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54:30

5.16 군사정변/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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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정
1.1. 00:00 경1.2. 02:00 경1.3. 03:00 경~1.4. ~03:40 경1.5. 04:00 경1.6. 04:20 경~1.7. 05:00 경1.8. ~06:00 경1.9. 07:00 경 ~1.10. 09:00 경~1.11. 10:00 경1.12. 10:18 경1.13. 10:30 경~1.14. 12:30 경~1.15. 오후1.16. 16:30 경1.17. 17:00 경1.18. 17:30경1.19. 22:30

1. 과정

아래 내용은 윤보선의 회고록에 근거한다.[1]

원래 박정희는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을 뒤집어 엎으려는 마음으로 1960년 5월 8일을 쿠데타일로 정하고 당시 포항 해병대 제 1사단장 김동하 소장, 부산 고사포 대대장 홍종철 중령 등의 부산 부근의 친분있는 장관, 영관급 참모들을 기용하고 당시 군의 인망이 높았으나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다 이승만 정권 내내 한직을 떠돌던 육군대학 총장 이종찬 장군을 추대하려는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들이 쿠데타 계획일을 5월 8일로 정한 이유는 5월 5일에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미국의 초청을 받아 방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4월 19일에 학생과 시민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개시했고 이들의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뒤에도 박정희는 육사 5[2], 8[3], 9[4]기생들은 물론 자신이 만주군에 복무할 당시 알고 지내던 장군들[5]을 은밀히 계속 만나면서 쿠데타 계획을 계속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들은 4.19 1주년인 1961년 4월 19일, 데모 세력과 가담하여 청와대로 진격하려 했지만 도저히 데모가 격화되지 않자 계획을 5월 12일로 연기하고 만다. 그러나 정보 누설[6]로 재차 연기되어 5월 16일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5월 16일 박정희는 마침내 청와대, 방송국, 육본을 위시로 한 서울의 주요기관을 차례로 점령하기 위해 육사 8기생 중령들과 궐기하여 영등포 제6군관구사령부를 제1지휘소로 삼고 서울 남부 부평에 주둔한 제33사단, 서울 서부 수색에 주둔한 제30사단, 서울 동부의 육군 6군단 포병대 5개 대대, 육군 제1공수특전단[7], 대구, 광주, 부산 등에 주둔한 여러 전투부대, 육군본부의 일부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관할 밖의 김포 주둔 해병대 제1여단[8] 등 6천여명 이상의 군인을 동원하였다.[9]

1.1. 00:00 경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영등포 제6군관구사령부를 장악한다. 원래 박정희는 전 날 10시에 6관구에 나타나야 했지만 30사단에서의 정보누설로 인해 육군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의 여관에 가는 등 시간을 끌었고 심지어는 술까지 마시고 6관구사령부에 나타났다. 동시에 장도영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출발한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이 CID(육군방첩대)병력과 헌병대 병력을 끌고가 6관구 사령부를 포위하고 김재춘 대령등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모의를 주도한 영관급 장교들을 모두 체포하려고 하지만 김재춘 대령은 기지를 발휘해 이광선 대령에게 이미 혁명군의 궐기가 시작되어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이미 전세가 혁명군에게 넘어갔으니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선 6관구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이광선 대령을 설득하였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당시 연회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광선 대령으로서는 상부로부터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김재춘 대령의 설득에 넘어간 이광선 헌병차감은 혁명군의 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그 직후 박정희가 00시에서 01시경 사이에 상술한 바와 같이 6관구 사령부에 도착하게 되고 김재춘의 설득에 넘어간 이광선 대령과 헌병대 병력은 박정희에게 지지의사를 그 자리에서 표명하고 6관구 휘하 병력이 궐기에 가담하는 것을 눈감아 주게 된다.[10] 비슷한 시각 해병대 일부가 박정희와 합류하기 위해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김포를 비워두고, 한강을 타고 남하해 서울특별시로 향하기 시작한다.

