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15:18:49

황희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에 대한 내용은 황희(정치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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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20 代》
恭愍王 12年~
文宗 2年
제20대 1431.9.6~
1449.10.5
조선 초기의 역대 수상(首相)
19대 이직 20대 좌의정 황희
(1427~1430)
영의정부사 황희
(1431~1449)
(이후 조선의 역대 영의정으로 이어짐)
황희
黃喜
파일:황희 초상 원본(1424).jpg[1]
출생 1363년 3월 8일[2]
고려 개경부
사망 1452년 2월 28일[3] (향년 88세)
조선 경기도 파주
작위 증(贈)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시호 익성(翼成)
이름 황희(黃喜)
방촌(厖村)
구부(懼夫)
초명 도야지(都耶只) / 수로(壽老)[4]
본관 장수(長水)[5]
비고 사후 부원군 추증

1. 소개2. 일생
2.1. 정승이 되기까지2.2.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다2.3. 혹사당한 말년
3. 부정부패 범죄자4. 일화
4.1. 출사에 관한 야사에 대해4.2. 창작물에서
5. 이야깃거리6. 관련 유적지
6.1. 반구정(伴鷗亭)

1. 소개

여말선초의 문신 및 정치가.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을 합치면 총 24년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재상을 오래 한 것은 누구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왕이 원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뜻밖에 장수했기 때문이다.

세종과 함께 그 시대의 주역으로서 태평성대를 이끌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훌륭한 정치가이자 능력 있는 재상이었지만, 친인척 비리 수사를 무마하기 위한 청탁 때문에 수차례 사직 권고를 받고 뇌물을 좋아하는 등 도덕성에 흠이 큰 인물이었다.

2. 일생

황희일대기를 다룬 힛갤 만화
두문동 전설 같은 야사나 지어낸 이야기들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2.1. 정승이 되기까지

1363년(공민왕 12) 개성에서 자헌대부 황군서(黃君瑞)와 용궁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호문(李好問)의 사초에 따르면 얼자라고 하는데, 적어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것만은 당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6]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음서로 14살에 녹사(錄事)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89년(공양왕 1) 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1390년(공양왕 2) 정9품 성균관 학록(學錄)이 되었다.

태조정종 대에는 자신이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 번 파직되어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종이 즉위하고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천거로 1401년(태종 1) 도평의사사 경력, 1402년(태종 2) 대호군 겸 승추부 경력이 되더니 1405년(태종 5) 그의 후임으로 지신사가 되면서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4년 동안 지신사직에 두어 크게 중용했다. 지신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그 시행을 감독, 보고하던 대언(代言)의 으뜸으로 도승지의 전신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국왕 직속인 만큼 권력 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태종에게 이 정도로 중용받을 정도면 그 능력은 입증된 셈. 소위 코드 인사로 인해 일부 관료의 인망을 잃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외교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법무부, 국방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 농림축산식품부, 중소벤처기업부, 고용노동부, 환경부, 통일부 장관을 두루 역임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단, 당시는 현대만큼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한 부서가 담당하는 일의 폭이 훨씬 넓었다. 이조가 행정`안전부의 업무에 해당하는 일도 담당했지만 나라 인사와 정무에 관한 모든 행정 업무를 담당했고, 호조도 기획재정부에 한정되지 않고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은행, 국세청 등 국가의 재정 및 경제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했으며, 예조도 교육외교 등은 물론, 문화, 체육, 관광, 보건, 복지 관련 업무와 여성, 아동, 청소년가족 등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했고, 형조도 조선의 모든 사법 관련 업무를 담당했으며, 병조도 국방과 치안유지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했으며, 공조도 건설, 교통산업, 통상, 자원에 관한 업무는 물론, 과학, 기술, 정보, 통신 등에 관한 업무와 해양, 수산에 관련된 업무, 농림, 축산, 식품에 관련된 업무, 상업에 관련된 업무, 고용, 노동에 관련된 업무, 환경에 관한 업무, 국토관리 등에 관한 업무 등을 모두 담당하였다.

도승지와 육조 판서와 영의정 모두 지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 행정각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말이다.1인 밴드가 아니라 1인 내각 국정 전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크게 신임을 받았다.

