙 조정의 관료를 앉혀 해적들을 적당히 통제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에 따라 조정의 관료가 총사령관을 맡되, 해군을 지휘한 경험이 전혀 없는 자가 해전을 말아먹으면 안 될 일이었으므로 세력 면에서 하이르 앗 딘의 후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해적 투르구트 레이스가 부사령관으로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피얄레는 1546년부터 1550년까지 총사령관을 지낸 소콜루 메메드 파샤, 1550년부터 1554년까지 지낸 시난 파샤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는데, 앞선 둘이 해군 총사령관으로는 영 부적절한 모습을 보였으므로[4] 피얄레 파샤가 총사령관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다행히도, 오스만 해군은 피얄레 파샤에 이르러 다시 총사령관다운 총사령관을 만나게 된다. 피얄레 파샤는 투르구트 레이스의 보좌를 받으며 엘바 섬과 코르시카 섬을 습격했으며, 이듬해인 1555년에는 당시 오스만의 동맹이었던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 함대와 연합하여 스페인 함대에 맞서 작전을 벌였다.
1558년에는 역시 투르구트의 보좌를 받으며 이탈리아와 스페인 해안지대 각지를 약탈했으며, 이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교황 파울루스 4세에게 오스만에 맞서 연합 함대를 결성할 것을 호소하여 2년 뒤인 1560년에 스페인, 베네치아공화국, 제노바공화국, 교황령 등등의 연합이 결성되었다. 제노바 출신의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5]가 지휘하는 연합 함대는 1560년 3월에 제르바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황제 쉴레이만 1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피얄레 파샤와 투르구트 레이스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했으며, 오스만 함대는 1560년 5월에 연합 함대를 격파했는데 이것이 1538년의 프레베자 해전, 1571년의 레판토 해전과 함께 16세기 지중해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 가운데 하나인 제르바 해전이다[6]. 이후 피얄레가 지휘하는 오스만 함대는 제르바 섬을 탈환하기에 이르고, 5천 명의 포로를 잡아 코스탄티니예로 개선했다.
피얄레는 1562년에 쉴레이만 1세의 손녀딸이자 쉴레이만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는 셀림 2세의 딸인 게브헤르 한과 결혼하여 황실의 인척이 되었으며, 1563년에는 나폴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오래 차지하지는 못하고 물러났다.
1565년, 쉴레이만 1세는 성 요한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는 몰타 섬을 정복하기 위한 군을 보냈다. 피얄레 파샤는 이 때 원정 해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했지만 섬을 함락하지는 못했으며, 부관으로 참전한 투르구트 레이스가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이듬해인 1566년에 피얄레 파샤는 키오스 섬을 정복하여 에게 해에 남아 있던 제노바공화국의 마지막 영토를 빼앗았으며, 이탈리아 해안지대 각지를 약탈했다. 1568년에는 해군 총사령관에서 부재상으로 승진했는데, 이로써 해군 경력을 가진 자로서 부재상까지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4. 키프로스 공략
1570년, 쉴레이만 1세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는 키프로스 공략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피얄레 파샤의 뒤를 이어 해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원정 해군을 총지휘하고, 부재상인 피얄레 파샤가 부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군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참전하는 인물이 해적이 아니라 오스만의 고위 중앙 관료라는 것인데, 이것은 해군 총사령관에 이어 그 보좌역까지 해적에게 맡기지 않고 오스만 조정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7].그러나 해군을 지휘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키프로스 공략이라는 중임을 맡게 된 것에 대한 부담감이었는지,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는 키프로스 공격을 피얄레 파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함대 일부를 이끌고 올지 안 올지 모를 적의 지원 함대가 혹시 올 경우 그것을 요격하는 일을 맡았다. 키프로스 섬은 1571년 8월에 최종적으로 함락되었으나 두 달 뒤인 10월에 레판토 해전이 벌어지게 되어, 알리 파샤가 전사한 것은 물론 오스만 함대도 강력한 타격을 입었다.
레판토에서의 대패를 전해들은 피얄레 파샤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키프로스 공략을 처음부터 반대했던 재상 소콜루 메메드 파샤를 강하게 비난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태에 대해 누군가 책임은 져야 하고, 차마 공략을 지시한 황제를 비난할 수는 없으니 재상을 대신 비난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메메드 파샤는 레판토에서 패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함대를 빠르게 재건해야 했으며 베네치아 대사와의 대화에서도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8].
