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6:28:18

후키아게 사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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吹上佐太郎

1. 개요2. 생애3. 체포 이후

1. 개요

일본 제국살인범. 일본 최초의 연쇄살인범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1889년 2월 교토시 니시진[1]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지금으로 치면 알코올 의존증이 의심될 정도로 술고래였던데다, 술에 취하면 아이들이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등 난잡한 생활을 했다. 이런 부친을 지켜보며 자란 후키아게는 고작 7세부터 여동생의 성기를 만지는 등, 자연히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9세 때 집에서 쫓겨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했지만 어디서도 오래 가지 못했다. 하인으로 들어간 집에서는 돈을 훔쳐 달아났다가 해고당했고, 니시진의 다른 공장에서도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는 베틀집에서 일하게 되는데, 후키아게가 11세 되던 무렵 같은 베틀집에서 일하던 두 하녀에게 거의 매일 밤 역강간을 당하면서 지냈다.[2] 결국 이 사실이 탄로나 또다시 해고당하고, 다음에 취직한 곳에서는 5엔을 훔쳤다가 겨우 12세의 나이에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이 감옥 생활이 차라리 나은 삶이었다.

이후 니시진의 다른 베틀집에서 일했지만 전과자라는 사실이 탄로나면서 또 해고당하고, 이후에는 오사카에서 노숙 생활을 하며 도둑떼에 가담했지만 얼마 못 가 도망나왔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와 도둑질을 하다가 다시 수감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남색에 빠지면서 어린 시절부터 싹텄던 일그러진 성인식은 한층 더 어긋난 방향으로 폭주한다. 출소 후에도 절도를 저질러 수감되기를 반복하던 그는 17세 때 만난 여성에게 거의 1년 가까이 성적인 관계를 강요당했는데, 그 동안 주로 자신보다 연상의 여성들에게 희롱당하던 그의 생활은 이 시기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후키아게는 이 여성의 11살 난 딸에게 손을 댄 뒤 본격적으로 강간살인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인근 공장의 여공들과 동네 처녀들을 강간, 징병검사를 받기 직전 금각사 뒷산에서 소녀를 강간한 뒤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약 10년간 수감되었다가 1922년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자유의 몸이 된 후키아게는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하다[3] 관동지방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그는 그 동안 억압되었던 성적 욕구를 분출하기라도 하듯 이바라키, 치바, 군마, 나가노, 사이타마, 가나가와 등지를 전전하면서 11세에서 15세의 소녀들을 강간, 그 중 일부를 살해했다. 끔찍하게도 그는 단순히 강간에 그친 피해자는 '생이별', 살해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별'이라고 표현했으며,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피해자를 주로 살해했다고 후에 진술했다.

그렇게 연쇄 강간살인을 저지르던 후키아게는 1924년 7월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까지 그에게 강간당한 피해자는 무려 27명에 달했으며, 그 중 6명을 살해했다.

3. 체포 이후

후키아게는 체포된 이후 경찰 조사에서 13명을 죽였다고 자백했으나 형사에게 '속았다'고 진술했다. 예심 종결 결정에서는 3건의 강간살인만 인정되었는데, 이에 대해 후키아게는 '3명이 아니라 6명'이라고 주장하면서 재판관을 조롱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이후 마에바시 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1926년 7월 상고가 기각되면서 그대로 판결이 확정, 2개월 후인 9월 28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37세.

옥중에서 서양 철학 서적과 문학서를 독파하면서 공부한 끝에 원고지 3천 장 분량의 자서전 <사바(娑婆)>를 출간했으나, 출간과 동시에 발행 및 배포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책 자체는 사실상 구할 수가 없고, 전자책판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에서 자료 송신 서비스 한정으로만 공개되고 있다.
[1] 현재의 교토시 카미교구에서 키타구에 이르는 지역의 총칭으로 정식 행정구역명은 아니다. 예로부터 일명 '니시진오리(西陣織)'로 불리는 고급 견직물의 산지로 유명하다.[2] 후키아게는 베틀집에서 일하는 동안 하녀들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하녀들이 그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3] 출소 후 터널 공사장, 시골의 유랑극단 등에서 일했지만 역시나 오래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