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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맞춤법통일안



1. 개요2.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2.1. 제정 배경과 필요성2.2. 이론적 기초2.3. 제정 과정2.4. 주요 내용과 특징2.5. 보급과 사회적 반향2.6. 의의와 영향
3. 제1차 개정(1937년)
3.1. 개정 배경3.2. 개정 과정과 내용3.3. 명칭과 의의
4. 제2차 개정(1940년)
4.1. 개정 배경과 목적4.2. 개정 과정4.3. 주요 개정 내용4.4. 의의와 영향
5. 제3차 개정(1946년)
5.1. 개정 배경5.2. 개정 과정과 내용5.3. 의의와 영향5.4. 역사적 위치: 북한과의 분기점
6. 한글판 간행(1948년)7. 제4차 개정(1958년 용어 수정판)
7.1. 주요 개정 내용: 용어의 우리말화7.2. 결과와 의의: 최종판으로서의 '용어 수정판'

1. 개요

한글맞춤법통일안[朝鮮語綴字法統一案]은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서 제정·공표한 최초의 통일된 한글 표기법 규정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통일된 규정 없이 극심한 혼란을 겪던 한국어 표기 현실을 극복하고, 주시경 이래의 한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서법 체계를 확립하고자 제정되었다.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이라는 형태주의 원칙을 근간으로 삼았으며, 모든 자음을 받침으로 사용하는 종성부용초성의 실현, 단어 단위 띄어쓰기의 전면적 도입, 문장부호 규정 마련 등 현대 한글맞춤법의 핵심적인 골격을 마련하였다. 이는 단순한 표기법 통일을 넘어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민족적 노력의 산물이자, 이후 한국어 연구, 교육, 출판 등 언어생활 전반의 표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역사적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제정 이후에도 실제 언어생활과 학술적 논의를 반영하여 1937년(표준어 연동 및 가로쓰기 도입), 1940년(사이시옷 규정 변경 및 문장부호 확장), 1946년(사이시옷 재수정 및 띄어쓰기 보완), 1948년(한글 전용판 간행), 1958년(문법 용어 순화) 등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치며 규범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여나갔다. 이 통일안과 그 개정 과정은 광복 이후 남북한 언어 규범 분화의 기준점이 되었으며, 오랜 기간 한국어 표기의 표준으로 기능하다가 현행 '한글맞춤법'(1988년 최종 개정)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2.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은 1933년 10월 29일(한글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현 한글학회)가 제정·발표한 한글맞춤법 규정이다. 이는 근대적인 한국어 적기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통일된 규정으로서, 현대 한글맞춤법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1. 제정 배경과 필요성

1910년대 이후 주시경(周時經) 등의 선각자들이 한글맞춤법 연구의 기초를 닦았으나, 일제강점기하에서 통일된 규정이 없어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한 '제3차 언문철자법'은 '모든 닿소리(자음)를 받침으로 쓴다'는 혁신적 내용을 일부 포함했지만, 조선어연구회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을 뿐 한민족 전체의 의견을 수렴한 규정으로 보기 어려웠고, 표기 통일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 인해 출판물이나 교육 현장에서 각기 다른 맞춤법이 사용되어 의사소통의 불편과 혼란이 가중되었다. 특히 학교 교사들의 고충이 컸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통일된 맞춤법 제정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1년 확대 개편된 조선어연구회(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칭)는 한글 연구와 보급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 편찬을 결의했다.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으로서 통일된 맞춤법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조선어연구회는 1930년 12월, '조선어 철자 통일 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맞춤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2.2. 이론적 기초

조선어학회는 기관지 '한글'을 중심으로 맞춤법 제정에 관한 활발한 학술적 논의를 전개했다. '한글' 제3호(1932.07) '철자 특집' 등에는 신명균, 김선기, 최현배, 이윤재, 김윤경, 이탁, 이갑 등 주요 위원들의 이론이 집약되어 있다. 이들의 논의를 통해 정립된 주요 이론적 기초는 다음과 같다.

합리화 원칙
신명균은 맞춤법 합리화를 "글자 운용 노력은 최소화하고, 의미 전달 능률은 최대화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는 최소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얻으려는 과학적 원칙에 기반한 것으로, 위원회 전체의 공통된 목표였다.