1.2. 02:00 경[11]

장도영 육참총장이 총리 집무실이 위치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809호실[12]에 전화를 걸었다. 이에 전화기를 받아든 장면 국무총리는 장도영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염려할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장면은 "1주일 전에 내가 말한 것 아니오"하며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는지를 물은 다음, 보고했다는 대답을 듣고선 "내게 직접 와서 사건을 자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1.3. 03:00 경~[13]

3시경, 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주한미국대사 대리 마셜그린이 있는 곳에 전화를 걸어 반란 소식을 전했다. 둘은 쿠데타와 미국은 무관하며[14] 결코 지지하지 않음을 서로 확인하였다.[15]

그와 비슷한 시각, 육군참모총장 장도영도 국방장관 현석호의 자택에 전화를 걸어 반란 소식을 전하고, 육군 방첩대 서울지부에 있으니 나와달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현석호는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을 찾으려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자[16]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린 뒤 장면을 만나러 반도호텔로 향했다.

1.4. ~03:40 경

전날 행동을 개시한 6군단 포병단이 남산까지 남하하여 마침내 육군 본부를 장악한다. 한편 박정희한강 건너의 헌병과 1시간 가량 대치를 벌인다.[17]

1.5. 04:00 경

박정희: 만약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서 사죄하고 전원 자결할 것을 맹세합니다.

장도영: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거요.

박정희: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양해 해주십시오. 그리고 혁명의 지도자가 돼주십시오.

장도영: 장면 정부에 대해 경고하는 정도로 그치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돼요. 박 장군, 안 그렇소?

이때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쿠데타를 승낙하고 진두지휘해 줄 것을 간청하나, 장도영은 끝끝내 거절한다. 이후 장도영은 "군이 시내에 들어왔고 진압될 것 같지 않다"는 소식을 장면윤보선에게 전했으며 곧바로 주한미군 사령관 겸 UN군 총사령관 겸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에게 "폭동인지 반란인지가 일어났다"고 보고하였다.

박정희의 증언에 따르면, 네다섯 차례나 미 육군 제8군을 왕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장도영은 장면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도호텔 로비에 있으니 곧 간다고 거짓말 하였다고 한다.

1.6. 04:20 경~[18]

국방장관 현석호는 총리 집무실로 향하던 도중 총성을 듣게 되었다. 이에 현석호 등은 검찰총장 이태희 등과 함께 장면을 피신시키려 하였다. 이에 장면은 이렇게 말하였다.
장면: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피한단 말이오. 이곳에 머물면서 사태를 두고보겠소.
조인원, 현석호 등: 각하, 로비에 있다고 전화한 장도영이 20분이 지나도 안 오는 걸 보면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피신을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약 4시 30분께 장면과 장면의 아내 김옥윤, 경호대장 조인원 그리고 운전기사 총 4명을 차에 태워 피신케한 뒤 집무실에는 의전 비서관 이홍렬을 남겨 총리와 정부간의 연락망을 맡겼다. 그 뒤, 총리와 함께 있던 검찰총장 이태희, 경감 조인원, 국방장관 현석호 등은 이내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고 하며 총리 집무실에는 음모론자들이 5.16의 배후로 지목하는 CIA한국지부장 드 실바의 전화가 걸려왔고 이외 재무장관 김영선, 경향신문사장 한창우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장면이 떠난지 10여분 뒤에는 장면 체포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박종규와 특수부대(GDT)가 들이닥쳤다. 이 과정에 5.16 쿠데타세력은 장면의 발빠른 대처로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이홍렬을 체포한 뒤 장면과 연락을 취하기로 한 전화를 빼앗아 낼 수 있었다.

한편 새벽 4시에서 새벽 5시 사이 대구는 이미 군 쿠데타세력 수중에 떨어졌다.[19] 경북도청과 경찰국 및 경찰서 3개, 소방서, KBS 대구방송국 등이 반란군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어 경북도청을 비롯, 경찰국과 경찰서 등 주요 기관에 무장 군인이 수십명씩 배치되었다.#1 #2

1.7. 05:00 경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隱忍自重)[20]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21]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육군본부와 중앙방송국(KBS 라디오) 5시 뉴스가 군사혁명을 알렸다.당시 중앙방송국 라디오 중파 AM 710KHz를 통해 방송된 혁명공약 육성(자동 다운로드)[22][23][24]

실제로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장악하지 않았음에도 방송을 통제하고 이를 알림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착시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원엽 등 5.16 주체세력은 L-19 연락기 5대를 이용해 혁명공약과 시민은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내용을 담은 삐라 10만장을 서울시내에 대대적으로 살포하였다.


당시 대한뉴스에 보도된 혁명 공약.

