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15:31:04

호소카와 하루모토


細川晴元(세천청원)[1]

무로마치 막부간레이.[2]

전대 간레이 호소카와 타카쿠니와 맞서던 스미모토의 아들이다.[3] 스미모토 사후 아버지의 세력을 물려받아 타카쿠니와 싸웠다. 이때 타카쿠니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모토 측도 요시하루의 동생을 옹립하였다.[4][5]

1527년, 타카쿠니 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타카쿠니는 요시하루를 데리고 오오미로 도주하였다. 하루모토는 그 뒤 사카이에 임시 막부를 열었다 이는 중신 미요시 모토나가의 공이 컸다. 그러나 2년 뒤 모토나가와 하루모토가 갈등을 빚고 끝내 모토나가가 낙향해버리며 하루모토 측의 군사력은 급감하였다.

이 기회를 노리고 타카쿠니가 역습을 가하지만, 하루모토는 긴급히 모토나가와 화해하여 다시 승리를 거두고 타카쿠니를 자결시켰다. 이로서 하루모토는 아버지 스미모토의 원수를 갚고 타카쿠니를 멸망시켰다.

그 뒤 권력 기반 확보를 위해 혼간지를 통해 잇코잇키를 획책하여 그걸로 미요시 모토나가를 제거하였다. 이 뒤로는 끊임없는 반란과 그의 진압의 기록(...).

모토나가의 죽음 이후 미요시 가문 내에서의 분쟁, 타카쿠니의 양자 호소카와 우지츠나의 반란과 그 편을 들어 롯가쿠 가문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요시하루 쇼군 등 연달아 악재가 닥쳤다. 하루모토는 이를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의 편을 들고, 우지츠나 군과 싸워 겨우 승리하여 자리를 지켰다. 요시하루 쇼군[6]과도 화해하여 잘되나 싶었는데...

1548년 우지츠나의 편을 들었던 가신을 숙청한 것으로 인하여 가문 내의 지지를 상당히 잃어버리고, 그 사이 우지츠나가 다시 반란하였다. 또다시 일어난 미요시의 분쟁에 이번에는 나가요시의 편을 들지 않았다가 나가요시가 우지츠나의 편을 들어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고, 1549년에는 아예 져버려서 요시하루 오고쇼, 요시후지 쇼군과 함께 오오미로 도주하였다. 이거 위에서 본 것 같은데

그 뒤에는 요시후지 쇼군과 함께 활동하나, 1552년 요시후지 쇼군이 나가요시와 화해한 것 때문에 그와도 결별했다가, 1553년 요시후지가 나가요시와 결별하며 다시 손잡았다. 그 뒤에는 미요시의 공세에 의하여 몰락하고 1561년에는 유폐까지 되었다. 2년 뒤 사망했다.

이래 저래 험난한 인생을 산 인물. 모토나가를 안 죽였다면 더 편해질 수도 있었을까......?[7]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능력치가 좋지 않다.
[1] 하루(晴)는 아시카가 요시하루 쇼군에게 받은 것이라서, 그와 적대할 때는 호소카와 로쿠로(細川六郎)라는 이름을 썼다.[2] 허나 여기에 이설도 있다.[3] 타카쿠니와 스미모토는 선대 간레이이던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계승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결과는 오우치 요시오키와 손잡은 타카쿠니의 승리.[4] 그러나 공인된 쇼군은 아니다.[5] 그 이전 타카쿠니와 갈등을 빚다 밀려나 쇼군에서 퇴위한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하루모토를 찾아왔었지만, 그 때 하루모토는 너무 어렸고, 이로 인해 실망한 요시타네는 얼마 안가 죽었다.[6] 정확히 말하면, 이 당시에는 쇼군이 아니었다. 이미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후지에게 자리를 넘겨준 뒤였기 때문. 그리고 그 요시후지가...[7] 실제로 모토나가 사후 악재가 겹친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