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5 19:17:55

화남대전

화남대전
華南大戰
Great War of HuaNan
시기 기원전 327년~기원전 323년
장소 초나라령 강동일대
원인 구 월국령 월인들이 초나라의 지배에 반발과 월국부흥군의 공격
전쟁이 장기화되자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제나라를 중심으로 송과 한이 군사적 개입
교전세력 제齊
한韓
송宋
월국부흥군
초楚
지휘관 월부흥군 작†
월부흥군 신문†
월부흥군 광릉성주 수성†
월부흥군 천†
월부흥군 통†
월부흥군 가†

제 대부 전반
제 진태수 전거

한 장군 한거

송공 대언†[1]
송 대부 사거
초 중군사마 굴개
초 완대부 경취
초 말릉군수 소어
초 회계태수 유봉†
병력 월부흥군 약 2만 5천[2]
민월군 9천
제군 1만 4천 4백
송군 4만 9천
한군 4만1천

총합 약 13만 8천
초군
강동주둔군 약 3만[3]
절강주둔군 1만 2천
중앙군 7만 4천

총합 약 11만 6천
피해[4] 월부흥군 약 1만 4천
민월군 3천 5백
제군 3천 7백
송군 1만 8천
한군 1만 9천

총합 약 5만 8천
초군

총합 약 5만
결과 초나라 강동령 제압 및 연합군 격퇴
영향 초나라가 구 월국령을 확고히 확보
송나라 정권교체

1. 개요2. 배경
2.1. 초의 사정2.2. 월부흥군의 사정2.3. 제, 송, 한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기원전 327년 상황
3.1.1. 광릉봉기3.1.2. 파괴공작의 달인 천 등장3.1.3. 오전투, 작선장 최후의 불꽃3.1.4. 민월의 진격3.1.5. 작선장의 최후3.1.6. 수성 월부흥군의 맹주가 되다.
3.2. 기원전 326년 상황
3.2.1. 월군의 운양진격과 소어의 견제3.2.2. 운양전투3.2.3. 오성함락3.2.4. 절강전선 상황3.2.5. 고멸전투3.2.6. 무원점령3.2.7. 운양의 광릉 진격3.2.8. 소관성주의 방해3.2.9. 광릉공방전3.2.10. 영도 반란소식을 듣다3.2.11. 월의 운양제압과3.2.12. 소어의 상황파악3.2.13. 유봉의 무원제압3.2.14. 월의 대전략 구상3.2.15. 송의 참전3.2.16. 초와 민월의 휴전성립3.2.17. 소관성주의 고의적 늦장3.2.18. 제와 한의 참전
3.3. 기원전 325년 상황
3.3.1. 오성 공방전3.3.2. 운양전투3.3.3. 연합군 결성3.3.4. 믿을만한 송나라 부관3.3.5. 소관성주 덫에 걸리다.3.3.6. 무능한 사거와 연합군의 위기3.3.7. 종리전투3.3.8. 오성함락3.3.9. 종리함락과 전반의 복귀3.3.10. 한송연합군의 쾌진격3.3.11. 영성에 도달한 비보3.3.12. 첨공방전3.3.13. 오성 방화3.3.14. 회계전투3.3.15. 종양의 항복과 경취의 전략수립3.3.16. 월국부흥군의 전략 수립3.3.17. 소어의 대응3.3.18. 사거 기사로 진군3.3.19. 경취 서양에 도착3.3.20. 민월의 절강점령3.3.21. 월부흥군 말릉을 점령3.3.22. 굴개의 진격3.3.23. 초조정 민월과 타협하다.
3.4. 기원전 324년 상황
3.4.1. 굴개 능양에 도착하다3.4.2. 민월 향방을 정하다.3.4.3. 송한 결별3.4.4. 말릉 공방전3.4.5. 기사 공방전3.4.6. 1차 기사전투3.4.7. 한송연합군 재결성3.4.8. 송나라 내부의 반란3.4.9. 한과 제의 추가 증원
3.5. 기원전 323년 상황
3.5.1. 한과 제의 증원군 파병3.5.2. 초조정의 현황파악3.5.3. 굴개의 강동제압3.5.4. 송제연합군의 서현제압3.5.5. 초와 민월의 협상3.5.6. 송 반란제압, 수춘으로 진공3.5.7. 경취와 한거의 수싸움3.5.8. 3국연합군 수춘에 집결3.5.9. 2차 기사전투
4. 결과
4.1. 종전협상4.2. 초의 논공행상4.3. 월의 부흥 사라지다.
5. 영향
5.1. 한 이후 진로를 생각하다.5.2. 제 정점은 아직 정정하다.5.3. 송 대언의 최후와 연홍옥의 등장5.4. 초 강동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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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역대 대전급[5] 전쟁 중 최장의 기간으로 무려 5년동안 강동일대에 초, 월, 제, 송, 한 5개국이 피와 피로 씯는 혈전을 펼쳤다.

2. 배경

2.1. 초의 사정

월국을 멸망시키고 강동의 점거한 초국은 곧이어 명군 웅상이 졸하고 그녀의 장녀 태자 웅괴가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어린나이에 보위에 오른탓에 정사의 대부분은 고명대신인 영윤 소양이 맡았으며 패자체제가 견고하였고 남양대전에서 그 위력을 몸으로 실감한 초는 화북을 경계하며, 점령한 강동령을 흡수하고 힘을 회복하여 다시금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내 기원전 328년 진왕과 밀약을 맻고 주 천자를 이용하여 전인제로 하여금 패자체제를 스스로 종식시키는데 성공시킨 초는 동쪽의 오랜 원수 파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초왕 웅괴 몸소 1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정벌은 파국 내부의 분란으로 전투없이 파왕이 초왕에게 굴복하는것으로 종결되었지만, 무리한 대군의 동원으로 강동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길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불운을 맞게되었다.

2.2. 월부흥군의 사정

월국 멸망 이후 조선에 파견나와있던 작선장과 제의 후원을 받은 해적 신문은 각기 세력을 이끌고 해상에서 초나라와 절강을 세력을 공격하며 월 부흥의 기치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세력을 키워 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후원자인 제나라의 동맹국 송의 항구까지 공격하자 제는 더이상 이들을 후원 할 수없다며 세력을 줄이던지 제나라 해역에서 나가라고 통보하였다.[6] 작선장은 제나라의 통보에 느슨해진 마음을 바로잡고[7] 다시 한번 월의 부흥을 외치며 옛 월국의 땅으로 남하하였다.
남하한 월국부흥군은 주산열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전 그들과 충돌하였던 민월 세력과 협력[8]하여 작선장이 이끄는 해적은 강북을, 민월세력이 절강을 공격하여 월을 부흥시키기로 합의하였다.

2.3. 제, 송, 한의 사정

초가 월을 멸국하고 그 기세를 보이자 초와 국경을 맞데고 있는 한과 송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물론 이를 그냥 보고만 있지않은 패자 전인제 였지만, 초나라와 진나라의 합작으로 벌어진 낙양사건에 의해서 패자체제는 무너져 버렸고 이를 수습하는 사이 초나라는 재정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제, 송, 한 삼국은 어떻게든 초가 북상하는것을 대비해야 하였고 강동에서 벌어진 봉기는 초를 주저앉힐 좋은 기회였다.

3. 전투의 전개

3.1. 기원전 327년 상황

3.1.1. 광릉봉기

민월과의 협상을 마친 작선장은 구 월국령 내부의 동조자들을 찾기위해 봉기에 협력하라는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응한곳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광릉뿐이고 나머지 지역들[9][10]은 먼저 나서기를 꺼리거나 간보기를 시전하였다.
그러나 작선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설령 모든 지역이 호응하지 않더라도 단독으로 나설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먼저 민월에 자신들이 오 인근의 장강하류에서 초 수군과 결전을 벌이테니 민월측에서 절강을 차지하라고 통보하고 그대로 오로 향하였다.
한편 작선장과 협력하기로 약속한 광릉성주 수성은 광릉의 주요시설을 확보하여 단독 봉기에 성공하였고 기세를 몰아 운양으로 진격하여 부흥군의 기세를 보여 망설이고 있는 지역을 회유하기로 하였다.

3.1.2. 파괴공작의 달인 천 등장

수성은 운양으로 진격하였지만 힘으로 그곳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오인근에서 결전을 치룰 작선장을 돕기위해 운양에 주둔중인 초수군의 진격을 방해할 심산이었다. 그녀는 작선장 해적단 소속 운양출신의 뱃사람 천에게 운야에 잠입하여 초군을 견제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천은 즉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운양의 초수군 기지에 잠입해 대선 일부와 소선의 상당수를 파괴하니 운양의 초수군은 발이 묶여 움직일수가 없었다. 대노한 초군이 천들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흔적조차 잡지 못하여 "어떻게 이럴수가 있느냐며" 배를 망실한 분노도 잊고 감탄하였다.