1.8. ~06:00 경

장면은 차를 타고 안국동 주한미국대사관저 등으로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아내를 자녀와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 시킨 뒤 자신은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25]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수녀원에 들어간 시간이 반란 보고를 받은 뒤로부터 4시간이 지난 6시 즈음이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미국의 변명과는 다르게 장면은, 총리 집무실의 이홍렬이 체포되고 이홍렬과 연결된 비밀 전화 역시 반란군에 몰수당했음에도, 외부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하며 5월 16일 당일 미 대사관과 차분하게 통화를 주고받았으며[26] 이후로도 여러 사람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 받았다.[27]

1.9. 07:00 경 ~

경향신문에 따르면, 새벽 7시를 기해 부산에 주둔 중이던 헌병 2개 중대가 부산 내 주요시설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들은 완전무장한 채로 대기하다가 약 10시 30분부터 2개 중대가 KBS 부산 방송국, 남전 부산지점(발전소), 부산 전화국, 코스코 유류 저장소 등에 나타나 이를 경비하기 시작하였다. 경남도청과 경찰국 등 관공서 또한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산시내 도청, 법원, 검찰청, 시청 등에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1 #2

1.10. 09:00 경~

박정희: 대통령 각하, 이렇게 근심을 끼쳐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젊은 몸입니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 일념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와 방송국을 위시해서 서울 전역이 지금 혁명군 수중에 들어와 있고 계엄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윤보선: 그대들을 못 믿겠소. 그대들이 만일 애국하기 위해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소. 나로서는 아직 그대들의 충성을 액면 그대로 이해할 수가 없소. (...) 진정 애국에서 나온 일이라면,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저희가 이미 선포한 계엄령을 추인해 주셔야겠습니다.

윤보선: 헌법상 대통령이 계엄령을 추인하게 되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선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오. 이제 와서 추인한다는 것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5.16 주체세력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제거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했는데, 대통령을 살려두기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육군소장 박정희, 대령 유원식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공군참모총장 김신, 해병대사령관 김성은 그리고 반도호텔에서 국무총리 장면에게 피신을 권고한 국방장관 현석호를 끌고 오전 9시 청와대 응접실에 찾아가 대통령 윤보선을 불러내 대통령이 계엄령을 추인하도록 설득하였다.[28]
박정희: 우리들은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이번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주십시오.

윤보선: 그게 무슨 소리요. (...) 여하튼 쿠데타가 일어난 이상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통고하는 것이오.

박정희: 대통령께서 그러시면 안됩니다. 계속 집무하시면서 사태를 원활히 수습해 주십시오.

그러나 윤보선의 완강한 거부에 의해 대통령의 계엄령 추인은 이루어지는 않았고, 소장 박정희, 대령 유원식 둘만 남고 3군총장을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청와대에서 퇴장한 뒤, 이번에는 대통령에게 혁명 지지를 부탁하나 실패하고 오전 9시 30분 마저 철수한다. 근데 이건 윤보선의 주장이었고 당시 주체이던 유원식[29]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저희가 이미 선포한 계엄령을 추인해 주셔야겠습니다.

윤보선: 이미 계엄령을 선포했다면 다시 추인을 해서 뭘 하겠소. 더구나 책임자인 장면 총리도 없는데.

박정희: 아닙니다. 대통령께서 추인만 해 주시면 3군 총장께서 우리 혁명에 동참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때 유원식이 나섰다.
유원식: 대통령 각하. 유원식입니다. 절 모르시겠습니까?

윤보선: 왜 모르겠나. 유 대령 아니신가.

유원식: 그렇습니다. 저희는 여기 장관에게 추궁을 받으러 온게 아니라 계엄령의 추인을 받으러 온 것 입니다. 각하께서는 민주당은 염두에 두지 마시고 계획대로 행동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원식은 즉, 윤보선과 사전 내통을 했다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윤보선이 민주당 구파출신으로서 정파를 달리하였기에 장면이 실각한 뒤 자신이 대신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원식의 증언이 인용되고는 한다.

대신 윤보선이 책임을 지겠다고 한 부분은 거의 동일하지만 윤보선은 계엄령 선포를 지지했다고 한다.
윤보선: 민주당 정권의 잘못은 나에게도 있으니 언제든지 물러날 용의가 있소. 그리고 계엄령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잘 한 것으로 압니다.

