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하치량(河致亮) |
생몰 | 1922년 5월 18일 ~ 1950년 9월 29일 |
출생지 |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죽천리 |
사망지 | 경상남도 사천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하치량은 1922년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죽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남 하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시립 계천실업학교(大阪市立 堺川實業學校)를 거쳐 북야 제2중학교(北野第2中學校)에 재학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멸시와 차별을 경험하면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던 1942년 5월, 그는 십삼교(十三橋) 근처 제방에서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동교생 정승한(鄭承漢), 안갑시(安甲時), 박희열(朴喜烈), 김병기(金炳基) 등 5명과 함께 항일결사인 백두회(白頭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북야 제2중학교 3, 4학년 한인 학생 전원을 회원으로 하고,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협력을 도모하며 한국문화를 개발시켜 독립에 기여하려 했다.이후 하치량 등은 한인 학생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조직을 강화시키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문화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1943년 3월 북야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지만, 그가 조직한 백두회는 지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44년 초 백두회의 전모가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하치량은 1944년 2월 고향에서 경북 청도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44년 7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임시취체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하치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