3.1.3. 오전투, 작선장 최후의 불꽃

수성과 천의 공작 덕분에 오인근에서 결전이 벌어질 당시 초수군이 월부흥군보다 그 수가 적게되었다. 초군 지휘관인 소어는 운양에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지리적 이점은 초군이 쥐고 있었기에 해볼만 하다고 판단하여 전투에 나섰다.
곧 양 수군이 맞붙히고 초전의 기세를 가져간것은 월군이었다. 오래전부터 바다 주름잡는 월인들이었고 이미 작선장을 시작으로 휘하 일원 모두 죽어도 이자리에서 죽겠다는 결사의 각오로 임하였기에 초수군이 밀릴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어도 만만치 않다듯 반격을 가하니 초군이 무서운 기세로 맹공을 가하여 선두에 활약하던 월군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두에서 직접 싸우고 있던 신문이 대도를 휘두루며 몸소 노도와 같은 초군의 기세를 홀로 받아내어 멈추니[11] 작선장은 몸소 배를 지휘해 측면으로 초군의 옆구릴 찔렀다.
소어는 반격이 막히고 역공을 당하여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수군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이며 여기서 수군이 전멸하더라도 적에게 피해를 입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미 승세를 탄 월군에게 생체기를 입힐 힘도 남지 않았다듯 초수군의 함열이 무너져내렸다. 더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한 소어는 퇴각 명령을 내렸고 결전의 승자는 월이 가지게 되었다.

3.1.4. 민월의 진격

오에서 한창 결전이 벌어지고 있을때 민월 역시 병력을 이끌고 절강으로 향하여 초나라에 반기를 들것을 알렸지만 구장을 제외한 지역들 모두 응하지 않았고 그 구장마저 절강에 주둔중이었던 회계태수 유봉에게 제압 당하였다.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홀로 초군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작선장이 오의 결전에 승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기로 결의하였다.

3.1.5. 작선장의 최후

월부흥군이 오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간을 보던 지역이 혼란에 빠지고 그중 연릉이 부흥군에 합류 의사를 밝혔다. 이에 수성은 운양만 점령하면 수로를 완전히 장악하여 말릉견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운양에서 봉기하여 저항중인 천을 돕기 위해 장강을 건너 병력을 파병하였다.
그사이 회음과 잠이 합류하겠다는 사절을 보내자 수성은 기쁜 마음에 전투에 부상을 입고 요양중인 작선장을 찾아가 현황을 보고하였다. 작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잘되었다고 말하였다. 작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수성이 의원을 불렀지만 작은 고개를 저으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난 곧 죽는다. 내 몸이니까 그 정도는 알아.
다만,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죽을 때는 바다 위에서, 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뭍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내 고향에서 죽게 되었다는 점일까.
-작선장의 유언

3.1.6. 수성 월부흥군의 맹주가 되다.

우두머리인 작이 죽자 광릉성 모두가 크게 슬퍼하였고 동시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신들을 이끌어준 작이 죽자 혼란에 빠진것이다. 이 혼란을 잠재운것은 운양봉기군의 수장 천이었다. 작의 부고 소식에 운양에서 저항중이던 천이 직접 광릉까지 달려와 수성을 월부흥군의 맹주로 추대하였다.
수성은 슬픔을 참아내며 이를 받아들이고, 천이 이후의 대전략을 알려달라고 하자 수성은 오건 운양이건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월의 지배에 있어 초의 중심거점인 말릉의 점령여부가 이본 봉기의 핵심이라며 천에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말릉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천은 "존명"이라 답하며 응했다.[12]

3.2. 기원전 326년 상황

3.2.1. 월군의 운양진격과 소어의 견제

월부흥군의 맹주로 오른 수성이 기원전 326년에 행한일은 운양점령이었다. 장강의 물길에 위치한 두 지역중 연릉은 이미 부흥군에 합류하였고 운양만이 남아있었다. 수성은 작선장이 지휘하던 수군과 연릉군을 작선장 밑에서 싸웠던 천에게 지맡겨 오를 견제하게끔 하였고, 몸소 광릉군과 회음군 그리고 운양 현지에서 봉기중인 봉기군과 힘을 합하여 운양에 있는 초군을 몰아내기위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말릉에서 월군을 상대하고 있던 소어는 첩자들을 통하여 구 월국의 수도 오성이 점령되지 않았음을 알게되고 반란군이 아직 강동의 반도 제대로 점령하지 못한점을 눈치챘다. 소어는 강북의 월부흥군보다 남쪽의 민월을 더욱 위협적으로 느끼고 우선 절강의 초군을 지원하여 민월을 토벌하기로 하였다.[13]

3.2.2. 운양전투

수성이 이끄는 월군이 운양에 진입하자 대기하고 있던 초군이 요격에 나섰다. 병력의 수는 초군이 우세하였지만 월군은 토착민이었던 만큼 전장에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군이 격돌하기 무섭게 초군의 맹공이 월군을 압도해가기 시작했다. 수전때와 달리 강남에서 육전만큼은 월이 초에게 상대도 되지 못하였고 지금은 정규군이 아닌 반란군이었던 만큼 숙련도 차이도 확연히 드러났다. 결국 월군은 약4할의 피해를 입으며 퇴각하니 남은 병력이 광릉군 8천에 회음군 4천 도합 1만2천이었다.

3.2.3. 오성함락

운양에서 월군이 패전을 당하였지만, 수군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수군을 이끌고 오성 인근을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던 천은 갑자기 오성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성문이 개문되는것을 보고 군사를 몰아 오성으로 향하였다. 도착한 오성에는 천을 기다리고있었다듯 환영하는 이가 있었으니 오의 귀족 가였다. 가는 월국부흥군이 오의 코앞에서 대승을 거두는것을 목격하고 은밀히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을 모아 성을 월군에게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오성을 견제하기 위해 근해에 머물고 있는 월수군을 보자 바로 계획에 들어가 주요시설물에 불을 질러 초군이 화재를 제압하는 사이 성문을 열어 월군을 내부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무혈입성을 이룩한 천과 월군은 보무도 당당히 성안으로 진입하여 잔존 초군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남은 초군들은 항복을 거부하였고 천은 군사들을 몰아 이들을 공격하였다. 1만5천의 오성 주둔 초군은 모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죽었고, 이를 지켜본 천은 어느 놈이고 할 거 없이 눈빛이 전부 맛이 간 것들 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런 천에게 가는 천에게 거울을 한번 보라고 권유하였지만, 천은 싱거운 소리를 한다며 무시하였다.[14]
그렇게 오성은 월부흥군의 손에 점령되었다.

3.2.4. 절강전선 상황

운양와 오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민월군이 담당하고 있는 절강쪽의 초군은 회계태수 유봉의 초준둔은 말릉에서 소어가 보내준 지원군과 능양, 무원의 지원까지 합하여 총 2만2천이라는 대군을 규합하였다. 민월측은 불행하게도 초군이 병력을 한군데로 규합한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북상하여 양군은 고멸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3.2.5. 고멸전투

비록 병력규모는 3배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남방 특유의 정글이 가득한 지역이었기에 정글에 익숙한 민월측은 지형을 활용하여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유봉의 지휘하의 초군은 점차 정글에 익숙해져 반격해가니 이윽고 민월측의 치해가 3할에 가까워졌을때 민월군 지휘관은 망설임 없이 후퇴를 명하였다.
민월군이 물러나지만 아쉽게도 초군은 급속도로 군대 규모를 불려서 기존의 보유하고 있던 물자 이상의 병력이 모인탓에 이이상 움직일수가 없었다. 유봉은 물러나는 민월군을 아쉽다듯 바라보면서 전군에 추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3.2.6. 무원점령

고멸에서 초군과 민월이 다투는 사이 오성을 점령한 천의 월부흥군은 무원으로 진공하였다. 무원은 이미 유봉에게 지원병력을 보낸 상화이었기에 월군을 막을 병력이 없었고, 성주는 무원성의 성문을 열고 투항하였다. 성주에게 무원의 병령이동과 절강의 상황을 전해들은 천은 절강에 상당수에 초군이 몰려있다면 반대급부로 강동지역의 초군이 얼마 없음을 의미하는것이기에 소수의 수비 병력을 가에게 맡겨 오성을 수비하고 나머지 군을 끌고 초군의 지휘부가 있는 말릉으로 향하였다.

3.2.7. 운양의 광릉 진격

월부흥군의 공세를 깔끔하게 물리친 운양군수는 월부흥군이 생각보 오합지졸이라 판단. 승세를 타고 이대로 광릉을 탈환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시에 말릉으로 진격하려던 천의 월군은 배를 모아 말릉으로 향하던 도중 선발 척후선으로부터 운양의 초군이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게되었다. 천은 단번에 초군이 광릉에 공세를 가하는것이라 판단하고 원래의 목적인 말릉공격을 포기. 광릉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3.2.8. 소관성주의 방해

한편 말릉의 소어는 예상보다 반란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재빨리 본국에 상황에 대하여 보고를 올렸다. 문제는 이 보고가 정작 영도에는 상당히 늦게 도착하였는데 평소 소어를 고깝게 여기던 소관성주가 보고를 일부러 늦게 보내 월국령의 피해를 더욱 증가시켜 소어가 문책을 피하기 어렵도록 조장한것이다.