표의주의(表意主義) 원칙(형태주의)
순수한 표음주의(소리 나는 대로 적기)만으로는 의미 전달에 한계가 있다고 보아, 단어의 원래 형태(형태소)를 밝혀 적는 표의적(表意的)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김선기는 "말의 소리만 충실히 재현하는 것은 발음기호일 뿐 문자로서 부족하며, 문자는 뜻과 소리를 함께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갑은 표의화가 독서 능률 향상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어근(줄기)과 접사(끝)를 구분하고, 같은 형태소는 환경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더라도 일관된 형태로 고정하여 적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예: '꽃'은 [꼳또], [꼰만], [꼬치] 등으로 발음되지만 항상 '꽃'으로 적음).

단순한 형태소 고정(표의화)을 넘어 지나치게 어원을 파고들어 표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어원 표시)은 지양했다. 예를 들어 '올개미'를 어원을 살려 '옭앰이'로 적을 필요 없이 '올개미'로 고정하면 충분히 표의화된다고 보았다. 의미가 완전히 변한 합성어(예: 코뚜레←코+뚫-+-에)나 전성어(예: 잠←자-+-ㅁ)는 소리대로 적는 것을 허용했다(이갑의 '단어 관념의 단일화').

이 표의주의 원칙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총론 제1항 "한글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의 후단 규정으로 구체화했다.

현대 발음 존중 및 언문일치
옛 음운을 되살려 쓰자는 일부 주장(이탁, 이갑 등의 ㅿ 부활론)은 "말의 발음은 현대화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채택되지 않았다. 신명균은 "현대어를 현대 소리로 적지 않으면 소리와 글자의 불일치로 문란이 발생한다"고 지적했고, 김선기는 이를 '언문일치'로 요약했다. 이에 따라 역사적 표기라도 현대 발음과 크게 달라진 경우(예: 옵바→오빠, 엇개→어깨) 과감히 현대 발음대로 적도록 했다(이갑의 주장 반영).

띄어쓰기 도입
신명균과 김선기는 단어(낱말)를 단위로 띄어쓰는 것이 문장의 의미 파악과 가독성 향상에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이는 초기 성경 번역 외에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던 것으로, 통일안에서 중요한 규정으로 채택되었다.

2.3. 제정 과정

조선어학회의 맞춤법 제정 과정은 약 3년에 걸쳐 매우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초안 작성(1930. 12.~1932. 12.)
12명의 '조선어 철자 통일 위원회'에서 69차례, 총 211시간의 회의를 거쳐 91개 항목의 초안을 마련했다.

제1독회(1932. 12. 27.~1933. 1. 4.)
개성 고려 청년 회관에서 10일간 위원 15명이 참석하여 초안을 축조 심의했다(17회, 59시간). 개성 유지들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다.

수정 위원회 심의(1933. 1.~1933. 6.)
제1독회 결과를 바탕으로 수정 위원회에서 소위원회를 통해 내용을 검토·정리하여 70개 항목의 수정안을 만들었다(18회, 67시간).

제2독회(1933. 7. 26.~1933. 8. 3.)
화계사 태화원에서 9일간 위원 15명이 참석하여 수정안을 재심의했다. 때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14회, 54시간).

정리 위원회 최종 검토(1933. 8.~1933. 10.)
제2독회 결과를 바탕으로 체계를 잡고 최종 조정을 거쳐 '65개 항목, 부록 9개 항'으로 정리했다(13회, 37시간 40분).

최종 확정 및 발표(1933. 10. 19./10. 29.)
임시총회에서 최종안을 보고하고 일부 수정을 거쳐 만장일치로 채택한 뒤,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역사적인 발표식을 가졌다.

전체 과정에 연인원 1,500여 명, 총 136회 회의, 442시간 이상이 소요된 대규모 사업이었다.

2.4. 주요 내용과 특징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세종 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과 주시경의 연구를 계승하여 현대 한국어에 맞는 합리적인 표기 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표의주의(형태주의) 원칙 확립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명시하여 단어의 기본 형태를 밝혀 적도록 했다. 이는 한글맞춤법의 핵심 원리가 되었다.

