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07 10:15:38

힐질리시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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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아사나쿠틀룩/아사나골돌록(阿史那骨咄祿), ?~692
돌궐 제2제국의 초대 가한. 불졸록(不卒祿)[1], 힐질리시 가한(頡跌利施可汗)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

630년 동돌궐 멸망 이후 당조는 이들을 자주 징발하여 점차 돌궐부중의 불만을 샀고, 특히 일부 상층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다.
679년 음력 10월, 단우도호부(單于都護府) 동돌궐 추장 아사덕온부, 아사덕봉직은 부를 거느리고 아사나니슈프를 가한으로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배행검에 의해 진압된다. 그러나 이는 쿠틀룩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마음먹게 한 계기가 되었고, 결국 682년 17명을 이끌고 나가 돌궐족의 흩어진 부락을 모았다.

그의 수하들은 점차 7백여 명으로 모여 흑사성을 점령했다. 이후 부중을 다시 5천여 명으로 증가된 데 이어 부하들을 거느리고 철륵을 복속시킨 뒤 양과 말을 대량으로 얻으면서 세력이 강성해졌다. 때가 무르익자 막북의 욱독군산(몽골의 오르혼 강에 있는 항애산)을 점령하고 치장을 설치하고 돌궐정권을 재건해 힐질리시 가한으로 칭하였다. 그는 흑사성을 남아로 삼고, 동생인 묵철을 그 곳의 관리로 삼았다.

여기서 아사덕돈욕곡이 당에서 관리 생활을 하였으나 쿠틀룩이 반란을 일으키자 쿠틀룩에게 합류한다. 그는 당나라 관리로 있는 동안 당조의 변방의 허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특히 당 황실이 궁중의 내분으로 인해 약화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조의 내분을 틈타 당을 공략하여 많은 성과를 얻었다.[2], 이후 톤유쿡과 함께 당을 공략하여 병주와 단우도호부의 북쪽 국경을 공격하여 란주자사 왕덕무를 죽이고 정주를 약탈하는 등의 성과를 얻으나 설인귀에게 저지당한다.

684년 음력 2월 12일 군사를 이끌고 정주를 공격했으나 자사호왕 이원궤(李元軌)에게 밀렸고, 2월 17일에는 군사를 돌려 규주를 공격했고, 음력 3월 2일에는 단우도호부(單于都護府)를 포위하여 사마장(司馬張)을 포로로 잡았다. 측천무후는 승주도독 왕본립과 하주도독 이숭의에게 군사를 이끌고 이를 구원하게 했다. 음력 5월 18일 울주 이사검(李思儉)을 죽였다. 풍주도독 최지변은 부대를 이끌고 아사나산 북쪽으로 향했으나 쿠틀룩 군대의 반격을 받아 포로가 된다. 측천무후는 돌궐의 거센 공세에 풍주를 버리려다 당휴경이 반대해 풍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음력 6월 란주를 약탈하다가 양현기(楊玄基)[3]에게 패한 이후 음력 11월 정무정에게 저지당한다.

684년 음력 7월, 무측천은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으로 강등시켰고, 이단을 황위에 올렸다. 쿠틀룩이 이를 틈타 당을 공격했으나 정무정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정무정이 숙청당하고[4][5] 얼마 후 정무정과 친했던 하주도독 왕방익[6]도 왕 황후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유배되던 와중 유애주에서 죽었다. 이로써 당 왕조는 북부 국경에서 쓸 만한 장수가 없게 됐다.

이를 이용해 수공 원년(서기 685년) 음력 2월 여러 차례 당나라 북쪽 국경을 교란했다. 수공(垂拱) 2년(686)에 삭주와 대주를 공격하는 등 당이 연전연패하자 무측천은 순우처평(淳于處平)을 양곡도총관(陽曲道總管)으로 삼아 부장(副將)인 중랑장 포영절(蒲英節)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가게 해서 군대가 흔주(忻州)에 이르렀는데, 5천 명이 죽는 등 대패한다.

이처럼 당군이 연전연패하는 등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흑치상지에게 대패하고, 그럼에도 끈질기게 당을 공격했으나 흑치상지에게 저지당하고 만다.[7]

그러나 찬보벽이 흑치상지의 명령도 듣지 않고 별도로 군을 이끌고 돌궐군을 공략하나, 대패하고 결국 참형당하고 만다. 대패 소식에 화가 난 무측천은 쿠틀룩을 불졸록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서역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이를 틈타 측천무후가 689년 음력 5월 18일, 승려 설회의로 하여금 돌궐을 공략하라고 명하였으나 돌궐군을 만나지 못했고, 단우대에 석기공을 새기고 돌아왔다. 음력 9월 3일 설회의가 다시 20만 대군을 이끌고 정벌하려 했으나 돌궐군을 조우하지도 못했다. [8]

690년 음력 9월, 무측천이 무주의 건국을 성포함으로써 성신황제라는 존호를 받았고 이를 틈타 다시 출병 준비 중 691년 음력 11월 병사했다.

묵철이 가한 자리에 오른 뒤[9], 돌궐 제2제국의 국력은 절정에 달한다.
[1] 측천무후가 쿠틀룩을 불졸록이라고 불렀다.[2] 이경업이 반란을 일으켜 무측천이 이를 진압하고, 토번과 서돌궐이 당의 서북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3] 이후 신병도행군 소속에서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할 때 이해고, 낙무정을 항복시키는 그 양현기 맞다.[4] 서경업의 난에 연루되어 숙청당했다. 정무정이 배염을 변호하자, 주위 사람들이 정무정은 서경업과 한패라고 무고했고, 무측천은 정무정을 확증도 없이 숙청하였던 것이다.[5] 후돌궐의 지배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죽자 잔치를 베풀어 기뻐하면서도 정무정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출병할 때마다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6] 서역을 되찾고 쇄엽성을 건설했다.[7] 여기서 말갈 후예의 당나라 번장인 이다조가 흑치상지의 수하로 활약했다.[8] 그해 음력 9월 주흥의 무고에 의해 흑치상지가 투옥되자, 흑치상지는 감옥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9] 본래는 빌게가 가한 자리에 올랐어야 했으나, 빌게와 퀼테긴이 나이가 어려 묵철이 가한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