3.2.9. 광릉공방전

운양군수는 8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기세좋게 장강을 건너 광릉성을 목전에 두었다. 공성준비를 마치고 광릉성을 공격하려는 찰나. 후방에서 뒤따라 도하한 천의 월수군이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운양군의 후미를 들이쳤다. 광릉성에서 월수군을 목도한 수성 역시 성문을 열고 뛰쳐나와 공격하니 운양군은 앞뒤로 포위되어 공격당하고 공격군의 4할3푼이 전사하였으며 살아서 운양으루 귀환한 병력은 8백뿐이었다. 사실상 운양군은 궤멸당하였다.

3.2.10. 영도 반란소식을 듣다

소어가 보낸 반란에 대한 보고가 영도에 도착하였고 초왕 웅괴는 크게 당황하며 영윤 소양에게 대책을 물었다. 소양은 바로 이전에 파나라 내전 개입을 위하여 10만 대군을 소집하였기에 또다시 대군을 동원할 여유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대신 초의 동부지역 소관일대 병력을 지원병력으로 보내주는것이 타당하다고 의견을 냈다.
반란 보고가 상당히 늦게 도착하여 이때 적혀있는 내용은 광릉을 중심으로 회음과 연릉같은 소읍이 넘어갔다는 반란 초기상황이었다. 소양은 말릉과 절강 일대의 병력만으로도 제압은 가능하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소관성주에게 출진명령을 내려달라고 하였고, 소양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에 웅괴도 안심하며 두사람의 머리속에 강동반란은 조만간 제압될 소규모 반란이라 판단 머리속 한켜으로 치우게 되었다.

3.2.11. 월의 운양제압과

광릉성 앞에서 초군을 궤멸시킨 월군은 그대로 전병령을 이끌고 운양의 제압에 들어갔다. 운양성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도 항전의사를 내비쳤지만, 기세만으로는 현실을 이길수 없다듯 월군의 첫공격에 그대로 함락되었다.

3.2.12. 소어의 상황파악

한편 절강에 파견나가있던 군사들이 돌아왔을때즈음 소어에게 흉보가 날아오니 회음과 광릉, 운양, 연릉 그리고 구월국 수도 오가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구 월국령의 병력만으로 제압을 확신할 수 있는 범위는 넘었다는 판단하에 소어는 절강군을 이끄는 회계태수 유봉에게 민월과 적당히 휴전 후 오와 연릉으로 북상하라 명하였다. 동시에 소관에 구원을 청하는 사자를 보내 중앙의 지원 명령이 도착했다면 독촉하고, 오지 않았다면 긴급히 구원을 청한다고 요청하라 일러두었다.

3.2.13. 유봉의 무원제압

회계태수 유봉은 오와 무원이 적도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게되었다. 무원의 상황은 알수없는 상황이었지만 유봉은 단호하게 무원에 병력을 적을것이라고 판단[15] 병력 2천3백을 동원하여 무원을 진격 약 5푼의 소규모 피해를 입고 무원을 점령하였다.

3.2.14. 월의 대전략 구상

운양 점령에 성공한 이후 월국 수뇌부는 광릉으로 귀환하여 앞으로 대전략에 대하여 논하였다. 우선 천은 이미 상당한량의 물자를 소비하여 더이상의 올해 이이상의 군사활동은 불가능하며 말릉 비워두고 있던 절강파견군이 돌아왔고 현재 자신들의 병력은 약 9천에 남북으로 오가며 공세를 해왔기에 지쳐있다고 말했다.
맹주 수성은 광릉을 신생 월의 본거지로 삼고, 제와 송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의견을 내비쳤다. 이에 천과 가도 별다른 이론없이 찬성하니 그날 광릉성에서 송과 제로 향하는 사자가 북쪽으로 향하였다.

3.2.15. 송의 참전

월의 구원 요청에 먼저 응답한것은 송이었다. 송공 대언은 운양전투에서 부흥군이 대패한것에 봉기가 실패했다 여겼지만 지속적으로 세력을 넓혀나가는 부흥군의 상황을 사자에게 전해듣고 급히 진남장군 사거를 소환하여 그가 담당하는 거양, 하채 수춘의 병력을 이용하여 초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사거는 갑작스러운 공격명령에 성급하지 않느냐고 생각하였지만 명령은 명령이었기에 종리를 우선 가까운 종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3.2.16. 초와 민월의 휴전성립

소어로부터 민월과 휴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유봉은 민월측과 회담을 가졌고, 민월은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이이상 끼어들지 않겠다고 하였고 유봉은 그 조건을 받아들여 초와 민월간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유봉은 이 휴전을 일시적인것이라 생각하였고, 강동쪽 반란이 진압되는데로 최소한 복속, 불가능하다면 민월의 무력화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3.2.17. 소관성주의 고의적 늦장

소어의 사절이 소관성주에게 강동의 반란상황이 심각하다며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성주는 이미 소어를 곤욕에 빠뜨리기로 결심하지 오래였기에 자신의 관할구역을 넘는 병력운용은 위험부담이 크다며 거절하였다. 소관성주의 소인배 행보에 초는 반란군을 진압할 귀중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3.2.18. 제와 한의 참전

송이 월부흥군 지원과 남쪽방면 확보를 위해 움직이자 이는 곧바로 한의 첩보망에 알려졌다. 한왕 한강은 곧바로 송공 대언에게 사자를 보내어 한나라 역시 이번 작전에 도움을 주겠다며 합동으로 움직일것을 제안하였다. 한왕이 보낸 서신의 내용은 정중하게 전우이자 동맹인 송과 함께 하고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16] 대언은 한왕의 성격이 뒤에서 수작을 부릴정도인 인물이 아님을 알고 초각 적인 이상 한과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것이 없었기에 이 제안을 받아드렸다.
한편 월부흥군이 보낸 사자를 통하여 강동의 봉기 상황을 알게된 제왕 전인제는 월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송과 한을 동원하여 초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또 만약을 위하여 전반에게 수송부대 2천4백을 맡겨 한송 연합군을 돕도록 시켰다.[17][18]

3.3. 기원전 325년 상황

3.3.1. 오성 공방전

민월과의 휴전이 성립되자 유봉은 절강군을 재정비하여 8천2백의 군사를 이끌로 오성으로 진격하였다. 오성에는 가가 이끄는 월부흥군 4천4백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공성전이 벌어졌지만 초전의 기세는 월군이 가져갔다. 비록 멸망하였지만 그래도 일국의 수도였던 성이었던 만큼 방비가 단단하고 지세가 험하여 초군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볼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봉은 그사이 오성의 빈틈을 발견하고 사정없이 후벼파니 점차 수성측인 월군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월군의 기세가 많이 죽고 곧 함락될것처럼 보이자 유봉은 사자를 보내어 항복하면 주모자와 그 일가친척 이외의 단숨가담자에 한해서는 살려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오성 공방전은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3.3.2. 운양전투

오성에서 한창 공방전인 와중 말릉의 소어 역시 강북지역의 월군 격멸을 위하여 말릉 주둔군 1만2천을 이끌고 월군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운양을 공격하였다. 운양에는 천이 이끄는 월수군 9천이 수비중이었다. 천은 운양을 점령한 시기가 짫아 운양에 대한 파악하지 못하였고, 섣불리 운양성안에 들어가 수성시 저 대군이 광릉으로 향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어 성밖으로 나와 야전을 시도하였다.
운양성 앞에서 펼처진 회전에서 초전을 가져간건 초군이었다. 결국 제대로 훈련 받지 않는 월군이 지형과 날씨 모두 파악한 정규군인 초군을 상대로 어떠한 기책없이 정면에서 싸우는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번의 접전으로 2할7푼의 월군이 사상을 입자 월군은 무너지듯 흩어지고 안개[19] 너머로 사라졌고 승리했다고 여긴 소어에게...
갑자기 후방에서 월군이 나타난 초군이 강습하기 시작했다. 천의 동료인 통이 수성이 이끄는 광릉군을 안내해 안개를 뚫고 초군의 후방으로 안내하였고, 승전에 취해 방심하고 있던 초군의 무방비한 후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월군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한번의 강습으로 2할의 초군이 전사하자 소어는 더이상의 싸움은 무리라고 판단 말릉으로 퇴각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 퇴각하였다고 여긴 천의 월군이 안개속에서 뛰쳐나와 물러나려는 초군을 붙잡자 초군은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맹공을 당하였다. 하지만 순수 병력의 수와 숙련도에 의해서 포위망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소어는 8푼의 전사자를 내면서 간신히 남은 병력 9천을 수습하여 말릉으로 퇴각하는데 성공하였다.

