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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화친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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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00> 1853년 7월 8일 쿠로후네 사건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 체결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1858년 ~ 1859년 안세이 대옥
1860년 3월 24일 사쿠라다 문 밖의 변
1862년 2월 13일 사카시타문 밖의 변 (坂下門外の變)
1862년 5월 21일 사쓰마 번 지사 숙청 사건 (薩摩藩志士肅淸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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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기타

1. 개요

파일:미국 국기(1851-1858).svg 파일:에도 막부 국기.svg
미합중국[1] 에도 막부[2]
미일화친조약 | 美日和親條約
영어 Japan–US Treaty of Peace and Amity
일본어 [ruby(日米和親条約, ruby=にちべいわしんじょうやく)]
1854년 3월 31일 에도 막부(일본)와 미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가나가와[3] 조약(神奈川 条約)이라고도 부른다.[4]

1853년, 미국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명을 받은 페리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내항하여, 대통령의 개국·통상을 요구하는 친서를 가지고 막부에 이를 요구했지만 막부 측이 1년의 유예를 구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일시 해산한다. 이듬해 1854년 2월 13일, 다시 도쿄에 입항하여 협의를 했는데 일본측 전권은 외교관이자 주자학자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 1801 ~ 1859)[5], 미국측 전권은 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매튜 페리에게 일임되었다. 약 1개월 간의 협의 끝에 3월 31일, 총 12개조로 구성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다. 그 후, 현재의 시즈오카현 시모다시로 협상의 장을 옮겨 같은 해 6월 17일에 화친 조약의 세칙을 정한 시모다 조약(전체 13 개조)을 체결하게된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함으로써, 쇄국 체제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2. 내용

제 1 조
미일 양국·양 국민 사이에는 사람·장소의 관계없이 향후 영원한 화친이 맺어진다.

제 2 조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한다.(시모다는 즉시, 하코다테는 조약 체결 일년 뒤) 이 두 항구에서 식수, 식량, 석탄, 기타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받을 수 있다.
상품의 가격은 일본 관료가 결정하고, 그 지불은 금화 혹은 은화로 한다.

제 3 조
미국 선박이 좌초 또는 난파한 경우 승무원은 시모다 또는 하코다테에 이송되어 미국인에 인도된다.
피난민의 소유 물품은 모두 반환되며 구조에 발생한 지출에 따른 변제는 필요없다.(일본 선박이 미국에서 조난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

제 4 조
미국인 조난자 및 시민은 타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제비는 없으며 감금되는 정도는 아니나, 일본의 공정한 법률을 따를 필요가 있다.

제 5 조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임시 거류하는 미국인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과 중국인과는 달리, 그 행동 제한이 없다.
행동가능 범위는 시모다에서는 7리(里) 이내, 하코다테는 별도로 정한다.

제 6 조
기타 필요한 물품이나 동의에 관해서는 양 당사국간에 신중하게 심의한다.

제 7 조
두 항구에서 금화·은화를 통한 구매 및 물물교환은 가능하다.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 물품은 모두 가져갈 수 있다.

제 8 조
물품 조달은 일본 관리가 알선한다.

제 9 조
미국에 편무적(片務的)인 최혜국 대우를 준다.

제 10 조
조난·악천후를 제외하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이외의 항구에 내항을 금지한다.

제 11 조
양국 정부 중 하나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본 협약 체결 일로부터 18개월 경과 한 후 미국 정부는 시모다에 영사를 둘 수 있다.

제 12 조
양국은 이 조약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양국은 18개월 이내에 협약을 비준한다.

* 미국인의 이동 가능 범위는 시모다에서 7리 , 하코다테에서 5리 사방에 한한다. 무가·상가에 들어가는 것은 보류한다.
* 미국인에 대한 잠정적인 휴식처로 료센지(了仙寺)[6]·교쿠센지(玉泉寺)[7] 에 설치하고, 미군 묘소는 교쿠센지에 둔다.
* 미국인이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보류한다.

3. 기타

  • 일본이 서양세력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 이 조약의 기본 방침은 존 만지로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항목 참조.
  • 미국은 청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위해 태평양 항로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증기선에 보급을 위한 기항지로서 일본의 항구가 절실했다. 특히, 각기병​이나 괴혈병의 예방을 위하여 야채나 육류의 섭취가 필요했다. 또한 북태평양에서 고래기름을 목적으로 한 포경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자국의 포경 선원의 인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불편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페리의 통상 교섭이 이루어졌고, 무리한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모다·하코다테가 개항 항구로 선정된 것도 보급의 편의를 중시한 것이었다.
  • 이 조약이 체결되기 3년 전(1851년)에 출간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 24장에서는 쇄국 정책을 펼치던 일본에 대한 구절이 나온다. 이 조약을 맺게 된 계기가 포경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위에 나온 존 만지로 역시 14세에 고기잡이하러 나갔다 조난되어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인물이다.
만일 겹겹이 문을 걸어 잠근 나라인 일본이 방문객을 환대하는 날이 온다면, 그 공은 오로지 포경선에 돌려야 할 것이다. 포경선은 이미 일본의 문지방에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동네 판 모비 딕 1권 219페이지, 역자 황유원
  • 향후 수정되고 보완되는 미일수호통상조약과는 달리, 이 미일화친조약은 미국의 보급 기항지 필요성이 다급했는지, 개항이나 통상 등의 쟁점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는 조약은 아니었다.
  • 미국은 일본에게 개항과 통상을 요구했지만, 존 만지로에게 미리 들은 정보에 의하면 미국에게 개항은 시급한 사항이지만, 일본의 쇄국 정책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통상까지는 바라지 않을거라는 것이었다. 에도 막부는 페리 제독이 통상 문제를 꺼내들었을 때는 딱 잘라 거부했고, 페리 제독도 통상은 시기상조라 여기고 "통상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죠."라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 시모다 항의 경우, 고쿠센지에 첫 미국 영사관이 수립되고 러일통상조약도 여기서 맺어졌지만, 1859년 6월, 외국 교역을 위한 요코하마가 개항하면서 5년만에 닫히게 되었다. 하코다테는 지금도 일본의 주요한 항구이다. 시모다는 개항장 이전 후에도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미코모토시마 등대가 1870년 일본 최초로 건립되었다.
  • 일본어 조약서 원본은 에도 막부 말기 에도성 화재로 소실되었다. 조약서 원본 중 미국측 것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존한다. 위의 문서는 복제품이다.


[1] 1851년 ~ 1858년 미국 국기.[2] 개항을 계기로 만들어진 상선기인 대중흑기.[3] 현재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에 있는 개항광장을 말한다.[4] 일본에서는 이 명칭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일수호조규라는 명칭보다 강화도 조약이라는 명칭이 익숙한 것처럼 말이다.[5] 두개의 하야시 가문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후쿠사이는 두번째 햐야시 7대 가문 당주이다.[6] 시즈오카현 시모다시에 있는 일련종 사찰로 창건일은 1635년[7] 같은 장소에 있으며 조동종 사찰로 창건일이 알수 없지만 미일화친조약이후 총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기념관으로 남게된다.[8] 심지어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던 당시 미 해군은 과거 페리 제독의 군함에 걸려있던 성조기를 떼어와서 보란듯이 걸어놓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