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21:11:52

하은호(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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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진주 하씨[1]
출생 1898년 5월 3일
경상남도 영산군 읍내면 동리
(現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2]
사망 1960년 6월 22일 (향년 62세)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하은호는 1898년 5월 3일 경상남도 영산군 읍내면(현 창녕군 영산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장마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1919년 3월 13일, 그는 창녕군 영산면에서 구중회를 비롯한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 것을 계획하고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에 1보의 후퇴도 하지 않는다'는 맹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부하고 시위군중 700여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북을 치며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였으며,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부분적으로 취소되었으나 형은 그대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0년 6월 22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호군공파 30세손.()[2]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영산면 동리가 출생지고 영산면 서리는 그의 본적이다. 영산면 서리는 진주 하씨 집성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