3.3.3. 연합군 결성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의 후 송의 수춘에서 대부 사거와 장군 한거가 전략을 논의하기 위하여 수춘에서 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직전 제나라에서도 약간의 병력과 사람을 보낼테니 함께하자는 연락이 들어오니 두사람은 제나라가 젊은 왕족 한명에게 공을 세워주기 위한것이라 지례짐작하고 있었다. 사거와 한거가 그렇게 상층부를 욕하고 있는 사이 제나라측 사람이 회담장에 등장하니 바로 제나라의 쌍검중 한명인 전반이었다. 전반의 등장에 사거와 한거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당황하는 사이 전반은 스스로를 낮추며 일개 치중대 관리자니 참관만 하겠다고 하였으나 사거와 한거 모두 이구동성으로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며 대우하자 전반은 어쩔수없다듯(?) 회의를 주관하였다.
이때 수춘에 결집한 연합군의 전력은 한군 2만5천, 송군 3만, 제군 2천400 도합 5만7천의 병력이 집결하였다.[20][21] 전반은 우선 연합군을 초나라 종리로 진격시켜 소관의 병력을 유인해 섬멸할 계획을 세우는데, 크게 두가지의 이점을 들었다. 하나는 소관의 병력을 없앰으로서 강동전선에 급파할수있는 초의 지원군이 소멸하고 다른 하나는 월국령을 제외한 초나라 본령 동북부의 억제력 소멸 시킬수 있다는 점이었다. 전반의 전략에 사거와 한거 모두 동의하니 연합군으 곧 종리를 향해 진격하였다.

3.3.4. 믿을만한 송나라 부관

전반은 대략적인 전략이 세워지자, 곧 미끼용 부대를 차출하기 위하여 연합군중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송의 사거에게 믿을만한 장수가 있는지 물었다. 이에 사거는 아쉽지만 미끼 부대를 지휘할만한 인재는 없다고 답변하였다. 전반은 이에 어쩔수없다듯 사거에게 송군 1만과 믿을만한 부관 한사람을 차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본래 전반 자신은 나서지 않고 전략만 세워줄 생각이었지만, 대전략이 어그러지는것을 막기위하여 궁여지책으로 송나라 부관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지휘하기로 한것이다. 이에 사거가 스스로 입을 여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것을 택할 부하를 차출하겠다고 답변하면서 전반이 요청한 병력 1만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전반의 직송 2천과 송군 1만. 도합 1만2천이 소관의 부대를 유인하기위한 미끼용으로 종리를 향해 나아갔다.
사거가 차출한 부관은 뒤에서 변장한 전반의 지시대로 종리를 공격하였다. 비록 부관이 많이 어설퍼 약간의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미미한 수준이었고 전략적인 목적은 달성하였다. 종리를 수비라는 초나라 장군이 송나라군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소관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었다. 전령은 전반이 일부러 허술하게 꾸민 포위망의 허점을 노려서 빠져나가고 전령이 빠져나간 사실을 들은 전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3.3.5. 소관성주 덫에 걸리다.

종리에서 구원을 청하는 전령이 소관성주에게 도달하였다. 전령은 송군 1만9천 즉 약 2만의 병력이 종리를 공격하고 있다며 구원을 요청하였고, 2만의 병력이라면 종리만으로는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린 소관성주는 순간 말릉에서 소어가 보낸 구원요청을 상기하고 이번 종리구원을 핑계삼아 조정에 말릉구원요청에 응하지 못하였다고 변명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소관에 주둔중이 병력 3만을 이끌고 출전하려 하자 부관이 당황하며 관을 완전히 비우는것은 위험하니 소수의 수비병력 2천이라도 남기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소관성주가 도리어 불같이 화를 내며 네가 대장이냐? 내가 대장이냐? 라며 탓하자 부관도 더는 어쩔수없다듯 물러나니 그렇게 소관의 전병력 3만이 출진하게 되었다.
그것이 저승으로 향하는 길인지도 모른채...

3.3.6. 무능한 사거와 연합군의 위기

소관의 병력이 출진하자 미리 첩자들을 보내 감시하고 있던 연합군에도 이 사실이 알려졌다. 곧 3군은 매복하기로 한 지점으로 집결하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송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것이었다. 전반이 대노하며 송군과 사거는 어디있냐고 호통을 쳤지만, 도착하지 않은 이를 향해 소리쳐보았자 헛수고일 뿐이었다. 한거는 한군 2만5천과 전반이 이끄는 1만2천 도합 3만7천이면 그래도 병력은 우위이니 이대로 싸우자고 제시하였다. 이에 전반은 그렇게 되면 당초의 목적인 소관병력 섬멸이 어그러진다며 포위진을 수정하였는데 일부러 송군이 다가올 서쪽 방면을 비워두고 초군이 후퇴하면 진군하는 송군을 만나도록 포진을 다시 짰다. 그리고 포진을 다시 짜고 숨어있는 양군의 시야에 아무것도 모른채 다가오는 초군이 포착되었다.

3.3.7. 종리전투

스스로 사지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소관성주는 말릉의 소어가 곤경에 처할 상상에 흐믓해하면서 부관에게 적부대의 위치를 물었다. 이에 부관이 종리성 이근 8리에 있다는 보고를 할려는 찰나 정찰병이 황급히 다가와 재차 건넨 보고서를 보고 당황하며 적군이 사라졌다고 정정하였다. 소관성주가 당황하며 부관을 나무라자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며 숨어있던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합군은 전반의 지휘화에 포위망을 완성하고 초군을 공격하였으며 초군은 소수의 병력만이 와해된 상태로 서쪽으로 도주, 나머지 대부분이 포위망에 걸려들었고 이내 전반이 이끄는 치중대가 앞장서서 초군을 도륙하며 나아가 소관성주의 목을 베니 초군이 항전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하였다.[22] 한편 도주하는 초군 3천은 도중 황급히 달려오는 송군의 사거에게 발견되어 그 절반이 사로잡히거나 죽어서 사거의 전공이 되었다.
도주하던 초군을 잡아서 뒤늦게 달려온 사거에게 전반은 정체가 밝혀지면 안 되는 처지상 아무 말도 할 수는 없지만, 이번 전공은 모두 한군에게 몰아주겠다 선언하였고 사거도 군말없이 동의하였다. 그렇게 소관의 병력이 괴멸당하자 한거는 종리성주에게 소관성주의 머리를 보이며 지원군은 오지 않으니 항복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리성주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초의 신하에게 항복은 없다! 라고 답하였다.

3.3.8. 오성함락

오성의 가는 항전을 지속하였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대로 기운 상태였다. 결국 성문이 열리기 직전 가는 전군에게 살아서 항전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리고 그 자신도 성을 빠져나갔다. 성을 점령하였으나 월군의 반수 이상이 성에서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유봉은 즉시 추격대를 편성하여 도망친 잔당군을 쫗으니 결국 월부흥군은 괴멸하고 가 역시 초군에게 전사하였다. 그렇게 오는 다시 초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유봉이 오성에 시선이 가있는 사이 휴전해서 재정비를 하고있던 민월은 세력을 재정비하여 병력 6천3백을 동원하여 절강으로 진격하였다. 민월이 재차 북상하자 회계내의 유력자들이 초에 협력할지 민월에 협력할지 논의에 들어갔지만, 초군이 다시 오와 무원을 회복하였다는 소식에 대부분이 초에 협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부가 민월과 협력하여 다시금 월의 부흥을 천명하자고 제시하였지만 곧바로 제거당하였고 결국 절강은 침묵에 들어갔다.

3.3.9. 종리함락과 전반의 복귀

종리성을 포위한 연합군은 무리하지 않고 포위망을 좁혀가며 공성에 임하였다. 여기 전반이 끌고온 치중대가 활약하였는데, 종리성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치중대를 이용해서 방자의 사각을 만든 후 그 사각으로 한군과 송군을 침투시켜 곧 성이 함락되었다. 덕분에 종리 공방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연합군의 피해는 사실상 없었다. 종리성을 공략한 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주력이 괴멸한 소관의 접수였으나 전반은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면 대전략을 세워준 후 치중대를 이끌고 제나라로 복귀의사를 밝혔다. 사거와 한거 역시 이미 초군의 주력은 끝장내었고 나머지는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하다여겨 전반의 복귀를 내심 반기었다.

3.3.10. 한송연합군의 쾌진격

전반이 돌아가자 사거는 한거에게 소관의 점령은 송이 맡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실제로 소관은 송의 영역과 가까웠고 이전 전투에서 큰활약을 펼치지 못한 사거는 공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거는 사거의 속셈이 보였지만 한이 소관을 점유해도 영유하기 어려웠기에 사거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한거와의 협의가 끝나자 사거는 송군을 나누어 7천으로 소관을 점령하고 나머지를 종양으로 진격시킬 계획을 세웠다.[23] 이윽고 별동대가 소관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사거는 직접 2만3천을 이끌고 장강 북안까지 진격하였다. 마침 사거가 이끄는 군대는 오랫동안 수춘에 머물러 있었기에 풍토병에 적응한 상태라 진격에 무리는 없었다.
한편 한거는 첨현을 공략하기 위해 남하하였는데 가는 도중 육현이 항복하고 우루현 역시 한군에 투항할 뜻을 보여 한거는 첨현의 공략이 더욱 쉬워졌다며 미소를 지었다.

