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농은 홍유한(?隱 洪儒漢) | |
세례명 | 없음[1] |
수도명 | 없음 |
출생 | 1726년 |
조선 서울 | |
사망 | 1785년 1월 30일 (향년 60세) |
사망지 : 조선 | |
국적 | 한국 |
종교 | 가톨릭[2] |
직업 | 수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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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농은 홍유한(?隱 洪儒漢) 선생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2. 생애
1726년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했다. 안동의 명문가 풍산 홍씨 16대손이다. 정조임금의 외가 집안이기도 했다. 학벌과 문벌이 높은 집안 출생이었던 선생은 한때는 과거에 뜻을 두기도 했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으며 16세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포기하고 성호 이익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다가 1750년 경부터 순암 안정복, 녹암 권철신 등과 함께 당시 유행했던 서양 서적인 "천주실의", "칠극"등 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가톨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757년, 한양의 생활을 청산하고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서 혼자 18년간 "칠극"에 따른 수계생활을 하였다. 1775년 부터는 소백산 밑의 경상도 순흥 고을 현 영주시 단산면으로 가서 10년동안 더욱 철저한 수덕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그 이후 60세 되던 1785년에 선종하였다.[3]농은 선생이 수덕생활을 하던 시기는 한국에 가톨릭이 설립되기는 커녕 제대로 된 성서나 기도책, 축일표, 심지어는 신부와 대세[4]로라도 세례를 제대로 줄 수 있는 교리를 제대로 아는 신자조차도 없던 상황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사실만 알고서 매달 7, 14, 21, 28일에는 안식하며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하였다. 또한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았으며 배려와 자비를 실천하기에 힘썼다고 한다.
정조임금은 그를 궁중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홍유한 선생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의 재당숙이기도 하다.
3. 논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덕자로 여겨지는 그지만, 그가 실제로 가톨릭에 기반한 수도생활을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홍유한이 남긴 글과 편지를 엮은 농은공집에는 가톨릭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교환한 편지들을 묶은 서간철에도 가톨릭에 대한 언급은 없다.달레신부는 홍유한을 화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로까지 간주하고 있으나 홍유한은 제자를 남기거나 누군가를 개종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에 명확한 근거는 확인할 길이 없다. 권철신이 작성한 추도문에는 홍유한이 여러가지 덕성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칠극에 적힌 내용과 비슷한 점으로 보았을 때 홍유한이 극기와 수덕생활의 공부에 전념했던것은 맞는것 같으나 이것이 가톨릭적인 영성생활이었는지 유교의 극기생활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정식 가톨릭 세례를 받지도 않았으며 화세를 받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정식 한국 가톨릭의 시작으로 보기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