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문익(文翊) / 국사(菊史) |
본관 | 장수 황씨[1] |
출생 | 1879년 12월 9일 |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중항동 (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중항마을)[2] | |
사망 | 1953년 5월 8일[3]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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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노상직은 그의 작은고모부이다.
2. 생애
황문익은 1879년 12월 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중항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중항마을)의 호군공(護軍公) 종가에서 아버지 황정현(黃庭顯, 1861. 7. 8 ~ 1941. 1. 28)과 어머니 함평 이씨(1857 ~ ?. 2. 15)[4]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 그가 태어나고 자란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중항마을은 방촌 황희의 증손자 황학(黃鶴)이 조선 초 호군(護軍:정4품)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개척한 마을인데, 황문익은 호군공 황학의 14대 종손이다.그는 1907년 단장면 안법리 출신 손경헌의 주도로 조직된 대한협회 밀양군지부에 가입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1913년 4월, 가족들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봉황현(鳳凰縣) 봉황성(鳳凰城)[6]에 정착하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였으며, 봉천성 동변도 무송현(撫松縣)[7]에 있는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0년 11월 흥업단 단장 김호로부터 길림성군정서 부속 흥업단 군관 양성자금 20만원을 모금하라는 명령을 받고, 손경헌·이만준(李萬俊)·김인제(金仁濟)·최성기(崔聖基) 등과 함께 권총 5정·실탄 90여발을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뒤 경상남도 및 경상북도 지방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활동을 통해 6만엔 정도를 모금하는 데에 이르렀으나[8], 1922년 12월 26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체포된 후 그는 오랜 기간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이듬해인 1923년 봄,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 및 강도, 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9]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3년 5월 8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호안공파(胡安公派)-녹사공계(錄事公系)-호군공파(護軍公派) 21세 주(周) 항렬. 족보명은 황영주(黃永周).[2] 장수 황씨 집성촌이다.[3] 12월 20일 별세했다는 기록도 있다.# 장수황씨세보 권2 643쪽에는 1952년 12월 20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이민희(李敏喜)의 딸이다.[5] 어머니 함평 이씨는 아버지의 첫째 부인으로 슬하에 황문익과 누이 1명을 두었으며, 둘째 부인 진주 하씨(1867 ~ ?. 12. 28) 하수정(河壽禎)의 딸은 슬하에 황원주(黃元周, ?. 1. 12 ~ 1951. 1. 30)·황화주(黃化周, 1900. 9. 5 ~ 1956. 4. 9) 등 남동생 2명과 여동생 3명을 두었다.[6]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펑청시(鳳城市). 봉천성 봉황현은 1914년 중화민국 북양정부에서 전국 현(縣) 이름을 통일할 때, 호남성 봉황현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봉성현(鳳城縣)으로 개칭된 것이 현재에 이른다.[7]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푸쑹현(撫松縣).[8] 황문익은 이 사이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으나, 객지 생활로 체포되지 않아 결국 1921년 11월 8일 마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황문익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내린 바 있다.[9] 그러나, 형사사건부에 의하면, 1923년 1월 15일 대구지검에서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내린 기록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