3.3.11. 영성에 도달한 비보

초 조정에서는 슬슬 반란군 토벌에 관련된 장계가 올라와야 하지 않냐며 한가롭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 말릉에서 소어가 보낸 전령이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도중 소관성주의 방해로 전혀 엉뚱한곳에 헤메고 있다가 완대부 경취에게 발견되어 영성으로 올수 있었다.
강동의 반란은 제압 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져버렸고 거기에 한까지 남하하였다는 보고에 조정은 크게 술렁거렸지만, 영윤 소양은 침착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한이 남하하였다면 송도 같이 움직였을것이라 판단. 즉시 완대부 경취에게 맹새와 서양의 병력을 이끌 권한을 주어 한송 연합군을 요격하라 명령하고, 굴개에게 반란군 토벌을 명하면서 수보다는 빠른 기동과 숙련도를 중심으로 조직하라 명하였다.
명령을 받은 두사람이 왕성을 나올때 경취는 문득 소관성주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여기며 만약 소관성주가 반란군측이라면 사자를 베어버리고 바로 반란군측에 합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것은 승승장구 하고있는 소씨에 대한 시기심으로 이런일을 벌이지 않았나 예측하였다.[24] 또한 마침 남하하고 있는 한송연합군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를 핑계삼아 움직였을것이라는것 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였고 이를 듣고 있던 굴개 역시 타당하다 여기며 말릉이 위태로우니 서둘러 움직여야 겠다고 답하였다.

3.3.12. 첨공방전

한군이 첨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한군 2만5천과 한에게 투항한 육현의 지원병력 1천2백 도합 2만6천이었고[25] 첨성의 초군 수비대는 6천이었다. 첨성주는 4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열세의 상황에서도 한군에게 1할의 피해를 입히는 활약을 하였지만, 결국 숫적 열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3할3푼의 피해를 낸후 한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렇게 첨성 마저 한군에게 점령당하였다.

3.3.13. 오성 방화

오성에 주둔중이었던 유봉은 민월이 휴전 약속을 어기고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불행히 그 규모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에 유봉은 부관에게 오성에 여유병력을 남길수 없고 적이 이 성을 다시 이용해서도 안된다며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다. 이에 부관이 당황하자 유봉은 단호하게 재차 명령을 내리며 추방명령을 내리고 따르지 않은자는 참하라고 추가 명령을 내렸다. 결국 부관이 어쩔수없다듯 물러나 명령을 시행하니...
오성 내부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초군의 추방령에 응하지 않은 월인들이 때죽음을 당하였고, 추방을 선택한 이들도 대부분 절강방면을 끌려가고 남은 이들은 유랑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월국의 수도인 오성은 잿더미로 화하게 되었다.

3.3.14. 회계전투

오성을 불지른 유봉은 절강의 초군 협력세력을 이용하여 북상하는 민월군에게 거짓정보를 보냈지만, 민월측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역으로 이용하여 유봉이 이끄는 군의 규모를 파악하였다.[26] 적군의 규모와 위치를 파악한 민월군 장군은 회계로 진격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전투에 들어갔다. 초전은 자신의 앞마당이었던 만큼 초군이 유리해보였지만, 고지를 차지한 이점에 점차적으로 전세는 민월측으로 기울어져 갔다. 유봉은 아군이 불리하였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절강의 세력들이 곧바로 민월측에 합류하는 상황이었기에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3.3.15. 종양의 항복과 경취의 전략수립

송군이 종양을 포위하자 현령은 사거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고 성문을 열어 투항하였다. 사거는 자군의 막강함을 찬양하며, 승전의 표시로 장강의 물을 떠서 송공에 보내겠다며 기고만장하였다.
한편 완대부 경취는 맹새에 도착하여, 소양에 받은 명령서로 병력을 소집하니 도합 4만3천의 군대가 맹새에 집합하였다. 그사이 첩자를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니 소관이 깨지고 첨 일대가 무너졌다는 사실까지는 파악하였다. 더불어 한송연합군의 대략적인 병력과 위치를 파악하자 경취는 역정보를 풀어 한과 송을 서양쪽으로 끌어들인 후 각개격파를 노렸다.[27]

3.3.16. 월국부흥군의 전략 수립

작년 대대적인 공세와 기동으로 재정비를 마친 월부흥군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오성이 절강군에게 철저히 파괴된후 절강군이 회군하였다는 소식이 오성에서 도망친 피난민들을 통해서 알려졌다. 수성은 오성에서 모여오는 피난민들을 있는대로 받아들기로 결정하자 통이 도저히 모든 수용민들을 받을수 없다며 재고를 요청하였지만, 수성은 유민 가운데 배를 몰수있는 사람을 별도로 뽑아서 유민들을 배에 태워서 강북의 광릉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절강군이 회군하였으니 말릉만 점거하면, 초의 본대가 오기전에 형세를 굳히고 월의 완전한 부활을 노릴수 있다며 전력을 다해 말릉을 차지하기로 정했다.

3.3.17. 소어의 대응

한편 말릉의 소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본국으로부터의 원군 소식을 받게되었다. 중군사마 굴개가 이끄는 1만3천의 정예군이 악현까지 도달하였다는 소식에 소어는 이대로 포위되면 자칫 월군에 둘러싸여 포위당해 원군이 오기도전에 당할수 있다 여겨 말릉을 포기하고 원릉으로 후퇴해 중강을 경계로 반란군에 대응하기로 하였다.

3.3.18. 사거 기사로 진군

소관과 종양을 점거한 사거는 더이상의 진공을 삼가고, 초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초군이 예상되는 맹새와 서양방면으로 올것이라 확신하고 소관에 7천 종양에 8천을 남겨 말릉과 수로의 초군을 견제하고 자신은 남하하여 기사를 점거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강에서 싸워본적이 전혀 없는 사거가 관이라는 사실 하나만 믿고 애매한 병력을 남긴것이다.

3.3.19. 경취 서양에 도착

경취가 지휘하는 혼성군은 서양에 도착하였고, 첩자를 통하여 한군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경취는 서두루지 않았다. 자신의 직속인 완부대와 달리 맹새와 서양방면군과 합이 전혀 맞지 않는 상황에서 싸울수는 없었기에 우선 삼군의 합을 맞추기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한편 경취가 흘린 거짓정보가 한거에게도 들어갔는데 한거는 경취의 의도를 파악하고, 제대로 방비되고 있는 성과 요새에 굳이 한군 단독으로 들이받아줘야 하는 이유는 없다며 기사로 진군하였다.

3.3.20. 민월의 절강점령

회계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하고 드디어 결착이 났다. 승자는 민월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효과를 보았고, 유봉의 절강군이 반란 초기부터 연전으로 싸워온탓에 크게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막판에 대패한 절강군은 와해되었고 유봉은 무원으로 도주하였으나, 이미 기울대로 기운 상황에 휘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유봉을 목을 베고 민월군에게 투항하니[28] 민월은 절강지역의 점령에 성공하였다.[29]

3.3.21. 월부흥군 말릉을 점령

소어가 말릉을 버리고 퇴각직후 월부흥군이 말릉을 점거하는데 성공하였다. 비록 소어가 가져갈수있는 물자란 물자는 모두 가져갔지만, 성은 그대로였기에 거점으로 활용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그렇게 월국부흥군이 드디어 중강과 진택 이북의 영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3.3.22. 굴개의 진격

팽택에 도착한 굴개의 토벌군은 송군이 종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굴개는 이에 송군을 요격해야 하는가 고민하였지만, 3년간 이어진 반란이니 반란군이 우세할리 없으며 출발직전 경취가 해준 조언을 상기하고 경취의 능력이라면 능히 한과 송을 막아낼수 있으리라 믿고 그대로 강동으로 진격하였다.

3.3.23. 초조정 민월과 타협하다.

한편 영성에서 한가지 안건을 두고 논의가 벌어졌는데, 영윤 소양이 후계자라 자랑하던 굴평이 의견을 내놓으니 바로 민월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타협하자는 안건이었다. 평소 굴평을 아끼던 소양마저 민월을 인정한다는것은 절강을 내놓는다는 것이기에 받아들일수 없다고 답하였다. 굴평은 이에 현재 전력만으로 강북, 강동, 절강 모두를 제압할 수 없으며, 싸움을 길게 끌면 끌수록 속령이 월국지역을 위하여 본령의 여력이 소비되는것은 옮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민월이 차지한 절강보다 장강유역이 더 중요하니 민월과 타협하여 이 싸움을 끝내고 안정시키는것이 초를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소양이 굴평의 말이 옮다고 여겨 자세한 방법을 논의하니, 월측과 민월에 서로 상반된 흑색선전을[30] 하여 이간질을 유도하도록하였다. 또한 절강에 주둔중인 회계태수 유봉을 승진시켜 절강주둔군의 불만도 무마시키자고 덧불혔다.[31]

3.4. 기원전 324년 상황

3.4.1. 굴개 능양에 도착하다

강동으로 향하던 굴개가 평택에 도달하였을때 조정에서 보낸 사자간 급한 전갈을 들고왔다. 그 내용은 민월과 협상하고 반란군 토벌에만 집중하라는 왕명이었다. 굴개는 조정의 명령이 마뜩치 않았지만 왕명을 거역할수는 없었기에 수긍하고, 다시 강동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였다.[32] 이윽고 능양에 도착한 굴개는 허탈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말릉을 지키고 있을줄 알았던 소어가 말릉의 물자와 병력을 가지고 원릉이남으로 도주하여 이미 말릉은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굴개가 소어에게 지금 당장은 처벌하지 않겠으니 반란군 토벌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며 소어의 원릉군 9천을 거두어 총합 2만1천을 이끌고 말릉으로 향하였다.

