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8 03:44:36

현승(신라)



玄昇
? ~ 918년 음력 2월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1. 개요

신라 말기의 인물. 경명왕 시기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관등은 일길찬(一吉飡)[1]

7관등인 일길찬에 있던 점을 미뤄보면 신분상 진골 혹은 6두품으로 추정된다.

2. 생애

917년 7월 경명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918년 음력 2월,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사형당했다. 경명왕이 왕위에 오른지 7개월만에 반란을 일으킨 점으로 보아, 경명왕의 즉위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 현승의 난(918년)은 기록상 신라 내에서 일어난 마지막 반란이다.
  • 현승의 난이 진압되고 1년 뒤인 919년, 경명왕은 상대등 김성(金成)을 각간에 임명하고 시중인 언옹(彦邕)을 사찬(沙湌)으로 삼는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2]

4. 대중매체

소설 마의태자에서는 궁예와 견훤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군이 되어 아슬라성을 공격하는 궁예를 치기 위해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진했다. 그러나 아슬라성을 지키는 충신이 보낸 사자가 서라벌로 가는 도중에 만나 아슬라성에서 거의 다 죽었을 거라며 자신이 빠져나올 때 살아남은 군사가 백명도 못되었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신라 조정에서는 효종이 견훤과 친해야 한다고 했고, 현승은 궁예와 친하게 지내 견훤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되었다. 예겸이 조정을 장악하자 918년에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예겸의 집을 포위해서 예겸을 붙잡아 죽이고 예겸의 가족들을 모두 도륙했으며, 말을 몰아 대궐로 가다가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상한 채 관군에게 붙잡혀 효수되었다.

효수당한 날 밤에 어떤 노승이 현승의 머리를 안고 달아났으며, 신라 조정에서 현승의 삼족을 멸하고 집터에 못을 파고 평소 현승과 가까이하던 모든 사람을 모조리 잡아죽였는데, 사흘 동안 현승과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277명으로 그 중에는 노인과 어린 아이도 있었다. 이 때 서라벌에 궁예가 현승을 시켜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져 현승을 동정하던 백성들도 이 말을 듣고 현승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1] 신라의 17관등 중 7관등에 해당된다.[2] 그러나 시중이 사찬(8관등)보다 높은 관직(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대아찬 ~ 이찬까지의 인물이 시중에 임명되었다.)인 점을 미뤄볼 때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것을 오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