태종은 이런 말로 자신의 측근인 황희에 대한 신임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 일은 나(태종)와 경(황희)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문종실록> 문종 2년 2월 8일 황희의 졸기(卒記)

그러나 폐세자 건이 나왔을 때 적장자 계승 원칙을 고수하며 양녕대군을 두둔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파직된 뒤 유배까지 갔다. 태종은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을 만회하려고 세자 편을 들었다고 비난했고, 황희는 단순히 세자가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자기의 신뢰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여 실망하고[7] 그를 시골로 내쫓았다.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은 민무구, 민무질 등의 옥사를 가리킨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신사 시절의 황희가 민씨 집안을 박살낸 장본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극비 정치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파주에 있는 교하(交河)로 유배를 갔다가 한양에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남원으로 변경되어 그곳에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이것도 그가 남원에 연고를 두고 있었기에 약간 배려한 것. 평소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이었기에 그가 세종에게 양위하고 군권만 행사하는 상왕으로 물러난 직후 왕에게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서 재출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후 세종에게 중용되어 강원도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고 1426년(세종 8) 우의정에 오르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1427년(세종 9) 좌의정이 되었을 때 원래 영의정이었던 이직이 부원군으로 물러나면서 영의정의 자리가 비게 되어 사실상 이때부터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431년(세종 13) 69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2.2.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다

1449년(세종 31) 87세에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18년 간 영의정에 있으면서 세종을 훌륭히 보좌하여 농업, 예법, 군사, 법령 등 각종 국정에서 세종의 정치고문이자 명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명성을 떨쳤다. 벼슬살이만 73년을 했다.

1427년부터 1435년(세종 17)까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하다. 황희는 보수적이고 강직한 스타일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던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군자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관노였던 장영실을 관직에 올려 일을 시키고자 세종이 논의를 하였을 때 다른 중신들은 모두 반대하였지만 당시 이조판서에 있던 황희만이 찬성한 사례는 그의 그릇을 보여준다.

또한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강한 결단력, 추진력과 육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결합되어 정책 회의 때마다 주목할 만한 의견을 자주 냈고, 복잡한 토론을 거쳐도 결국 황희의 안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관은 실록에 황희의 졸기(卒記)를 남기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 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정책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곤 했다.

이런 그의 능력이 세종에게 가장 필요하였다. 세종은 스스로 독창적인 주장을 내기도 했고 가능한 모든 논점을 검토한 뒤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정책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도 종종 나왔으며 온갖 주장이 난립하여 심의가 길어져 쟁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었다. 황희는 대국적으로 주장을 정리하고 가장 현실적인 시행 방안을 내어 정책을 조율했다. 세종이 괜히 황희가 온갖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부려먹은 게 아니다.

원만한 성품의 동료 정승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주로 융통성과 센스가 필요한 일처리에 능한 편이었다.

2.3. 혹사당한 말년

파일:attachment/황희/retirement.jpg
출처
  •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5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 1449년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하다.
  • 1452년(문종 2) 2월 8일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卒記/사망).

뒤에 서술할 화려하기 짝이 없던 비리에 대한 벌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대왕은 황희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었다. 황희가 최종적으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1449년 10월은 세종대왕이 세상을 뜨기 딱 4개월 전이었다. 게다가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땐 당연히 치뤄야하는 3년상조차 못하게 하고, '환갑 지나면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좌상이 풀만 먹다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고기를 먹으라'고 명령을 내린 바 있다. 결국 황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 반찬을 먹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8]

단 건강 문제로 사직을 청하면 아예 재택근무 하라고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석하라고 하든지, 서류 업무는 집에서 관료들을 불러서 누워서 처리하라고 하는 등 아주 열심히 부려먹으면서도, 그러면서도 퍼지지 않게 세심하게 관리해주는 면이 돋보였다.

그만큼 일을 많이 했는데도 평소에 건강 관리에 힘썼다. 평소에 양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시력 관리법이었다고 하며 나이가 들어서도 백발 홍안의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야사에는 황희가 째려보면 사람이고 어린아이고 동물이고 다 쫄게 만들어서 심지어는 죽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황희가 실록에서는 대단히 강직한 스타일로 묘사되는 것이나 6진 개척과 여진족 정벌에서 활약하고 다이아수저 수양대군과 맞섰던 김종서도 황희를 무서워해서 그 앞에서는 항상 각잡고 있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다. 말년에 은퇴하고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개가 가만히 있자 "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1452년 2월 28일에 만 89번째 생일을 열흘 남짓 앞두고 만 88세, 세는나이로 90세라는 당시 사람으로서는 경이적인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당대로서는 최고 수준의 부양을 받은 왕조차도 50줄을 넘기기 힘들었고,[9] 서민들은 3~40대가 평균 수명이었다. 현대 기준으로도 남성은 90줄을 넘기기 매우 힘드니 90세까지 살았으면 상위 1%나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그의 장수를 이용해 참으로 많이 부려먹었다. 물론 관직 내내 이렇게 업무 혹사에 시달리면서도 과로로 쓰러지기는커녕 별 탈 없이 소화한 황희의 건강함과 장수도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지만, 황희가 나이 들었다고 사직서 낼 때마다 가마까지 내려가며 열심히 쥐어 짠 세종도 대단하다. 전하 차라리 순직시켜주시옵서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황희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은 이징옥의 아버지로 100세를 넘겼다는 이전생(李全生),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을 지낸 이귀령(李貴齡, 1345~1439), 효령대군, 이구원(李久源, 1579~1675), 성혼의 손자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성직(成稷, 1586~1680),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홍수렴(洪受濂. 1642~1736), 효종의 서녀 숙녕옹주(淑寧翁主)의 남편 박필성(朴弼成, 1652~1747/96세) 등이 있다. 일찍 왕위를 포기하고 장수하는 길을 선택한 효령대군을 제외한 이구원, 이귀령이 관직 생활을 하면서 저지른 졸렬한 처신으로 당대 사관들로부터 거세게 비판받았지만, 황희는 세종의 옆에서 배향될 만한 명신으로서 치적을 많이 남겼다. 황희의 장남인 황치신(黃致身, 1397~1484)도 88세까지 장수했다. 공교롭게도 세종과 동갑이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나중에 셋째 아들 황수신이 공신이 되자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작위가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다.