3.4.2. 민월 향방을 정하다.

굴개에게 민월과 타협 명령을 전달한 전령은 그대로 절강의 회계성으로 달려가 태수 유봉을 부르지만 이미 회계성은 민월이 점령한 이후였다. 민월이 회계성을 점령했다는 사실에 사자는 분개하며 돌아가려 하였으나, 민월군이 주변을 포위하여 모두 사로잡혔다.
민월의 상층부는 사자가 격하게 곧 대군이 몰려와 너희들 모두 주살할것이다 라며 소리치자, 초나라가 자신들과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여겨, 사자들을 모두 주살하여 밀림속에 버리고 월을 방패 삼아 견디되 만약 전황이 초에게 유리할시 회계태수 유봉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일어난것이라 변명할 계획을 세운다.[33]

3.4.3. 송한 결별

기사에서 한군과 합류한 송군이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늦은 날짜에 합류한탓에 한거는 사거에게 늦은 사유를 물으니, 산맥을 죽 따라가다 중간에 길을 잘못들어 늦었다고 답변하였다. 사건의 한심한에 한거는 속으로 열불을 내며 이대로 송군과 함께 싸우다가는 이길싸움도 질것이라 생각하고, 사거에게 송군의 지휘권을 내놓으라고 강권하였다. 이에 사거가 크게 반발하자 한거는 그렇다면 한군은 이대로 물러나겠다며 첨으로 되돌아갔다. 사거는 한거의 행동에 괘씸함을 느껴서 한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한거는 송군의 점령지역을 약탈하고 동시에 한왕과 송공에 현지 사실을 알리는 전령을 보내었다.
한편 서양에 주둔중이 경취는 기사성에서 송군이 도착하자 한군이 성밖으로 나왔다는 첩보를 듣고서는 크게 웃으며 부관에게 전투준비를 서두루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부관이 사유를 묻자 경취 왈 그럭저럭 된 놈이 떠나고 덜떨어진 놈이 성에 남았다. 이건 내분에서 덜떨어진 놈이 이겼다는 뜻이니 지금 공격하면 크게 이기리라 면서 4만3천의 군을 이끌고 기사현으로 진격하였다.
초군이 움직이자 돌아가던 한거가 이를 알고 급히 병력을 되돌려 기사로 향하였다.

3.4.4. 말릉 공방전

소어와 합류한 굴개의 초군 2만1천이 말릉성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월군이 진격해오는 초군을 방해할 목적으로 여러장치를 해두었고 이것때문에 약 1천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사기 또한 저하되었다. 그러나 굴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말릉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니 말릉성 공방전이 개시되었다.
의외로 공방전은 초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시작되었다. 말릉성을 관리하고 있던 소어가 굴개를 보좌하며 성의 약점을 알려주고 굴개가 이를 바탕으로 지휘하여 공세를 가하자 수비측인 월군의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지리적 이점을 가지지 못하고 녹초가 되어 지켜있던 월군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 전체 1만1천 중 반수가 전사하였고, 수장인 수성을 비록한 천, 통이 결사항전 와중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길 수 없다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
잊지마라.
월의 형제자매들이, 여기 있었음을!
-천의 유언
그렇게 기원전 324년 월은 다시 초에 의해서 멸망하였고 부흥군 수뇌부가 전사함으로서 월부흥의 기치는 완전히 꺽이게 된다.

3.4.5. 기사 공방전

송과 한이 결별하여 한군이 기사성에서 나온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취가 이끄는 초군이 기사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송군은 기사로의 진격과 기사성에서 보여준 사거의 무능함에 사기가 떨어져 있었고 기사성도 이전 공방전으로 손상되어 있어 결국 사거는 피해가 3할에 근접[34]하자 기사성을 버리고 수춘으로 퇴각하였다. 경취는 도주하는 송군을 보고 약간의 정예병력만 보내어 추격하여 4푼의 피해를 추가로 입히고, 진짜 적인 기사로 회군하는 한군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3.4.6. 1차 기사전투

서둘러 기사로 향한 한거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이미 기사성이 초나라군에게 떨어지고 초군이 진형을 펼친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당황하였다. 경취는 성문 밖에 포진하여 이미 주변 지형파악까지 끝난 상황이었으나 다급히 달려온 한거쪽은 급속한 진군에 지쳐있고 주변지리 파악도 못한 상태였다.
경취가 곧바로 진격명령을 내리고 한거가 대응하였다. 시작부터 초에게 매우 유리한 싸움이었기에 전체적 전황은 초군에게 유리하였지만, 한거 역시 그냥 당하지 않겠다듯 대응하여 초군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35] 결국 양군의 싸움은 도중에 기사성내에 대기하고있던 신임 기사성주가 증원군을 이끌고 나오자 한거는 자칫 포위될것을 염려하여 수춘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한군이 도주하자 초군이 추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한거는 무사히 퇴각에 성공하였다.

3.4.7. 한송연합군 재결성

수춘에 성공적으로 후퇴한 한거는 곧바로 수춘성내의 송군과 재결합하였다. 송군은 그들의 장군인 사거의 무능함에 질려있어서 한거가 수춘으로 오자마자 사거가 부상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점을 이유로 지휘권을 한거에게 넘김으로서 한송연합군이 재결성되었다.

3.4.8. 송나라 내부의 반란

곧 송조정에 수춘의 상황이 전달되었으나 송공 대언은 수춘방면으로 군을 옮길수 없었다. 그동안 송공의 변법개혁에 서현과 능현의 귀족들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대언은 먼저 반란군을 진압하고 그 이후 수춘으로 향하기로 방향을 정하였다.[36]

3.4.9. 한과 제의 추가 증원

한 역시 한거가 보낸 전령으로 상황을 인지하자 지금의 형세를 굳히기 위하여 추가 파병을 결의하였고, 제나라 진태수 전거는 진에 부임하기 이전 전인데로 부터 재량권을 부여받은것을 상기하고 초의 견제를 위하여 진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남하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3.5. 기원전 323년 상황

3.5.1. 한과 제의 증원군 파병

수춘으로 증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심한 양국은 각각 한이 1만6천. 제군이 1만2천 총합 2만8천의 군세가 수춘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진격도중 전거는 송의 반란 진압이 예상보다 지지부진한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니, 자기 휘하 병력중 8천을 송의 반란진압에 투입하여 송의 반란 진압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에 한나라 까닭을 물으니 전거는 이번 반란이 시간을 꽤 끌었지만 결국 민병대 수준의 월군은 금새 진압되고 초군이 북쪽으로 전력을 다하면 연합군 2만8천으로 전세를 휘어잡기는 요원하다고 여겼다.
결국 더 병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송공이 이끄는 1만9천의 병력이 절실하니 서둘러 반란진압을 지원하여 단숨에 대군으로 치자는 의견이었다.
한측은 전거의 전황 파악에 감탄하며 이에 동의하니 전거의 8천 정예병력이 빠르게 서현으로 진격하였다.

3.5.2. 초조정의 현황파악

한편 초조정은 기사에서 경취가 한송연합군을 상대로 크게 이긴것과, 굴개의 강동제압이 순조롭다는 길보가 알려져 크게 고문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경취가 보낸 사자가 당도하여 한나라가 2만의 증원병을 보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소양은 형세를 굳히기 위하여 1만8천의 지원군을 보내는 한편 강동을 제압중인 굴개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민월과 조속히 협상하여 강동을 정리하고 굴개 개인의 판단하에 송과 한을 견제하라고 명령한다.

3.5.3. 굴개의 강동제압

말릉을 제압하고 월부흥 수뇌를 모두 처리한 굴개의 초군은 주변일대 제압에 나섰다. 이에 광릉과 운양이 항복하였으나, 회음과 연릉이 답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굴개는 본보기로 오를 공격하여 항복하지 않은 지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오로 보낸 정찰병들이 오성이 전소되고 폐허만 남았다는 소식을 들고오자 굴개는 즉시 오에서 피난온 피난민들을 붙잡아와 심문하여 회계태수 유봉이 오성을 불태웠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3.5.4. 송제연합군의 서현제압

반란 진압에 애먹고 있던 송공 대언에게 제의 전거가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도우러 왔다는 소식은 가문의 단비와도 같았다. 반대로 반란군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는데 지금의 형국도 반란군이 정면싸움을 피하고 발목잡기에 주력해서 이끌어온 형국이었다. 거기에 제군이 가세하니 균형이 깨지고 서현이 제압되기에 이르렀다.
전거는 서현 제압후 송공에게 어찌할지 묻자 대언은 그대로 능현으로 진격하여 이참에 반란을 뿌리뽑기로 결심하였다. 전거가 놀라서 송공에게 원래의 목적을[37] 상기하라 조언하였지만 반란제압에 눈이 돌아간 대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편 반란군은 다급해지자 결국 초나라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먹고 회음으로 사자를 보내었다.