당시에 같은 자리에 있던 국방장관 현석호도 비슷한 발언을 했는데 윤보선이 쿠데타 주모자들을 "청년들의 애국충정에서 비롯된 거사" 라고 추켜 세우면서 자신에게 "장 총리는 미군, 국군, 국민들이 다 찾는데 어디 숨었길래 나타나지 않느냐. 너희가 그냥 정권 가져가라고 하는 거냐" 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윤보선과 유원식의 주장이 전혀 다르고 현석호와 장도영은 "윤보선이 쿠데타에 우호적이었다" 라고 해 진실은 저 너머로(...)

1.11. 10:00 경

연합참모본부가 북한이 휴전선 일대에 집결중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1.12. 10:18 경

미8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UN군총사령관 지위에서 그 휘하 모든 장병들에게 장면 총리가 수반인, 정당하게 인정된 한국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매그루더는 한국군 3군 총장들이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해서 통치권이 즉각 정부 당국에게 이양되고 군의 질서가 회복되도록 해줄것을 기대한다.

주한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30]: 자유롭게 선출되고 합법적으로 구성된 한국 정부를 지지함에 있어 UN군총사령관이 취한 입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조한다. 나는, 지난 7월 한국 국민이 선출했으며 지난 8월 총리선출에 의해 구성된 한국의 합헌 정부를 미국이 지지하고 있음을 강조하여 명백히 하고 싶다.

오전 10시 18분 미국 8군 대변인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뒤이어 미국 대사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8군방송과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만 보도됐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1.13. 10:30 경~

카터 매그루더: 혁명군을 진압해야 합니다.

윤보선: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오.

카터 매그루더: 지금 서울 시내에 들어온 혁명군은 대략 3,600명에 불과합니다. 제1군 산하 병력은 요지부동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구지방에서도 약간의 병력이 혁명에 참가했으나 현재 속속 원대로 복귀중입니다. 제1군 산하 병력중에서 3,600명의 10배인 36,000명을 동원하는 겁니다. 이 병력으로 서울을 포위하면 혁명군은 곧 항복할 것이고 이 사태를 진압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지금 장면 총리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다른 국무위원들의 소재도 알 수 없습니다. 국가원수인 윤 대통령께서 유일한 헌법기관이십니다. 대통령께서 병력동원에 동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셜 그린: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헌법을 지킬 책임이 있습니다. 헌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혁명군을 격파해야 합니다.

윤보선: 워싱턴의 동정은 어떻습니까?

마셜 그린: 케네디 미 대통령은 캐나다를 방문중이고 딘 러스크 국무장관도 라오스 14개국 외상회의에 참석중이라 부재중입니다.

박정희가 물러가고 윤보선은 미8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와 마셜그린 주한미 대리대사를 청와대로 불러들여 2시간 가량 회담을 나눴다. 주요 쟁점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국군을 차출하는 것이 남한에 이로운가 아니면 북한에 더 이로운가 하는 것이었으며, 윤보선과 매그루더는 팽팽하게 맞섰다. 미국 정부는 5.16 이전에 이미 멀지않아 내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유사시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지시를 내려놓았다.

이에 윤보선은 북한의 동태를 근거로 하여 미군이 반란군 진압에 참가하는 것이 어떻느냐 물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원칙상 유엔군은 내전에 개입할 수 없고 유혈사태로 인한 북한의 침략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3~4만명으로 서울일원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군을 통해 삐라를 뿌리면 이렇다할 피를 흘리지 않고 3~7일 사이 진압할 수 있으며 8군 사령부 본부중대가 청와대 경호를 맡아 대통령의 안전 또한 보장해주겠다고 답했다. 또한 군 내부의 균열이 오히려 북한의 침략이나 그와 유사한 공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결국 헌법을 지켜도 적화되면 무용이라 판단하여 북한의 동태에 근거해 국군 동원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매그루더는 본부로 돌아간다.

1.14. 12:30 경~

마셜 그린: 이 쿠데타가 성공하면 한국은 아마도 장기간 군사통치를 겪게 될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합헌적인 정부만을 지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군사혁명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윤보선: 나도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이것을 수습하는 방법에 있어서 당신네들과 의견이 다를 뿐이오.