자모 및 표기 원칙 명확화
현대 한국어에서 사용하는 자모 24개를 확정하고, 모음조화, 음운 변화 등에 따른 표기 규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의 완전한 실현
이론상으로만 존재했던 '모든 자음을 받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을 실제 표기법으로 구현했다.(예: '꽃', '밖', '삶').

띄어쓰기 규정 도입
단어 단위 띄어쓰기를 원칙으로 명시하여 문장 구조 파악을 용이하게 했다.(실제 적용은 '어절' 단위)

문장부호 규정 포함
당시 혼란스럽게 사용되던 문장부호에 대한 기본적인 규정을 부록으로 제시했다.

2.5. 보급과 사회적 반향

조선어학회에서는 통일안 발표 후 강연회, 방송, 신문 연재, 기관지 '한글' 특집 발행 등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보급에 힘썼다.

교육계, 언론계, 종교계, 문예계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통일안 제정을 환영하고 지지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사는 사설을 통해 지지를 표명하고 통일안 전문을 부록으로 배포했다. 대부분의 잡지와 출판사들도 통일안을 채택했으며, 1934년에는 주요 문예가 78명이 통일안 지지 및 반대파 배격 성명을 발표하여 큰 힘을 실어주었다.

박승빈(朴勝斌)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연구회'는 통일안이 복잡하고 전통을 무시하며 주시경의 학설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표기법(경음 부호 된ㅅ 사용, ㅎ 받침 부인, 표음주의적 활용 표기 등)을 주장했다. 이들은 기관지 '정음(正音)'을 발행하고, '조선문 기사 정리 기성회'를 조직하여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조직적으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어학회는 공개 토론회와 지면을 통해 반대파 주장의 비합리성을 논증하며 통일안의 우수성을 설득했다. 반대파의 주장은 실제 언어 현실과 동떨어지고 비과학적이라는 비판 속에 점차 설득력을 잃었으며, 사회 전반의 지지를 얻은 통일안이 결국 표준 표기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6. 의의와 영향

'한글맞춤법통일안'은 단순한 표기법 규정을 넘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민족적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는 이후 한국어 연구와 교육, 출판 등 언어생활 전반의 표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한글맞춤법'(1988년 최종 개정)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통일안의 제정은 한국어 표기법 역사에서 혼란기를 마감하고 현대적인 정서법 시대를 여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3. 제1차 개정(1937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1차 개정은 1933년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첫 번째 공식 개정판으로, 1937년 5월 10일에 간행되었다. 이 개정은 주로 1936년에 간행된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과의 정합성을 높이고, 규정의 명료성과 실용성을 개선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3.1. 개정 배경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이후,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단어의 표준 형태를 심의하고 결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었고, 그 결과물이 1936년 10월 28일(한글날)에 발표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었다.

기존 1933년 통일안의 "부록 1. 표준말"에는 사동/피동 형태(제7항)와 흔히 다르게 쓰이는 단어 약 160개에 대한 잠정적인 표준(제8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이 내용을 더욱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게 되면서, 통일안의 해당 부록 내용을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3.2. 개정 과정과 내용

이에 조선어학회는 1936년 11월 28일 임시총회를 열어 김윤경, 이극로, 이만규, 이희승, 이윤재, 정인승, 최현배 7명을 수정 위원으로 선임하고 개정 작업을 위임했다. 수정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주요 변경 사항을 포함한 개정안을 마련했다.

부록 조정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기존 통일안 "부록 1. 표준말"의 제7항과 제8항을 삭제하였다.

용어 및 용례 수정
통일안 본문의 각 규정에 사용된 용어와 예시 단어들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 확정된 표준어에 맞추어 수정하고 정리하였다.

명료성 및 실용성 강화
통일안 본래의 취지와 규정 내용을 사용자가 더 쉽게 이해하고 실제 언어생활에 편리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표현을 다듬었다.