3.5.5. 초와 민월의 협상

굴개의 무력시위에 회음이 항복하였지만 연릉은 거부하였다. 연릉의 월군 잔당은 민월이 도와줄것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버티기로 하였지만, 이때 민월은 진작에 이들과 손절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곧 민월측의 사자가 굴개를 찾아와 회계태수 유봉의 전횡에 참다못해 일어났을뿐 딱히 초에 반항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며 협상을 요청하였다.
이에 굴개는 민월이 점령한 절강 이북의 무원과 회계, 구장을 돌려받고 절강 이남을 민월이 차지하는것과 연릉에 주둔중인 월군 잔당을 민월측이 처리하는것으로 협상을 맻었다.

3.5.6. 송 반란제압, 수춘으로 진공

송제연합군이 예상보다 빨리 능현에 진입하자 반란군은 즉시 송공 대언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의 의사를 내비쳤다. 대언은 속으로 천불이 끓어올랐지만, 반란 진압에 많은 시일을 끈탓에 수춘의 지원이 늦어지는것을 우려 반란군의 항복을 받아드렸다.
그렇게 송 내부의 반란이 진압되자 송제 연합군은 다시 수춘으로 진격하였다.

3.5.7. 경취와 한거의 수싸움

영도에서 보낸 지원군 1만8천과 합류한 경취는 수춘 탈환 이전에 싸움에 도움이될 지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군대를 쪼개 수춘 각지로 파견하여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 탈환에 나섰다. 연합군 지휘관 한거도 이에 대응하여 거리상 초군과 가까운 첨지역에 병력을 파견하여 방어에 나섰지만, 경취가 첨쪽으로 가는척 하면서 샛길을 통해 후방인 종양과 종리쪽에도 군사를 보내어 점령하니 한거가 놀라 급히 후방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분산되자 경취의 초군에 의해 첨의 수비군이 분쇄되고 첨이 점령되면서 수춘이 초에 포위되는 형국이 완성되었다.

3.5.8. 3국연합군 수춘에 집결

한거가 힘겹게 경취와 싸우는 사이 송공 대언과 전거가 이끄는 연합군이 도착하여 수춘에는 도합 6만7천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수춘에 집결한 연합군은 먼저 기사를 탈환하기로 결정하고 수춘에 종리의 초군을[38] 견제할 약 5천의 병력 남겨두고 남은 6만2천으로 기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3.5.9. 2차 기사전투

수춘의 연합군이 기사를 진공할때 민월과 협상을 마친 굴개는 점령당한 소관 탈환을 위하여 움직였기에 기사에 주둔중인 경취에게 원군은 없었다. 정찰병을 통해서 6만대군이 기사로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종리에 주둔중인 군대에 연락해 돌아오라 지시하고 자신은 4만6천의 군사를 이끌고 기사성에서 나와 야전에서 연합군을 상대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윽고 기사성 앞에서 양측 도합 10만의 군대가 마주치고 2차 기사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의 시작은 연합군측의 선공에 시작되었다. 초나라 땅이었지만, 최근 한군에게 점령되었던 지역이었기에 한거가 지형파악을 적절히 해두었고 연합군 총사령관인 대언은 지금까지 경취가 상대해왔던 적과는 차원이 다른 군재의 소유자였다.
난생처음 전장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긴 사실과 중군에 걸린 송공실의 깃발을 보고 경취는 자신의 상대가 그 유명한 대언이라는것을 파악하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체적으로 연합군이 유리해보였지만, 연합군에도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연합군이라는 사실과 합을 전현 맞춰보지 못한 상황이라는것이다. 이 약점은 전투에 들어서자마자 여실히 보여주었고 초전의 싸움은 초군이 유리하게 진행되어갔다.
경취는 매서운 눈썰미로 상대가 전혀 합이 맞춰지지 않은 세개의 큰덩어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즉각 제일 약해보이는 좌측에 돌격하여 상대 진영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언이 대응해보지만 대언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고 연합군의 피해는 커져가며 좌군을 실컷 유린한 경취가 다음에 연합의 선봉을 공격하니 점점 연합군 진영이 무너져 내려갔다.
여기에 종리의 1만 초군이 수춘의 견제를 뚫고 연합군 후방에 등장하자 전세를 완전히 기울었다.
대언은 이이상 싸움은 무리라고 판단 전군에 퇴각령을 내리며 자신은 친위대를 이끌어 직접 후방에 등장한 초군을 향해 돌진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연합군을 경취가 추격하자 한거의 한군이 역으로 돌격하여 막아서니 이내 양군 장수가 조우하여 장군전을 벌이게 되었다. 경취와 한거의 싸움은 이내 경취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한거는 의식을 잃고 포로로 붙잡혔으나 그사이 포위를 뚫는데 성공한 연합군은 무사히 수춘으로 퇴각하였다.
그렇게 2차기사전투는 초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4.1. 종전협상

2차 기사전투 이후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은 기원전 323년 가을을 기점으로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하고 종전협상에 임했다. 이 대전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이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간 파종을 하지 못하여 심각한 상태에 직면하였다.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기에 모든 국가들은 별다른 조건을 두지않고 종전에 동의하였고 한과 초가 서로 붙잡은 포로를 교환하는 정도가 추가되었다.[39]

4.2. 초의 논공행상

미증유의 위기를 벗어난 초나라 조정이었지만 영윤 소양은 극도로 분노한 상태로 말릉군수 소어를 초왕과 신하들이 보는 대전 앞에서 죽일기세로 패기시작했다. 소어는 그저 용서를 구하며 맞기만하자 보다못한 굴개가 나서서 소양을 말리고 그사이 굴평이 소어를 대리고 대전을 빠져나가서야 이 촌극이 마무리 되었다.
소양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듯 노기를 거두지 않자 굴평이 먼저 논공행상을 치루자 제안하였고, 소양은 이 사태를 책임지는 모양을 보이기위해 본인의 지위를 상주국으로 낮추었다. 전투에 큰공을 세운 경취는 주국[40], 반란을 진압한 굴개를 삼려대부[41], 적절한 조언으로 반란진압을 도운 굴평을 좌도[42]에 임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소어의 처분에 대한 논의 들어갔는데, 소양은 파직과 유배를 내리려 하였지만 굴평이 좌도로서의 권한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강등으로 낮추었고 그렇게 최전선 기사에 부임하게 되었다.[43]

4.3. 월의 부흥 사라지다.

월부흥군 본대가 괴멸되었지만 소수의 병력이 분산되어 연릉에서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민월이 자신들을 도울것이라 여겼지만, 민월은 이미 초와의 협상으로 이들을 처리하기로 하였다. 기원전 323년 8월, 민월은 초를 대신해서 연릉을 진압한 이후 잠에서 봉기한 월국부흥세력의 진압에도 성공했다. 그렇게, 수많은 월인의 피와 분노를 연료로 타올랐던 월국부흥의 불꽃은 완전히 소멸했다.

5. 영향

5.1. 한 이후 진로를 생각하다.

대전 종결 후 한 내부에서는 대부 공중치가 제나라 중심의 외교노선에서 다각외교 그중에서도 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유는 제는 너무 멀고 송은 이번 대전에서 별활약을 못하였으니 진과 친교를 맻어 한의 안위를 도모하자는 뜻이었다.[44]
그러나 한왕 한강은 역대 한나라 공실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유훈 '진나라 놈들을 믿지 말라!'를 언급하며 함곡관이 진나라 손에 있는 한 절대 저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서는 안된다고 단언하였다.
이에 상방 장개지 외교가 아니면 앞으로 진로는 어찌하시겠는가 묻자 한강은 우서 대전 피해 복구에 전념하고, 송이 이번 대전의 실책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송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고, 제나라에게 마찬가지로 패전의 지분이 상당한 진태수 전거의 교체도 요청하였다.

5.2. 제 정점은 아직 정정하다.

