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02:12:08

허곤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허성준(許聖俊)
성중(性中)
본관 김해 허씨[1]
출생 1884년[2] 7월 5일
경상도 청도군 하남면 내호동
(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3]
사망 1951년 11월 1일[4]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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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허남귤은 그의 7촌 재종증손(再從曾孫)이다.[5]

2. 생애

1884년 7월 5일 경상도 청도군 하남면 내호동(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서 아버지 허병(許炳, 1854. 1. 1 ~ ?. 5. 20)과 어머니 청도 김씨(1858. 12. 10 ~ ?. 11. 26)[6]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7]

3.1 운동이 막바지에 치닫던 1919년 5월 7일, 청도군 대성면 유호리 김달선(金達先)의 집에서는 미치다 사쿠타(充田作太)·야마구치 토라오(山口虎雄)·미즈노 키사부로(水野喜三郞) 등 세 명의 일본인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 중 미즈노 키사부로가 마당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자신들의 독서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칼을 빼어 들어 이종현(李鍾鉉)이라는 한 아이의 입술을 베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허곤도는 같은 날 이종현의 형 이종학(李鍾學)을 비롯해 이규봉(李圭鳳)·김영곤(金永坤)·김도곤(金道坤)·이무수(李武壽) 등 마을 청년 20여 명과 함께 앞선 3명을 구타하여 최소 12일에서 최대 1개월에 이르는 기간의 치료를 요하는 창상(創傷)을 입혔다.

얼마 뒤 체포되었고, 일제는 이 사건을 3.1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여 '최후의 폭동'으로 규정했다. 허곤도는 1919년 7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상해, 훼기, 건조물 손괴 등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고 형벌이 처해진 뒤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1년 11월 1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허곤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목사공(牧使公) 윤염(允廉)파-복(福)-용(瑢)파 25세 도(道) 항렬.[2] 김해허씨세보 을편 629쪽에는 188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독립유공자 허남귤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음력 10월 3일.[5] 허곤도는 허남귤의 증조부 허채도(許埰道, 1863. 2. 2 ~ 1917. 2. 3)의 4촌 동생이다.[6] 김석수(金錫秀)의 딸이다.[7] 어머니 청도 김씨는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며, 둘째 부인 해주 황씨(海州 黃氏, 1868. 10. 30 ~ 1941. 11. 14) 황치중(黃致中)의 딸은 슬하에 차남 허원도(許垣道, 1888. 5. 28 ~ 1957. 8. 13), 3남 허은도(許垠道, 1891. 5. 28 ~ 1959. 10. 1), 4남 허형도(許土+亨道, 1900. 6. 18 ~ 1950. 11. 8), 5남 허용도(許埇道, 1906. 4. 20 ~ 1945. 7. 15) 등 4남 1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