5. 말년과 죽음
레판토에서 대패한 것은 오스만 제국에게 뜻밖의 타격이었다. 전사한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의 뒤를 이어 바르바리 해적인 울루츠 알리가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며, 부재상에 올라 중앙 정계에서 활동해야 할 피얄레 파샤는 부재상직은 유지하면서도 해군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고 지휘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울루츠 알리와 피얄레 파샤의 지휘 하에 오스만 해군의 함선은 1년여 만에 해전 이전의 규모로 복구되었고, 1573년에 피얄레는 해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의 아풀리아 해안을 약탈했다.피얄레 파샤는 157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신은 미마르 시난이 그의 의뢰를 받아 코스탄티니예에 건설해 두었던 피얄레 파샤 모스크에 묻혔다.
6. 기타
지명도는 비교적 떨어지지만, 해전 지휘에 확실히 소질이 있었던 듯 하다. 먼저 몇 년 만에 경질된 전임자들과 달리 10년 이상 해군 총사령관직을 유지했는데, 관직의 임명과 파직은 물론 관료의 생사여탈권까지 황제가 쥐고 있던 상황에서 총사령관을 오래 지냈다는 것 자체가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해군 총사령관직을 마친 다음에 부재상으로 승진한 것 또한 이를 보여주며, 재상을 비난하고서도 파직은커녕 관직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함대 재건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해전 전문가로서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 준다.다만 오스만 제국에게나 피얄레 파샤 자신에게나 불행이었던 것은, 피얄레가 십 년 동안 투르구트 레이스에게서 해전을 배웠던 것과 달리 피얄레는 누군가에게 해전에 대한 지식과 교훈을 전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는 단독 행동을 하다가 레판토에서 전사해 버렸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사태에 직면한 오스만 조정은 해적 출신인 울루츠 알리를 해군 총사령관으로 삼았으며 그 임기도 1571년부터 1587년까지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이 이후로는 다시 중앙 관료들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지만 해군에 대한 오스만 조정의 관심이 크게 줄어든 다음이었기에, 이전과는 달리 해적을 부사령관으로 삼고 출진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고위 관료들이 적당적당히 돌아가며 앉는 자리에 불과하게 된다.
현대 터키에서는 피얄레 파샤라는 이름을 붙인 함선 두 척을 운용한 적이 있는데, 1959년에 영국으로부터 HMS Meteor를 사들여 이름을 고치고 1979년까지 활용하다가 폐기했으며 1980년에는 미국산 USS Fiske를 사들여 피얄레의 이름을 붙인 뒤 1999년에 폐기할 때까지 활용했다.
[1] 1567년 이전까지는 데르야 베이(Derya Bey)나 레이스 카푸단(Re'is Kapudan) 등으로 불렀으며, 이 이후에 카푸단 파샤(Kapudan Pasha)나 카푸다느 데르야(Kapudan-ı Derya) 등으로 격이 높아졌다.[2]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피얄레" 라는 발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피얄레만 그런 것도 아니고 하이르 앗 딘은 "하라딘" 이라 불렸으며,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살라 앗 딘도 살라딘이라 불렸다.[3] 이런 까닭에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도 30여 척의 오스만 함대가 고작 4척의 수비측 함대에게 탈탈 털린 적도 있었다. 심지어 당시의 황제 메메드 2세가 멀찍이서 몸소 관전하고 있었는데도.[4] 소콜루 메메드 파샤는 코스탄티니예의 조선소를 크게 증축하는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함대를 이끌고 출진을 한 적이 없었고, 시난 파샤는 출진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육전 지휘에는 능해도 해전에는 영 소질이 없었으며 투르구트와 갈등까지 빚었다. 이 때문에 황제 쉴레이만이 "그냥 투르구트가 하라는 대로 하라" 라는 황명을 따로 내려보내기까지 해야 했으나, 쉴레이만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데다 쉴레이만의 사위였던 뤼스템 파샤와 형제간이었기에 따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5] 십여 년 뒤에 벌어지는 레판토 해전에도 참가하는 인물이다.[6] 실제로 16세기 지중해에서 수십 척끼리 맞부딪친 것은 이 세 번이 전부이며, 나머지는 몇 척 끼리의 소규모 충돌뿐이다.[7] 심지어 투르구트가 전사한 이후 바르바리 해적 두목 가운데 해군 총사령관에 오를 만한 적임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투르구트가 하이르 앗 딘의 사실상의 후계자이듯이, 투르구트의 후계자라고 할 만한 울루츠 알리 레이스가 있었기 때문이다.[8] 이 때 메메드 파샤가 베네치아 대사에게 남긴,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 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 말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