한나라로 부터 전거의 교체요청을 받은 제왕 전인제가 태자와 정곽군에게 어치 처리할지 물으니, 전벽강이 전거에게 전횡[45]이 있다는것에 분노하여 추문해서 죄가 있으면 벌을 주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정곽군이 한심하다듯 한의 요청에서 처벌은 없었으며 이것은 태수 교체 요청서라고 정정하였다.
전인제도 전벽강의 대답에 급히 태자사부 맹자를 불러 추궁하니 현(賢)에서 대우(大愚)로 흘러가는 과도기라 부작용이라고 설명하였다. 제왕은 군주에게는 어느 정도 어리석음도 필요하지만, 이정도로 어리석으면 오히려 곤란하다며 순우곤에게 태자의 자세 교정하라고 명을 내린다.
태자가 물러나고 제왕이 다시 전거의 교체에 대한 의견을 정곽군 전영에게 묻자 전영은 조선 방면은 크게 신경쓸 필요 없으니 광장을 진 태수로 부임시키자고 진언하였다. 제왕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이번 대전으로 당분간 초나라와의 싸움은 없겠지만 반대로 조선쪽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체급도 크거니와 수로 정비와 개간 작업으로 사람이 몰리면 상호 긴장을 촉진하기 쉬우니 마음을 놓지 말고 고당의 요새시설과 광장은 절대로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는 안되다고 답하였다.[46] 그리고 진에는 대전에서 유일하게 초나라를 곤경에 빠뜨린 전반을 보내기로 하고 논의는 마무리 되었다.
대전에 맹자와 전인제 둘만이 남게되자 평소의 방임주의와는 다르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유를 물으니, 자신도 점점 천명(天命)을 알 것 같다 라는 답변을 하며 대전을 나섰다. 전인제가 천명을 언급하자 맹자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지만 기우라 여기고 신경쓰지 않았다.

5.3. 송 대언의 최후와 연홍옥의 등장

대전의 참패로 송나라 내부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우선 송나라 변법개혁을 돕기 위하여 조선에서 파견되었던 조선법가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쟁을 벌인 대언과는 더이상 함께 할수 없다며 조선으로 돌아가고 송나라 전국에 민란이 발생하니 어디서부터 해결해야할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장주가 나서서 조언하였지만 대언이 이마저도 듣지 않았다.
결국 송나라의 대규모 반란 소식은 패자 전인제의 귀에도 들어가고 맹자의 영향으로 제나라 내부의 인의왕도론 명분에 결국 반군측을 지지하게된다. 제나라측은 즉시 대언을 대신할 인물을 찾게되는데 마침 친제측 공족 한명이 있으니 그 공족이 바로 연홍옥이다.
연홍옥을 앞세운 제나라는 순식간에 팽성을 포위하여 점령하고 대언을 사로잡으니 연홍옥은 대언을 현월[47]로 참수하고 새로운 송공에 오르게 되자 반란은 진정세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 공위에 오른 연홍옥의 앞길은 가시밭과도 같았으니 대전의 참패와 반란, 내전등으로 송나라의 힘은 열국중 최하위가 되었으며 이후 송을 둘러싼 강대국의 영향력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5.4. 초 강동재편

송나라 반란소식을 뒤늦게 접한 초나라는 수춘을 탈환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한탄하였지만, 대전의 여파로 당분간 초도 몸을 사려야 하는 판국이라 이내 기대를 접었다. 조정에서 상주국 소양을 주도로 강동거점 재편에 대한 논의가 들어가고, 오의 전소로 유민들이 광릉으로 몰려간것과 내륙과 해안을 중개하는 중심지로의 역할도 보여주었으니 광릉을 새로운 거점으로 낙점하였다. 이에 굴평이 덧붙혀서 광릉이 강동의 새로운 거점이 되면 장강 이남에 대한 영향력이 못미치니 아예 광릉을 중심으로 장강 인근 일대를 광릉군으로, 절강 인근 일대를 회계군으로 재편하자고 진언하자 소양이 이를 받아드렸다.[48]

[1] 전후 합종군의 공격으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2] 추정치 정확하지 않음[3] 추정치 정확하지 않음[4]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5] 양측 병력동원 숫자가 합해서 10만을 넘으면 대전이라 쳐준다.[6] 만일 제나라 세력권을 공격시 문답무용으로 박살내주겠다는 경고도 덧붙였다.[7] 절강과의 싸움에서 기적적으로 이긴탓에 안정적인 세력 확장을 추구하였지만, 작선장이나 신문 둘 모두 나이가 나이라서 살아서 월의 부흥을 못볼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으나 제나라의 통보에 느슨해진 마음을 잡고 활동에 나선것이다.[8] 초의 강압적 정책에 대한 반감과 절강이 초에 흡수된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유다.[9] 회음, 운양, 연릉, 오[10] 구 월국 수도 오는 초군이 단단히 잡고있어 무리라 답변하였다.[11] 전투 종결후 밝혀졌지만 신문은 이때 전사했다.[12] 이는 수성을 자신의 상급자이자 우두머리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었고 곧 월부흥군이 수성을 중심으로 재편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13] 봉기군이 점거한 잠도 이때 소어에게 다시 빼아겼다.[14] 가의 눈에는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초군의 모습이나 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천의 얼굴이나 다를바 없다는 소리였다.[15] 고소산 위의 오성이 방어하기 더 좋은곳이고 무원의 병력은 자신들이 한차례 소집하였기에 적은 상황이었다.[16] 열국에서 오직 송만 칭왕을 하지 않아 한왕 한강이 송공 대언에게 하대를 해야 하였지만, 한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17] 전영이 제남에 주둔중인 부대와 함께 보내라 진언하였지만, 그러면 제의 주도권하에 작전이 진행될게 뻔하였고, 한과 송의 체면을 살려줄겸 일부러 소수의 수송부대로 위장하여 보낸것이다.[18] 전영은 명분과 힘 모두 제가 위인데 어째서 자신들이 눈치를 봐야하냐며 투덜거렸지만, 태자 전벽강은 그것이 강자의 아량이라며 전영을 달래었다.[19] 소어가 월군이 후방을 밀어치는것을 방지하고자 안개가 끼어있는 전장을 택하였다.[20] 이 연합군에서 가장 숙련도가 높은것이 전반이 이끄는 치중대였는데 무려 95였다. 사실상 말이 치중대지 그 실체는 전반의 직속 정예부대였다.[21] 한거와 사거는 전반이 이끌고온 치중대를 보고 치중대로 공성도 가능하겠다며 치를 떨었다.[22] 이에 전반은 크게 흡족해하였으나 덕분에 정체가 들킬뻔 하였다.[23] 장강까지 진격하며 전공이 더 크게 보일것이라는 속셈도 있었다.[24] 경취의 이러한 점은 이후에도 드러나고 명장으로 각성할 조짐을 보여주었다.[25] 그러나 숙련도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거는 이 병력을 후방으로 물리고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육현현령이 제공한 지리정보는 크게 도움이 되어서 유용하게 사용하였다.[26] 유봉이 이끄는 초군의 규모가 7천2백 민월군은 6천3백이었다.[27] 경취는 한군이 2만 송군이 1만6천이라 예상했는데 수춘에서 출발하였는데 송군의 숫자가 더 적은것에 군이 더 있을것이라 판단하였다.[28] 유봉이 병사들에게 오성에서 농성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오성은 이미 유봉 자신의 손으로 불태워 초토화된지 오래였다.[29] 잠에서 봉기한 월부흥군도 합류하였다.[30] 월쪽에는 민월이 안정을 위해 초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소문을, 민월 쪽에는 절강의 회계는 월의 발원지이자 고토라는 사실[31] 물론 이들이 이런 논의를 하는 사이 유봉은 휘하 병사들의 반란에 목이 달아난 상황이다.[32] 해당 전갈을 들고온 사자는 그대로 절강으로 향하여 회계태수 유봉에게 똑같이 민월과 협상하라는 명령을 내릴 예정이었지만, 그때 유봉은 이미...[33] 사자의 죽음도 학정을 숨기려는 유봉의 짓으로 꾸몄다.[34] 2할9푼[35] 이 전투로 한군이 7천5백. 초군이 6천5백의 피해를 입었다.[36] 대언 본인이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과신하여 무리한 결정을 내렸다.[37] 수춘지원[38] 종리에는 수춘 공략의 발판을 위하여 초군 1만이 주둔중이었다.[39] 붙잡힌 한거와 병사들과 초나라 부장급 인사들이 교환되었다.[40] 중원의 대사마[41] 삼대세가(소/굴/경)의 관리역할[42] 민정 담당관이자 국정 보좌관[43] 소어가 기사로 부임하기전 자신을 보좌할 문관관료를 뽑았는데 마침 진나라의 끈이 떨어져 떠돌던 장이가 자원하여 함께하게되었다.[44] 칭왕으로 진 역시 중원국가 대열에 합류하였고 초와 사돈이지만 국가의 이익 앞에서는 얼마든지 변할수 있으니 제도 뭐라 하지 못할것이란 이야기도 덧붙였다.[45]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이고 주원인은 대전 참패로 인한 것이다.[46] 그러나 훗날 전영은 이 충고를 잊고 자신의 명을 거스른 광장을 보급곤란으로 벌하여 결국 산동대전때 조선의 진격을 초기에 막지 못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47] 이때 대언은 은의 후예가 달기를 죽인 방법으로 자신을 죽이냐며 한탄한다.[48] 덧불혀서 초왕 웅괴가 말릉이라는 이름도 재수없으니 금릉으로 바꾸자고 제안하였고 굴평은 돈드는것도 아니니까 라면서 받아드렸다. 이렇게 말릉은 금릉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