판형 변경(가로쓰기 도입)
내용 개정 외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편집 체제를 기존의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전면 개편한 것이다. 이는 문자 생활의 과학화, 기계화, 현대화를 추구하는 조선어학회의 진취적인 의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3.3. 명칭과 의의

1937년에 간행된 이 개정판은 통상 "고친판", "수정판", 또는 "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등으로 불린다.

이 제1차 개정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언어 현실(표준어 사정)과의 연동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개선되는 살아있는 규범임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가로쓰기 판형의 도입은 이후 한국어 표기 방식의 현대화 흐름을 선도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평가받는다.

4. 제2차 개정(1940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2차 개정은 1933년 제정되고 1937년 1차 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한 두 번째 주요 개정판으로, 1940년 10월 20일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서 "새판"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이 개정은 1937년의 1차 개정이 주로 용어와 용례 수정에 그쳤던 것과 달리, 실제 사용상의 문제점과 학술적 논의를 반영하여 규정 내용 자체에 상당한 변경을 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4.1. 개정 배경과 목적

조선어학회는 1933년 통일안 발표 이후에도 규정의 완벽성을 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실제 적용 사례를 검토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면서 맞춤법 규정의 미비점이나 개선 필요성이 더욱 명확해졌다. 이에 따라 1933년 통일안 제정 위원 일부와 학회 간부, 사전 편찬 위원들이 여러 차례 협의와 심의를 거쳐 내용 개정을 추진하게 되었다. 주된 목적은 통일안의 규정을 더욱 정교화하고 실제 언어 현실과의 부합도를 높이며, 실용적인 편의성을 증진하는 것이었다.

4.2. 개정 과정

개정 작업은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이 중심이 되어 개정 조항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초안은 1933년 통일안 제정 위원 전원에게 제안되어 1940년 4월 25일에 가결되었으며, 이어 6월 15일에는 조선어학회 회원 전원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 내용상 추가 및 변경된 부분이 많아 판을 새로 짜서 "새판"(통산 제10판)으로 간행하였다.

4.3. 주요 개정 내용

1940년 개정판의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1933년판 대비)

제19항(동사 파생): 형용사 어간에 접미사 '-이/히/후-'가 붙어 동사가 될 때의 표기 규정에서, '-후-'가 붙는 경우를 -추-로 변경하였다.
(예) 갖후다 → 갖추다, 낮후다 → 낮추다, 늦후다 → 늦추다
중요 변경: 이 규정의 변경에 따라 맞춤법의 명칭 자체도 '한글마춤법통일안'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으로 수정되었다.

제29항(ㄹ 탈락 현상): 'ㄹ' 받침을 가진 말이 다른 말과 결합할 때 'ㄹ'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 소리 나지 않는 대로 적는다는 규정을 명확히 하였다.(1933년 판은 'ㄹ' 소리가 약하게 나는 경우와 나지 않는 경우를 함께 다루었으나, 개정판은 나지 않는 경우로 한정하여 명료화했다.)
(예) 소나무(솔+나무), 부나비(불+나비), 따님(딸+님), 바느질(바늘+질) 등.(내용상의 큰 변화라기보다는 규정 문구의 정리에 가까움)

제30항(사이시옷 표기): 복합어(합성어) 사이에서 나는 사이시옷 표기 규정이 크게 변경되었다.
1933년 판: 앞말 끝이 모음일 경우에만 받침 'ㅅ'을 적고, 자음 뒤에서는 적지 않았다.
1940년 판: 앞말 끝소리가 모음이거나 유성 자음(ㄴ, ㄹ, ㅁ, ㅇ)일 때 사이시옷 소리가 나는 경우, 그리고 뒷말 첫소리가 'ㅣ'나 'ㅑ, ㅕ, ㅛ, ㅠ' 등 반모음 /j/ 계열 모음이어서 'ㄴ'이나 'ㄹ' 소리가 덧나는(구개음화 동반) 경우에도 모두 사이시옷(ㅅ)을 받치어 적도록 규정을 확대·변경하였다.
(예) 뒤ㅅ간(모음 뒤), 문ㅅ간(ㄴ 뒤), 물ㅅ것(ㄹ 뒤), 아래ㅅ이(ㄴ 첨가), 들ㅅ일(ㄴ 첨가) 등.
이 개정은 음운 현상의 일관성을 표기에 반영하려는 시도였으나, 시각적으로는 자음 뒤에 'ㅅ'이 오는 형태가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었다.