마셜 그린: 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은 "대통령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매그루더와 함께 윤보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마셜 그린은 매그루더가 돌아가자 오후 2시까지 윤보선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 대해 논의하며 오찬을 가졌다. 그러나, 윤보선은 장면총리와 한국의 각료들이 어디있는지 알지 못했고, 마셜그린은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부재중이라 확신을 주지 못하면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1달 전인 4월 16일 미국 행정부는 CIA의 주도하에 쿠바 반체제 망명자들로 구성된 1,500명의 특공대를 쿠바 피그만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시도했으나 이 작전이 실패하면서 케네디 정권은 국내외의 큰 비난에 직면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보울스 차관보를 비롯한 행정부 정책보좌관들은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못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나중에 한국의 소식을 듣고 극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마셜 그린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워싱턴의 당황한 태도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생각은 워싱턴이 좀더 빨리 내 위치를 지지한다는 공식입장을 표명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1.15. 오후

카터 매그루더: 쿠데타는 소규모 군인들이 취한 불법행위이다. 쿠데타 군은 쳐부숴야 한다. 한국의 제1군과 미국 기갑사단을 동원시키기로 한다.
대통령 윤보선을 만나고 군으로 돌아온 미8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는 긴급작전회의를 열고 장군 존 라이언과 제1군 사령관 중장 이한림에게 쿠데타 진압 명령을 하달하고 미합참으로부터 작전 승인을 기다렸다. 이에 이한림은 원주 1군 사령부에서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유혈 방지에는 동의하지만 혁명은 지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소식은 오후 청와대에 전달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대통령 각하,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참모총장인 제가 계엄사령관을 맡아야 한다고 합니다. 수락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엄은 국무회의를 거쳐 국무총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구실로 분명히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즉각 결심하지 않으면 육군본부를 폭파해 버리겠습니다.

대통령 윤보선: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는 그래도 장도영 총장이 적격이라 생각하오. 일단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락하고 봅시다. 군사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계엄사령관을 맡게 되면 사후 수습에 원활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오. 이런 점을 배려해서 우선 다급한 불부터 잡도록 하시오. 장 총장이 맡는 것이라면 무난하리라 여겨지오.
5.16 주체세력으로부터 협조를 강요 받은 장도영윤보선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한다. 이에 윤보선은 민주당 각료들을 위할 때 민주당에서 임명받은 자가 군부의 전권을 쥐는 계엄사령관에 오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내다보았다.

한편 윤보선은 참의원 백낙준,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 조선일보 회장 홍종인 등을 불러 자문을 구했는데, 희생을 줄이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였으며 서울의 군봉기 사태는 대통령이 수습할 것이니, 야전군은 동요하지 말라,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출동 저지 서한을 작성하기로 했다. 서한은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작성되어 제1군 사령관 이한림, 군단장 최석, 박임항, 김웅수, 임부택 등에 보내게 된다.

1.16. 16:30 경

장도영군사혁명위원회의장직과 계엄사령관직을 수락하다.

1.17. 17:00 경

미국시간 으로 새벽 3시 경. 백악관에서 성명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1.18. 17:30경

국회(민의원과 참의원) 해산을 명한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국무위원과 정무위원은 모두 체포한다.

헌법기관 중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구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한다.

포고 4호

1.19. 22:30

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있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에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 나라의 일을 판단해야 하며, 희생없이 최선의 방법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우리의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 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중대한 사태에 처해서 혼란방지와 질서유지에 국민 여러분들이 특별히 노력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장 총리 이하 모든 국무위원등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국무위원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합니다.

윤보선장도영을 통해 민주당 각료들의 신변보장을 약속받은 것을 근거로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사를 방송을 통해 전달하게 된다.

