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한용휴(韓用休) |
자 / 호 | 응필(應弼) / 묵랑(墨浪) |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854년 12월 20일 |
경상도 용궁현 신읍면 송암리 (現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송암1리 용암마을[2] 387번지) | |
사망 | 1907년 12월 20일[3] (향년 53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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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한양이는 그의 차남이며, 독립유공자 한장리는 5촌 당질(堂姪)이다.
2. 생애
1854년 12월 20일 경상도 용궁현 신읍면 송암리(現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송암1리 용암마을 387번지)에서 아버지 한병추(韓秉樞, 1814 ~ ?. 5. 6)와 어머니 해주 최씨(? ~ ?. 3. 21)[4]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896년 1월 안동부 문경군 가북면 도태리(現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1리 도태마을) 장터에서 이강년이 의병진을 구성한 뒤 용궁군 신읍면을 경유하자, 차남 한양이와 함께 입대해 참모관(參謀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도화(金道和)가 이끄는 안동의병진과 함께 안동관찰부를 공격해 점령하고 의병진에 몰려 도망가던 안동부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경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을 추격하여 생포하였다. 생포 당일 문경군 가서면 장기리(現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 장터) 농암장터에서 이들 세 사람을 군중들 앞에 내세우고 그들의 밀정 행위 등 친일행각을 매도한 뒤 효수했다.
1896년 1월 15일에는 문경군 신동면 정곡리(現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정곡마을) 마고산성(麻姑山城)에서 일본군과 접전했으며, 2월 이후 유인석 연합 의병진에 편입된 뒤로부터 그해 7월 의병진이 해산될 때까지 주로 충청북도 일대에서 활약했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에도 이강년 의병진 소속으로 경상북도 문경군·문경군 신북면 갈평리(現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경기도 여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12월 20일 의병진영에서 별세했다.
1982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