제31항(ㅂ, ㅎ 소리 덧남): 복합어 사이에서 'ㅂ' 소리나 'ㅎ' 소리가 덧나는 경우의 표기 규정을 보다 명확하게 다듬었다.
(예) 멥쌀(메+ㅂ+쌀), 수캐(수+ㅎ+개), 안팎(안+ㅎ+밖) 등.(이 역시 규정 명료화에 중점)

부록 2(문장부호): 문장부호 규정이 대폭 보완되고 확장되었다.
1937년 판의 17개 항에서 39개 항으로 조항 수가 크게 늘어났다. 각 부호의 사용법에 대한 설명이 매우 상세해졌다. 세로쓰기 중심이었던 부호 모양을 가로쓰기에 적합하게 제시하였다. 부록 끝에 인쇄 등에서 시각적 주의나 구별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각종 기호 43개(예: □ 엔담, △ 마늘모 등)를 이름과 함께 추가로 제시하였다.

4.4. 의의와 영향

1940년 제2차 개정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더욱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규범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파생법 및 사이시옷 규정의 변경은 이후 맞춤법 논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마춤법'에서 '맞춤법'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상징적인 변화였다. 대폭 확장된 문장 부호 규정은 현대적인 글쓰기 양식 정착에 기여했다. 비록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광복 이후 한글맞춤법 재정비의 기초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5. 제3차 개정(1946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3차 개정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글 사용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기존 맞춤법 규정에 대한 실용적인 검토와 새로운 제안들이 논의됨에 따라 1946년 9월 8일 조선어학회 정기총회에서 이루어진 부분적인 규정 개정이다. 이는 광복 후 변화된 언어 환경을 반영하고 기존 규정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였으며, 완전한 개정판 간행 없이 기존 규정의 일부 조항을 수정, 추가, 삭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5.1. 개정 배경

광복을 맞이하면서 한글은 공공 영역을 포함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주요 문자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40년 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실제 언어생활에 적용하면서 나타난 문제점이나 개선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한글학회 내부에서도 표기법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새로운 제안들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기존 통일안의 일부 내용을 현실에 맞게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5.2. 개정 과정과 내용

1946년 9월 8일 정기총회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일부 조항이 개정되었다. 부분 개정이었으므로 별도의 개정판 책자는 간행되지 않았다.

제10항(된소리 표기 예외 추가): 어간 끝소리가 'ㄴ', 'ㅁ'일 때 그 뒤에 오는 어미 첫소리가 된소리로 발음되더라도 된소리로 적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을 추가했다.
(예) 신고(O), 신꼬(X) / 검고(O), 검꼬(X) - 발음은 된소리로 나더라도 표기는 예사소리로 함.

제30항(사이시옷 표기 전면 수정): 1940년 개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사이시옷 규정을 대폭 수정하여, 이전 규정으로 상당 부분 회귀했다.
수정 내용: 복합어(또는 준 복합어)에서 중간에 된소리나 'ㄴ', 'ㄹ' 소리가 덧날 때, 앞말 끝소리가 모음인 경우에만 사이시옷(ㅅ)을 받치어 적고, 앞말 끝소리가 자음인 경우에는 사이시옷을 표기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1940년 판과의 비교: 1940년 판에서는 앞말 끝이 모음뿐 아니라 유성 자음(ㄴ, ㄹ, ㅁ, ㅇ)일 때도 사이시옷을 적도록 했으나(예: 문ㅅ간, 물ㅅ것), 1946년 개정에서는 자음 뒤에는 사이시옷을 적지 않도록 변경했다(예: 문간, 물것). 이는 시각적 부자연스러움과 규정 적용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적용 범위 명확화: 한자어 복합어(예: 잇과(理科), 갓법(加法), 홋수(戶數))도 앞말이 모음으로 끝날 경우 사이시옷을 적는 규정에 포함됨을 명시적으로 예시했다. 자음으로 끝나는 한자어 복합어(예: 상과(商科), 감법(減法))는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다.
예시:
(앞말 모음 뒤) 냇가, 콧날, 잇몸; 잇과, 갓법, 홋수; 챗열, 아랫이
(앞말 자음 뒤) 길가, 손등, 움집; 상과, 감법, 권수; 집일, 물약