[1] 참고로 대한민국 표준시 문서에 나와있듯이 당시에는 현 UTC인 GMT+08:30 시간대를 썼다. GMT+09:00 시간대를 쓴 것은 박정희 본인이 집권한 1961년 8월 10일부터다. 따라서 현재 기준보다 30분가량 늦다.[2] 대표적으로 김재춘이 있다.[3] 8기는 쿠데타의 주류로서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등이 있다.[4] 9기생으로는 강상욱 등이 있었다.[5] 예시로 해병대 1여단장이었던 김윤근 준장이라던지.[6] 쿠데타 가담자 중 김덕승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사업가 오인환을 만나 지원을 받으려다 역으로 이들의 만남이 서울시 경찰국에 정보가 입수되어 오인환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체포 연행되는 바람에 16일로 연기되었다. 이후 김덕승은 거사일이나 계획을 심문을 받으면서도 불지않아 이 공로로 5. 16 직후 박정희 정권 때 한국마사회 회장을 지냈다.[7] 현재는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이다.[8] 현재는 해병대 제2사단이다.[9] 다만 30, 33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일부 병력이 출동하지 못했다.[10] 만약 이광선 대령이 김재춘 대령의 말을 믿지 못하고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크게 달려졌을 수도 있었다. 박정희는 이미 여관에서 6관구 사령부로 출발할때 김재춘 등 휘하 영관급 장교들이 모두 체포되어 있는줄 알았고 혁명은 어쩌면 실패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도 진짜 체포당할 각오를 하고 여관에서 출발한 상태였으나 김재춘의 설득이 생각보다 잘 통해서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광선 대령이 여기서 쿠데타 모의 세력들을 체포하려고 행동을 강행했다면 병사들 간의 유혈사태가 발생하게 되겠지만 쿠데타 주요세력을 일거에 소탕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11] 제2공화국과 장면, 이용원 p.248[12] 2공화국 초기 청와대에는 윤보선이 기거하고 있었고, 총리 공관은 없었다.[13] 제2공화국과 장면, 이용원 p.248~9, 260[14] 쿠데타가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음모론 우려. 5.16이 있기 불과 3주 전에 미국은 1500명의 특공대를 쿠바 피그만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15] 지지하지 않으면 사주 의혹을 받을 수 있으니 지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마셜 그린과 대사관의 입장에 매그루더가 동의하였다. - 각주의 내용은 다음을 참고함. 정용석, 20년만에 공개한 4.19, 5.16 비화 마샬그린 인터뷰 신동아 82년 4월자 132면.[16] 이처럼 통신기술의 미발달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17] http://www.haebyeong.com/free/1656, 당시 군의 움직임[18] 제2공화국과 장면, 이용원 p.249[19] 후에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이 되는 이주일 소장이 주도했다. 그는 당시 2군 사령부 참모장이었다.[20]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으며 신중하게 행동함을 뜻하는 사자성어[21] 이는 쿠데타군이 군인들의 입장에서 발표한 군인 버전이고,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예비역 가담자들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민간인용 조항도 따로 존재한다. 라디오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정변 직후 시민을 상대로 게시된 대자보나 정기 간행물에 실려 있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22]KBS 제1라디오. 당시는 10KHz 주파수 스텝사용.[23] 방송 속 아나운서는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박종세(1935~)가 낭독했다. 1956년 KBS에 입사하였고, 1964년 동양방송이 개국하면서 이적하였다.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이 없어지게 되자 1980년 11월 10일 고별방송 사회를 보기도 했다. 동양방송이 KBS로 합병되면서 얼떨결에 KBS로 복귀, 방송주간으로 있다 1983년에 은퇴하였다.[24] 2011년 인터뷰당시 경험담을 보면 굉장히 강압적인 상황이었던듯 하고, 무력행동에 대해 두려웠음이 느껴진다. 동양방송 역시 5공화국의 방송통폐합으로 없어졌기 때문에 여러모로 역사의 산증인이다.[25]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1967년 현 위치인 강북구 인수동으로 이전했다.[26] 미 국부무 비밀해제 문서에 근거하면 2차례. 감사인사도 했다고 한다. 물론, 장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27] 16일에는 마셜그린이 성명을 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선 감사전화를 보냈으며 자신은 안전하니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17일에는 아침에 프랑스 대사로 추정되는 이가 장면의 편지를 직접 받아 주한미대사관에 건내주었고, 17일 오후에는 장면과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전화를 주고받았다. 18일 오전에는 장면이 직접 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취했으며 결국 정오 무렵에는 장도영을 만났다.[28] 장도영으로부터 쿠데타 발발 소식을 듣고 나서 5시간 뒤 군인들이 청와대를 찾아오자,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말했다. 하여,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윤보선이 5.16에 협력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윤보선은 이를 극구 부정했다. 윤보선은 이 발언에 대해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나를 찾아 이곳에도 왔다는 소식에 무심코 했던 말이었다"고 회고록에서 직접 설명했다.[29] 독립운동가 유림의 아들. 아마 유원식이 아버지의 인맥을 바탕으로 윤보선 등의 정치인들과 안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30] 대사 매카나기의 후임으로 사무엘 버기가 발령되었으나, 부임하기 이전이라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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