3. 부정부패 범죄자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유능한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대쪽 같고 강직한 성품답지 않게 의외로 자꾸 자식이나 친족의 대형 범죄를 덮다 들키거나 두둔해서 곤욕을 치르기가 예사였다.

한 번은 사위인 서달이 시골[10]을 지나다 아전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달아나자 감히 좌의정의 사위이자 병조판서의 아들인 자신을 몰라봤다고 종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하였다. 종들이 길 가는 다른 아전을 잡아 패며 달아난 아전의 집으로 자신들을 인도하게 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아전 표운평이 이를 보고 항의하자 종들이 표운평을 패서 서달 앞에 데려갔다. 길 가다 두드려맞은 표운평이 황당하여 아무 말이 안 나오니 서달은 표운평이 일부러 말을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놈이 낮술을 했구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라!"하며 작대기로 그를 흠씬 두들겨 패게했고 표운평은 그 다음날 요단강을 건넜다. 그 뒤 지방 관아에서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더니 어렵지 않게 정황이 밝혀졌으나, 서달의 장인이 당시 조정 실세인 좌의정 황희인데다 서달의 아버지까지 병조판서였으니... 알아서 긴 수령은 중앙이 아닌 좌의정 황희에게 사건을 먼저 알려버렸고, 황희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작에 착수했다.

이때의 행각이 매우 심각했다. 피해자의 처를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그 친족을 회유하거나 일의 처결을 맡은 지역 수령을 맹사성과 힘을 합쳐서 동향이라는 연고를 내세워 압력을 가하고 급기야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도중에 짜고 가로채는 짓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주변과 입을 맞춰 사건 내용을 조작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조작에 가담한 관리가 수십 명에 달했다.[11][12] 원래대로라면 이들의 계획대로 사건이 조작되어 황희의 사위는 별 일 없이 넘어갔겠지만, 그들의 상대는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어본 다음 이상하다며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고, 진상이 밝혀졌다. 이때 황희와 맹사성뿐만 아니라 관련된 주변 벼슬아치들은 곤장을 맞거나 유배를 가는 등 난리가 났다. 윗사람 뒤처리 하다가 아랫 사람들도 덩달아 피 본 셈. 그나마 황희와 맹사성은 며칠 뒤 복직했으며 정작 사건을 일으킨 서달은 원래는 사형이었지만 독자라는 이유로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 3년 노역치 벌금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매관매직, 뇌물 사건과 청탁 혐의로도 종종 탄핵 당했다.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감싸주기 위해 다소 구차한 변명으로 세종에게 호소해 이들을 구해준 적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장남 황치신의 과전을 돌려주려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적도 있다. 이런 행적을 보면 자식과 친인척에 관련된 일에는 물불을 안 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에서 일할 때 금잔 등을 훔치다가 적발된 다음 조사 과정에서 차남 황보신은 더 많이 훔쳤다는 것이 걸렸으며, 황보신의 땅이 압수되는 과정에서 황치신이 황보신의 기름진 밭을 자신의 돌밭으로 바꾸려다 또 걸리는 등 집안이 제대로 개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때 황희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서자 황중생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며 황중생의 성을 조씨로 바꿔버렸다. 이건 대인배라는 평가에 걸맞지 않은 행동. 그러니까 황희는 이때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른 황보신은 그냥 내버려두고 황중생만 화풀이하듯 족보에서 파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보면, 황중생의 경우는 황희와 절의 여종 사이에 태어난 서자인데 워낙 무능해서 벼슬할 생각조차 안하고 그냥 놀고 먹었다. 결국 황희라는 아버지 이름값으로 문종이 기거하는 동궁전에 세자 친구 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른 것도 아니고 궁중의 창고의 물건을 훔쳐서 집에 가져간 것이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이복형인 황희의 적자 중 둘째 황보신에게 줬다고 해서 일이 커졌다.