제48항(한자어 표기 단서 추가): 한자어 중 속음(관용적으로 굳어진 발음)이 된소리일 경우, 된소리 속음대로 적지 않고 본음(표준 발음)으로만 적는다는 단서를 추가했다.
(예) 정가(定價)(O), 정까(X) / 발달(發達)(O), 발딸(X)

제61항(띄어쓰기 허용 규정 추가): 원칙적으로 단어별 띄어쓰기를 해야 하지만, 문맥상 특별히 필요할 경우 단어를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하는 예외 규정을 추가했다.
(예) 이 곳 저 곳(원칙) → 이곳 저곳(허용) / 좀 더 큰 이 새 나라(원칙) → 좀더 큰 이 새나라(허용)

제62, 63, 64항 삭제: 기존의 세 조항을 삭제하였다.(이에 따라 기존 제65항이 제62항으로 변경됨). 이에 따라 보조용언과 명수사를 띄어쓰게 되었다.

제63항(고유명사 띄어쓰기 신설): 둘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는 각 단어를 띄어 쓴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예) 이 순신, 경기 도, 삼국 사기, 덕수 공립 국민 학교

5.3. 의의와 영향

1946년 제3차 개정은 광복 후의 새로운 언어 환경 속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실용성을 높이고자 한 능동적인 조정이었다. 특히, 논란이 많았던 1940년의 사이시옷 규정을 현실적인 방향으로 수정한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또한, 한자어 발음 표기 원칙을 명확히 하고, 띄어쓰기에서 실제 언어 사용의 유연성을 일부 반영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부분 개정에 그쳤지만, 이 개정은 이후 남북한의 맞춤법 정비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과도기적 단계로 평가된다.

5.4. 역사적 위치: 북한과의 분기점

1946년 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남북 분단 이전에 북한 지역에서도 마지막으로 통용되었던 조선어학회의 공식 맞춤법 규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북한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언어 정책 노선을 걷게 된다. 1947년 2월 5일 북조선 인민 위원회는 별도로 '조선 어문 연구회'를 조직했고, 이 기구는 1948년 1월 15일에 '조선어 신철자법'을 발표했다.

'조선어 신철자법'의 머리말(1950년 4월 15일 자)에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자신들의 제정 원칙을 밝혔다.
"조선어 신철자법"은 언어 문'자[A]의 본질적인 사명에 립각하여 한편으로 남 조선 조선어 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다한 비판 검토로부터 출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멀지 않은 장래에 조선 어문의 발'전[A]을 위하여 반드시 수행해야 할 한'자[A] 철페와 문'자[A] 개혁(풀어서 가로 쓰기)을 예견하는 견지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결과 일정한 의미를 가지ㄴ[B] 낱말을 언제나 고정적으로 표시하고 문'자[A]로 하여금 일정한 의사 표시의 도구로 삼게 한는 형태주의 원칙을 기본으로 삼아, 종래의 철자법에 적지 않은 변동을 가하게 되였다. 그러나 이는 근본이 우수한 우리의 말과 글을 더욱 발전시키여 그 진'가[A]를 남기ㅁ[B] 없 나타내게 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필요한 변혁이였다.
—조선 어문 연구회, '조선어 신철자법' 머리말(1950. 4. 15.)

북한의 '조선어 신철자법' 제정자들은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이 (자신들의 기준에서) 형태주의 원칙에 충분히 철저하지 못하고 음소주의(소리 나는 대로 적기)에 치우친 면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를 근거로 더욱 강력한 형태주의 원칙을 적용하고, 향후 한자 폐지와 가로 풀어쓰기까지 염두에 둔 새로운 철자법을 제정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1946년 개정안을 기점으로 남북한의 공식적인 한국어 표기법 규범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음을 명확히 보여 주는 사건이다.

