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FFF> 한무도 Hanmoodo 韓武道 | ||
혼란의 개화기 1880년대는 武學이 필요했던 시대 | ||
스포츠 정보 | ||
종류 | 전통무예, 한국검술, 종합격투기 | |
공격 방식 | 타법(타격), 호신법(그래플링), 검·도법(검술창술) | |
분류 | 근현대무술, 가전무술, 전승무예 | |
종주국 | 대한민국 | |
창시자 | 기산(寄山) 배성전[1] | |
영향 [2] | 무예도보통지[3], 씨름[4] | |
내력 | 1881년 기산서숙도장 설립, 1888년 대한 한무도 명명, 1982년 사회단체 설립, 2002년 사단법인 인가 | |
관련 링크 |
1. 개요
한무도는 대한민국의 근현대 무술이다.1888년에 기산 배성전에 의해 '대한 한무도'라 명명 되었으며, 굴곡진 시대에도 명맥을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 가전무술이다.
1982년에 4대손인 배병호에 의해 실내에서 수련할 수 있는 현대무술로 재정립되어 보급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는 정부에서 허가하는 종목으로 문화체육부 사회체육지도자 자격취득 종목 이였으며, 중반부터는 뉴스에도 간간히 소개되기도 하였다. 대중에게는 아직도 생소하지만 한 때 전국에 전수관이 100여개 정도까지 늘어났다.
2. 역사[5]
조선말엽 포항 흥해에서 과거 공부를 위해 수학 중이던 배성전 선생이 파직군관 출신의 스님을 만나게 되어 함께 기림사로 들어가 무술을 전수받아 집대성 하였다. 이후 배성전 선생은 심순택 대감의 저택 별채에서 기산서숙도장을 열고 사대부 자제들을 대상으로 유학과 무예를 전수하였으며, 1888년 심순택 대감으로부터 한무도라는 이름을 추천받아, 배성전 선생에 의해 대한 한무도 라 명명 되었다. 이것이 한무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일제시대에는 안동 체거리와 군위, 충청도에서 활동 후 낙향하여 '경주시 양남면 상계리'에서 전수하였다.
당시 관할의 '와다' 순사의 감시를 받았으며, 활동의 제약이 생기자 전수를 이어가기위해 상여계[6]를 조직하여 검무를 통해 전수하고 제자들과 소통하였다. 노년에는 기산서당을 만들어 시눗대를 이용하여 훈육과 전수를 하였다.
창시자의 장남 배종익은 아버지의 한무도를 이어가기 위하여 일가를 한무종가라 명명하여 가전으로 이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는 도장이 꽤 생겨났고, 정기 승단심사와 대회도 진행하였으나. 현재는 소규모로 전수되고 있는듯 하다.
3. 현황
경남 합천에 총본산 한무종가가 있으며, 최근 서울특별시, 경기도, 대구광역시, 경상남도 등 지부협회 설립등기가 완료된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의 '압구정 한무랑클럽'을 주축으로 지자체 센터와 공원에서 상설 비상설 클럽이 운영되고있다.4. 여담
5. . 한무도의 인물, 역사, 모티브 등 콘텐츠
5.1. 도적:칼의소리 기산 배성전과 최충수(유재명 배우)
조선말과 1920년대 간도를 배경으로하는 넷플릭스 드라마이다. 유재명 배우가 연기한 최충수역은 과거 의병장 출신으로 간도지방으로 이주하여 조선인마을 지주(支柱)가 된다. 검술과 궁술에 능하다.고려시대와 조선 초.중기에는 유명한 검술가들이 있지만, 개화기와 일제시대에는 이야기들이 드물어 흥미롭다.
기산 배성전의 실제 이야기는 개항의 시기의 외교적으로 예민한 사안인 부산항(두모진해관)의 세금문제 등을 영의정 심순택이 배성전을 통하여 해결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낭인들과 혈전, 심순택을 근접 수행하여 대담현장에서 일어났던 위안스카이 부관들과 팔씨름 등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이후 심순택의 천거로 대한제국때 안변부사로 제수되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경주시 양남면으로 낙향하여 마을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드라마와 실제의 이야기는 차이가 있지만 복식의 싱크로율은 굉장히 높다. 극중 최충수는 환도를 사용하지만, 배성전은 오죽장(죽장검)을 사용하였다.
[1] 1880년대 집대성된 무술[2]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일부 영향을 받은 무술.[3] 창시자 배성전의 스승 부운이 심순택 계파의 군관이었으나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의 처우관련으로 문제를 일으켜 파직되었다고 한다. 무예도보통지의 기술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4] 1970년대 후반 창시자의 증손인 배병호 종사가 실내 대중무술로 재정립하면서 경상남도에서 유명한 씨름 장사였던 외조부 정제문, 씨름으로 시작해 유도와 레슬링 선수였던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아 씨름수와 매치기 낙법 등을 호신법에 일부 추가하였다고 밝혔다. 이외에는 다른무술의 기술적 영향은 없었다고 한다.[5] 한무도 홈페이지를 출처[6] 당시 마을에 상여가 없없다고 한다. 전통 장례문화에는 탈을 쓰고 검무를 하는 의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