황보신의 경우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수사한 결과 드러난 것인데, 황보신의 죄목은 공금 횡령. 이유는 첩 선물용. 결국 삭탈관직에 직첩 떨어지고 과전이 나가 떨어진다. 게다가 이게 겨우 수습 국면에 들어가는데, 황보신의 과전이 반납되는 과정에서 적자 3형제의 장남 황치신이 끼어든다. 몰수되는 동생의 과전을 자기가 먹고 대신 자기의 척박한 과전을 대신 반납해버리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13] 결국 황희를 가급적 커버해주려던 세종도 도저히 못 견뎠는지 황치신까지 파면해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적자 서자 할 것 없이 비리 콤보 3연타가 줄줄이 터졌고, 그 시작이 서자 황중생의 궁중창고 절도 사건이었으니, 황희의 분노가 황중생에게 몰린 것은 당연한 거다.

그리고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적자 3형제의 막내가 황수신인데, 계유정난에 협력하고 황희의 후손이라는 덕을 보아 영의정까지 올라 가장 크게 되었다. 다만 그도 음서 출신[14]이라 가문의 힘이 컸다. 친한 사이라고 부정 인사를 저질러서 관직 삭탈을 당하고, 아산 전체를 농장으로 바꿔버리는[15] 등의 치부를 해서 탄핵을 당하는 등 아주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조선시대 치부의 모습을 보여줬다.[16] 이런 큰 비리에도 결국 세조가 황수신을 용서하고 복직시키고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한명회를 대신해 영의정을 맡기는 걸 보아 황수신이 황희의 실무 능력은 제대로 물려받은 듯.

한편으론 황희의 악행이 부풀려진 것도 있는데, 이호문이라는 사관은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울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처와 간통을 하였는데(이하 생략)[17]
황희의 비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왜곡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훗날 실록을 편찬할 때 정인지성삼문 같은 이들이 이 사건을 부정했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건 너무 심한걸", "무슨 근거로 이렇게 악의적인 기록을 남겼나?" "간통문제야 사실 여부를 알기 힘들지만 앞에 이건 내가 알기론 사실이 아냐" "이걸 쓴 친구가 본래 맛이 좀 간 자입니다" "삭제하지?" "찬성!!"이라는 식으로 코믹하게 재구성했다. 결국 의견이 모아져 삭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실록을 고친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이 글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18]

하여튼 집안 사람들이 태종과 세종의 제1옵션이던 황희의 위세를 믿고 저지른 망나니 범죄들을 권력으로 덮은 범죄로만 놓고 보면 일찌감치 사형당하는 게 마땅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세종대왕이 능력을 높이 사 적극적으로 두둔해준 덕에 오래 살면서 정승을 할 수 있었다. 대신 세종이 내린 처벌은 은퇴안식년도 없는 종신노역형.