6. 한글판 간행(1948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한글 전용(專用)의 움직임이 크게 진전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1948년 10월 1일에는 국회에서 법률 제6호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약칭: 한글 전용법)이 통과되었다. 비록 이 법률에는 '당분간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있었으나, 국가 차원에서 한글 중심의 문자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배경하에, 기존에 한자와 한글을 섞어(한자 혼용) 간행되었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오직 한글만으로 새롭게 조판하여 간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는 1948년 10월 9일(한글날)에 '한글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간행하였다. 이 판본은 이전 판들과 달리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인쇄된 것이 특징이며, 통상 "한글판"으로 지칭된다.

또한, 이 한글판은 내용적으로 1946년 9월 정기총회에서 결정된 제3차 개정 사항(사이시옷 규정 수정, 띄어쓰기 규정 보완 등)을 모두 반영하여 조판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한글판은 통산 제235판에 해당한다.

'한글판'의 간행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글 전용 정책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국가의 표준 어문 규범을 한글 중심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7. 제4차 개정(1958년 용어 수정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4차 개정은 1957년 한글학회(구 조선어학회)의 논의를 거쳐 1958년 2월 25일에 간행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최종 개정판이다. 이 개정은 내용상의 변경 없이 주로 문법(말본)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통상 "용어 수정판"이라고 불린다.

1957년 당시 한글학회는 '중사전(中辭典)' 편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전 편찬에 사용될 문법 용어와 맞춤법 관련 문제를 통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957년 5월 26일 정기총회에서 관련 문제를 검토할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위원 선정은 이사회에 위임했다.

6월 2일 이사회에서는 최현배, 김윤경, 정인승, 이탁, 홍웅선 등 6명을 검토 위원으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연구·검토를 거쳐 6월 30일 임시총회에 결과를 보고했고, 총회는 이를 그대로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7.1. 주요 개정 내용: 용어의 우리말화

핵심적인 개정 내용은 '한글맞춤법통일안' 본문에 사용된 한자 기반의 문법 용어를 1949년 7월 9일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제정한 우리말 용어로 전면 교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글학회에서 발간하는 모든 간행물에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결의에 따른 조치였다.

주요 용어 변경 예시는 다음과 같다.(제3장 목차 비교)
종전 용어(한자식) 수정판 용어(우리말)
체언(體言)임자씨
어간(語幹)줄기
어미(語尾)
동사(動詞)움직씨
피동형(被動形)입음꼴
사역형(使役形)하임꼴
변칙용언(變則用言)벗어난풀이씨
어원(語源)말밑
품사 합성(品詞合成)겹씨 된 것
원사(原詞)낱말의 몸
접두사(接頭辭)앞가지

총회에서는 맞춤법 문제로 '-올시다, -ㄹ지라, -ㄹ수록' 등을 어미(씨끝)로 다루고, '-ㅂ니까, -리까, -ㄹ까, -ㄹ꼬' 등 물음 어미를 된소리로 적는 방안도 논의되었으나, 이 내용들은 기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직접 규정된 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이로 인해 통일안 본문 내용이 수정되지는 않았다.

7.2. 결과와 의의: 최종판으로서의 '용어 수정판'

이러한 용어 수정 작업을 반영하여 1958년 2월 25일에 새로운 판본(통산 제251판)이 간행되었으며, 이것이 "용어 수정판"이다.

이 "용어 수정판"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최종판이 되었다. 이후 내용 변경 없이 이 판본이 계속해서 발행되었으며, 1966년에는 제276판, 1977년에는 제356판이 간행되는 등 오랜 기간 한국어 표기의 표준 규범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44년 동안 356판이나 발행된 것은 한국 출판사에서도 이례적인 기록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한국 사회에 미친 깊은 영향력을 보여준다.
[A] 이와 같은 적기는 '조선어 신철자법'의 특징으로 사잇소리 현상이 일어나는 곳에 '를 썼다.[A] [A] [A] [B] 이와 같은 적기는 '조선어 신철자법'의 특징으로 반모음을 제대로 적지 못해 'ㅣ'로 적은 것이지, 오기가 아니다.[A] [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