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피에르 코르브 (Pierre Korb) |
출생 | 1908년 4월 20일 |
사망 | 1980년[1] 2월 22일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뮐루즈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9cm |
등번호 | -[2] |
소속팀 | FC 뮐루즈 (1927-1937) FC 소쇼몽벨리아르 (1937-1939) FC 뮐하우젠 93 (1939-1941) |
국가대표 | 12경기 / 2골 (1930-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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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2. 생애[3]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코르브는 1928년 4월 1일에 열린 쿠프 드 프랑스 4강전에서 FC 뮐루즈 유니폼을 입고 처음 피치에 섰다. 하지만 뮐루즈는 CA 파리에 1대5로 박살이 났다. 뮐루즈는 알자스에서는 5회 연속 지역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강팀으로 군림했지만 이후 출범한 프랑스 디비지옹 1에서는 강팀으로 분류되진 못했다. 뮐루즈는 1932년 디비지옹 1 출범 당시엔 디비지옹 1에서 시작했지만 이듬해에 바로 강등당했고 다음 해에 다시 디비지옹 1에 승격했다.복귀 첫 해의 뮐루즈는 디비지옹 1 6위로 성공적인 결과를 냈다. 하지만 1936-37 시즌에 뮐루즈는 RC 스트라스부르에 1대9로 초전박살이 나는 등 졸전을 거듭하다 꼴찌로 떨어지며 디비지옹 2로 다시 강등당했고 코르브는 뮐루즈를 떠났다.
코르브의 새로운 팀은 FC 소쇼몽벨리아르였는데 당시 소쇼는 프랑스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 에티엔 마틀레르, 스위스 출신의 앙드레 아베글렁, 역시 프랑스 대표팀 공격수인 로제 쿠르투아 등을 앞세워 디비지옹 1의 강팀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코르브의 가세는 소쇼의 전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소쇼는 1937-38 시즌에 디비지옹 1과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역시 나치 독일에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의 광풍에 휘말리게 되었고 코르브는 뮐루즈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 알자스-로렌 지방은 다시 독일로 넘어갔고 FC 뮐루즈는 독일식 이름은 FC 뮐하우젠(FC Müllhausen 1893)으로 이름이 바뀐 채 가우리가 알자스에 소속되었다. 1941년의 가우리가 알자스에서 뮐하우젠은 우승을 차지했지만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서 뮐하우젠은 1무 5패의 성적으로 우승 도전에 실패했다. 코르브는 1941년에 축구화를 벗었다.
2.1.2. 국가대표
1930년 2월 23일, 코르브는 프랑스 국가대표로 처음 출전했다.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는데 프랑스는 0대2로 포르투갈에 패했다.코르브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1934년 3월 25일의 체코슬로바키아전이었고 프랑스는 1대2로 패했다. 코르브는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는 1라운드에서 오스트리아에 2대3으로 역전패했다.
코르브는 4년간 프랑스 대표팀에서 12경기 출전, 2득점의 기록을 남겼다.
3. 수상
3.1. 클럽
- 디비지옹 1 우승 1회: 1937-38(FC 소쇼몽벨리아르)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회: 1937-38(FC 소쇼몽벨리아르)
- 가우리가 알자스 우승 1회: 1940-41(FC 뮐하우젠 93)
- 알자스 지역 리그 우승 5회: 1928, 1929, 1930, 1931,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