4. 일화

황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마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 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서리맞은 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니,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말라.” 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한 나무의 열매가 모두 없어졌었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ㅡ 『용재총화
  • 세종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재상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지금까지도 흔히 "황희 정승"이라고 불릴 만큼 정승이라는 말과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승의 대명사가 되었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19] 대기록 때문인지 야사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계란유골의 고사, "어느 가 일 더 잘해요?" 얘기라든지, 무엇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네가 옳다. 너도 옳다. 부인 말도 옳소." 등의 이야기가 있다.
  • 그의 딸은 입을 속곳(속옷)이 한 벌뿐이었으니 딸을 결혼시킬 돈도 없었다. 헌데 하루는 세종과 신하들과 여러 백성들이 보는 자리에서 광대들이 신나게 줄타기를 하는데 어느 광대가 줄타기를 하면서 "어허, 이 줄타기 춤은 황정승 속곳춤이올쎄." 라고 외치는 거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어느 대신이 "이놈, 감히 영상대감을 모욕하는 거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분노하였지만 그 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줄타기를 하며 말을 계속 했다. "보통들 황정승 나리의 하나뿐인 따님에게 속곳을 달랑 한 벌 남겨두고 살아가는 것을 청렴결백이라고 추앙하지만, 천한 것인 이 몸에겐 쓸데없는 짓거리로만 보일뿐이옵니다. 혼례가 뭐 대충 치르는 겁니까? 어디 이 속곳춤을 따지실려면 그 황정승 속곳춤의 유래를 과연 옳다고 보실 수 있는지요. 그 따님의 삶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 거 아니온지요.[20]이래도 이 광대놈의 춤과 말이 싫으시다면 사정없이 목을 베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살판나게 춤을 추었고 그 대신도 주변 인물들도 뭐라고 반론하지 못하고, 황희를 쳐다봤다. 결국 그 눈길을 견디지 못한 황희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야사일 가능성이 크다.
  • 청탁 때문에 탄핵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사실 청백리라 하긴 힘든 인물이지만 야사에서는 왠지 청렴한 관리로 남았는데, 실제 행적을 두고 보면 청백리로 언급되는 것은 죄다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황희의 청백리 이야기와 관련되어 유명한 것이 계란유골의 고사인데, 이것 역시 정식 사서가 아니라 조선 후기에 나온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실려있던 일화며 시기상의 차이와 실제 행적을 볼 때 이 쪽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야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새서 방 안에 그릇을 놓아두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일화 역시 거짓말. 여느 벼슬아치들과 다를 바 없이 크고 아름다운 기왓집이었다. 다만 실록에서도 잘 나타나는 그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야사에서도 잘 나타나며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 당겨도 혼내지 않고 그저 허허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나. 돈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고 그럴수도 있지 비리 저지르는 높으신 분들도 사석에서 만나면 좋은 사람이리 카더라
  • 다른 야사로 노비를 출세시킨 이야기가 있다. 평소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가 매우 현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자, 황희는 밤에 몰래 부른 다음 노비 문서를 건네주고 글공부를 해서 성공하라며 떠나보냈다. 이후 세월이 흘러 황희가 과거 시험관을 맡았는데 그 시험에서 급제한 인물 중 한명이 그 노비였다는 야사.
  • 궁녀와 총각이 남 모르게 사랑을 하다가 발각되면서 처녀는 고문을 당했고 총각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총각이 황희 정승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그 다음 날 그는 궁에 가서 임금에게 계속 웃고 있었다. 이에 왕이 웃는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궐문을 나설 때 숫진드기와 암파리가 싸우고 있었는데 숫진드기가 함께 살자고 했더니 암파리는 요새 시골 총각이 처녀와 함께 살다가 쫓겨난 일도 모르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왕은 황희의 뜻을 알아챈 다음 궁녀를 풀어주고 총각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명했으며 그 뒤 이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야사가 있다.
  • 황희가 청년일 때 어느 농부 두 마리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황희는 "이 두 소 중에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라고 농부에게 물었더니 그 농부는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누런 소가 검정 소보다 일을 잘한답니다"라고 귓속말로 대답했다. 황희는 황당해 하면서 "그냥 있는 곳에서 말하지 왜 굳이 귓속말로 대답합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농부는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일 못한다는 험담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일로 황희는 앞으로 말조심을 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 원래 황 씨가 일을 잘해

4.1. 출사에 관한 야사에 대해

황희가 조선 개창에 반대해 은둔한 선비들 중의 일원이었고, 이런저런 간청에 못 이겨 조선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는 일화(두문동 72현 전설)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황희 등이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두문동이라는 지명은 영조 때 급격히 부각되었고, 수많은 전설들이 탄생했다. 황희에 관한 것도 이런 두문동에 관한 전설 중 하나다. 애초에 두문동에 관한 전설 대부분은 신빙성을 의심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 때문에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두문불출이라는 말 때문에 두문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또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는 뜻으로, 두문불출이라는 말은 가깝게는 이규보의 편지글, 계속 올라가다보면 사마천사기까지 나온다.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는데, 두문동이 언급된 영조대에 확인된 사람은 2명, 정조 대에는 원래 2명 합쳐서 3명이었는데, 점점 숫자가 늘어나면서 결국 공자의 제자인 72명에서 숫자만 맞혔다. 때문에 발표한 곳마다 명단도 다르다. 이러니 영조대에 밝혀진 임선미, 조의생을 제외하면 관련된 인물 전원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황희 당대의 기록에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고, 태조 대에 이미 6품 관직에 임명되어 세자가 자문하기도 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에 절의를 지킨 쪽은 분명히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건국세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약 조선 개창에 공을 세웠다면 개국공신에 녹훈되었을텐데, 그렇다면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고작 6품관에 머무를 리가 없다. 아직 젊은 나이여서인지 딱히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그냥저냥 하급 벼슬살이를 해간 것에 가까운 편.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도 관여한 정황이 없다. 생전에 작위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의 부원군 작위는 아들 황수신이 계유정난에 협력하여 공신으로서 남원군(南原君)이 되면서 추증된 것이다.

4.2. 창작물에서

사극에 몇 번 등장했는데 <용의 눈물>에서는 박진성이 연기했다. 태종 대 지신사 시절의 황희로 태종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후에 폐세자될 위기에 처한 양녕을 홀로 옹호하다 파직되고 유배에 처해진 뒤, 세종 대 복귀하는 모습까지 나왔다.

<대왕 세종>에서는 김갑수가 열연했다.[21] 다소 안 어울린다는 말도 있었지만 워낙 이 분의 연기 내공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니…. 사실 지금 남아있는 초상과 닮았던 사람은 오히려 박은 역을 맡은 박영지였다. 그러니까 박은보다는 황희. 이 드라마에서 황희의 캐릭터는 재해석을 많이 거쳤다. 초반부터 왕세자 양녕대군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고, 그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정치 싸움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하는 정치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결국 양녕대군을 마지막까지 변호하다 파직당하고, 세종이 즉위한 뒤 복귀하는 형태. 태종에게 '전하의 대에서 벌어진 일들이 왕자의 대에서도 벌어지면 이 조선은 끝장'이라고 말하며 태종의 가장 큰 역린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정도로 직언을 아끼지 않는다. 결국 비슷한 일이 손자와 증손자 대에서 벌어지긴 하지만

다만 초반부 고려 부흥 세력과의 갈등을 위해 야사의 두문동 이야기를 각색하고 여기에 황희를 연결시켰다. 황희가 마지막으로 고려 유신들을 설득해서 두문동을 떠나게 하려 하나 유신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황희는 불타 죽어가는 유신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목격한 고려 부흥 세력의 수장은 황희를 회유하려 두문동 사건을 언급하였지만, 황희는 '나는 새 나라에서 백성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라는 입장을 끝내 고수하게 된다. 장영실의 전향으로 인해 일망타진된 고려 부흥 세력의 2인자 전판석을 심문하다가 한 발언은 작중 황희의 사상을 잘 말해준다.
"고려. 높은(高) 아름다움(麗)을 지닌 나라. 그 국호를 이제 더는 입에 담지 마라. 너희들은 단순한 반군, 아니 화적패야! 백성들의 안위는 눈꼽만큼도 생각치 않고, 그저 분풀이나 하는 네놈들은 화적패나 다를바 없다 이말이야!"

<장영실>에서는 사극은 처음으로 찍는 정한용이 맡았는데, 무척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오며, 장영실 일행의 역법 연구를 입 다물어주는 등, 대인배로 나온다.

<뿌리깊은 나무>에도 등장하는데, 스토리상 비중은 크지 않지만 문자 창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해질 때 세종에게 "만들긴 만드셨습니까?"라 물어 세종이 은밀한 비밀인 문자 창제의 뜻을 몰래 밝혔을 정도로 신뢰하는 원로대신의 면모를 보였으며, 세종이 이신적에게 "황희가 사직 상소를 올렸다"라 말하니 "그건 매년 있는 일 아닙니까?"란 반문이 나와 노인 학대도 표현되었다.(...) 프리퀄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권시현 씨가 연기했으며, 포은을 죽이고 두문동을 파괴한 이방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관직에 나선 것으로 하였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배우 백윤식이 황희 역으로 출연하였는데[22] 시작부터 충녕의 세자 지위를 놓고 충녕을 까다가 태종에게 말 그대로 쥐어 터진다.[23] 작중 중반부터 파직된 모습으로 나오는데 충녕인 거 뻔히 알면서 대놓고 '내가 너랑 똑같이 생긴 어떤 을 알고 있는데 말이야.'라는 식으로 깐다던지. 양식을 구하려고 대놓고 기와집 담장을 넘고 쌀 두가마니를 들고 오는 충격적인 모습을 선보인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배우 신구가 영의정 역을 맡았는데 시기를 보면 황희일 수 밖에 없다. 엔딩 크레딧에도 그를 따르는 대신들을 '황희파 대신들'로 적시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세종과 대립하지는 않지만 세종과 장영실과 대립하는 숭명파 신하들의 중심축인 인물로 직접적으로 대립하기 보다 겉으로는 세종의 뜻을 따르는 척 하면서 아래 사람들을 이용해 세종과 장영실을 밀어붙인다. 이후 장영실의 작업실에서 금속활자가 발견되고 한글을 보게 되면서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영실에게 가서 떠보지만 장영실이 모르쇠를 취하자 계속 이러면 주상도 위험해진다고 겁박한다. 이후 어가가 부서지고 세종이 신하들을 모아두고 숭명파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가던 중 금속활자와 한글을 거론해 세종과 단독으로 대면하고 이후 한글 창제를 하면 사대부들이 전부 왕과 대립하게 될거고 그러면 이루고자 하는 국가를 만들 수 없을 거라며 한글 창제를 포기하면 장영실을 사면하는데 도와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하여 세종의 숭명파 숙청 시도를 좌절시킨다. 이후 국문때 장영실의 공을 봐서 사면해주자며 먼저 거래를 제안하고 장영실을 포기하지 못하던 세종이 따르려던 순간 장영실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면서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최근에 황희의 부정부패 등 부정적인 면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영향인지, 기존 드라마에서의 대인배적이고 착한 면모와는 정반대의 노회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간신으로 나온다.

5. 이야깃거리

  • 한 때 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했을 때, 급한 성품을 고쳐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북방에서 조정으로 복귀한 김종서가 황희가 들어왔음에도 모른 척 비뚤어진 자세로 있다가 '저놈 의자 다리가 한 쪽 망가진 모양이니 고쳐줘라'라는 한 마디에 바로 정좌했다카더라. 다른 이야기로,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이 한창 정무 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자 김종서가 음식상을 차려서 정승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황희는 "관료들을 접대하는 일은 조정의 예빈시가 맡는 일인데 왜 멋대로 월권 행위를 하는가?"라며 김종서를 호되게 혼을 냈다는 야사이다.
  • 임진왜란 직전 통신정사로 파견된 우송당 황윤길은 그의 5세손이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준비중이라고 강력하게 조정에 경고했으나 당파싸움에 밀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런데 은근 평이 나쁜데 선조수정실록에서 황윤길과 허성은 재물만 밝히거나 겁을 먹어 왜인들이 비루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었기 때문.[24]
  • 춘향전의 중요한 무대인 광한루를 세운 인물이다. 1419년 황희가 양녕대군 옹호 문제로 파직되고 남원으로 유배를 왔을 때 지었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광한루는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재건한 것. 춘향전의 시기가 숙종 즉위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대가 되는 광한루는 신감이 재건한 광한루로 보는 것이 맞다.
  • 정치인 중 동명이인이 존재한다. 본인이 이름 덕에 고령층에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6. 관련 유적지

경기도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황희 정승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지로 유적지 안에 반구정과 방촌 영당, 방촌 기념관 등이 있다. 방촌유적지라고도 한다. 현대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임진강 민물장어 식당촌으로 더 유명하지만 반구정 이름의 유래 자체가 황희 정승 유적지다.

황희의 묘소는 이 곳에 없고 대신 파주 탄현면에 그의 묘소가 따로있다.

6.1. 반구정(伴鷗亭)

1449년 황희가 87세의 나이로 정승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파주에 머물렀을 때 임진강변에 지어놓은 목조 정자. 임진강에 날아온 갈매기와 벗삼아 나누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황희가 말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정자로 그가 89세를 일기로 운명한 이후 유림들과 사림들이 황희를 추모하는 정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남침 및 임진강 도강(導江) 때 파괴되어 멸실되었다가 1967년 황희 후손들이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진강을 바라보는 운치가 있는 곳이었지만 지리적으로 북한 개성개풍군 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라 임진강 주변에 철책선이 있고 육군 경계초소가 있어서 군사적인 긴장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대낮에만 풍경을 볼 수 있는 편으로 밤에는 아쉽게도 풍경을 직접 볼 수 없다. 이 때는 초소 초병들이 경계목적으로 서게 되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일몰 및 저녁 이후에는 반구정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편.[25]

[1] 깨끗한 모사본 반신상(半身像)도 있다.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서양화 기법을 더하여 그린 판도 있다.[2] 음력 1363년 2월 22일[3] 음력 1452년 2월 8일[4] 한자 그대로 오래오래 살라는 뜻으로 어린 시절 몸이 약하여 양친이 장수를 기원하며 지어준 이름의 덕을 받았는지 실제로 오래 살았다.[5] 현존하는 대다수의 장수 황씨들의 시조격이다.[6] 이 당시만 해도 적서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물론 얼자 정도면 얘기가 약간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7] 이때 황희에게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사람은 그대라고 생각했거늘..." 이런 식으로 맹비난했다.[8]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11월 27일(신해)출처[9] 왕들은 격무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고, 대체로 운동 부족이라 세종처럼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아 장수한 경우가 의외로 드물다. 왕은 새벽 3~4시에 일어나 왕실 어른 문안부터 시작해서 조회, 서류 검토 및 결재, 경연과 같은 일정을 쉬지 않고 소화한 후 밤늦게 잠들었다. 사냥이나 여러 잡기를 통해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후대로 갈수록 쉽지 않았다. 46년 동안 재위한 숙종(조선)이나 52년 동안 재위한 영조는 예외적인 경우다.[10] 신창현.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이 신창현이 맹사성의 고향 동네여서, 황희의 부탁을 받은 맹사성이 신창현과 그 주변 고을의 현감들에게 사건 무마를 지시한다. 물론 나중에 세종에게 다 들통나서 황희, 맹사성과 신창현감, 신창현 주변의 5개 고을의 현감이 모조리 파직당한다.[11]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장의 사위이며 국방부 장관의 아들이 지나가다 업무를 보러 가던 지방공무원 실장급을 인사 안 한다고 갑질이나 폭행을 저지르고+그걸 말리려고 한 동료 실장급을 폭행치사시켜 유가족에 고소당하고+경찰에 입건되자 국회의장이 유가족 친척을 구워 삶아 유가족을 협박하여 보상금과 합의해줄 터이니 고소를 취하하고+무마시켜달라고 폭행이 일어난 지역 검찰경찰, 지방법원에게 사건을 은폐 축소시켜달라고 청탁하는 격이다. 그리고 범죄기록 공문서를 조작하여 없던 것을 만들다가 국민들에게 들킨 꼴이다.[12]살인사건 은폐 목적의 공무집행방해&공문서위조&공갈협박&뇌물공여&법질서교란 등등... 게다가 당시 기준으로는 이거, 엄청난 기군 망상이다. 즉 걸리면 그냥 사약 먹거나 목 졸려서 곱게 가는 것도 아니고 저자에서 목이 잘리거나 사지가 찢겨 죽어도 할 말 없는 중죄다. 현대에 이런 짓을 벌였다면 자신의 이름을 딴 게이트가 대서특필되며 징역 수십년~무기징역 폭탄을 맞을 거다.[13] 현대 대한민국은 국가의 행정작용의 연원이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에서 나오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행정작용의 연원이 왕에게서 나왔다. 따라서 현대법에서 국가적 법익에 대한 죄로 해석되는 죄들은, 조선시대에서는 왕을 능멸한 죄가 된다. 더군다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왕에게 진심어린 충성을 바치지 않는 모든 행위가 반역으로 취급되었다![14] 황수신이 사마시를 보러 갔을 때 시험관이 답안을 보고는 대놓고 시험 보러 왔냐 놀러 왔냐라고 할 정도로 모욕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황수신은 이후 각고의 노력을 하며 공부를 한 끝에… 음서로 관직에 나간 것이다.[15] 심지어 이건 일반적인 수준의 치부가 아니다. 저 아산 지역은 국유지이고, 일 시켜 먹은 사람은 공노비다.[16] 덧붙여서 이 황희의 아들 셋 중에서 두 명은 계유정난 후 세조를 지지했다. 정작 황희는 세조와 맞선 김종서를 키우고 후사를 맡겼는데... 어쨌든 황희 집안의 유능함에서였는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은 태종, 세종, 세조 세 임금 모두 황희와 자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고 곁에 두었다.[17]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박포의 처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친 것을 황희가 모처에 숨겨주었고 이것이 와전되어 황희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묘사한다.[18] 당연하지만 황희를 존경스러운 조상으로 모시는 장수 황씨 대종회 등에게 있어서 이호문은 천하의 개쌍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론 매체 등에서 "충격! 청백리 황희의 본모습?!" 같은 식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게 다 이호문 때문이다." 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호문 건에 대해서만 그런 거지 위에 서달의 이야기 등등은 빼박이다.[19]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장기간 영의정 재임이다. 덧붙여 가장 많이 임명된 인물은 숙종 때의 최석정으로 무려 9번이나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소론이었기에 사직을 반복..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대표였던 최명길의 손자.)[20] 한마디로 "속곳도 제대로 못 입고 결혼도 못하고 어렵게 어렵게 살고 있는 황정승네 따님을 도와주진 못할 망정, 남 일이라고 뒷짐 지고 서서 청렴하네 뭐네 위선이나 떠는구나. 참 잘나셨다."[21] 재미있는 게 이 드라마에서 태종 이방원을 맡은 배우가 <태조 왕건>에서 궁예종간으로 호흡을 맞춘 김영철이다.[2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뿌나에서는 백윤식이 태종 역으로 나온다.[23] 이 작품의 태종이 워낙 한 터프하다. 시작부터 면전에서 땡깡부리는 양녕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리질 않나(...) 옆에다 철봉 두고 턱걸이를 하면서 정무를 보질 않나(...)[24] 황윤길의 당색은 서인. 참고로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후 북인의 편향적인 시각이 담긴 선조실록에 반발해 반정세력인 서인들이 편찬한 것이다. 즉 황윤길은 같은 서인들한테도 비난을 받은 것이다.[25] 사실은 황희선생 유적지라는 곳에 반구정이 있는데 유료 입장인데다가 겨울철 17시 이후(여름철에는 18시 이후)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