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10:43:25

가와지 도시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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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50a9><colcolor=#fff> 일본 제국 초대 대경시
가와지 도시요시
川路利良 | Kawaji Toshiyoshi
파일:6125_1.jpg
출생 1834년 6월 17일
사쓰마국 히오키군
(現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사망 1879년 10월 13일 (향년 45세)
도쿄부
(現 도쿄도)
재임기간 초대 대경시
1874년 1월 24일 ~ 1879년 10월 13일
제2대 경시국 대경시
1877년 1월 19일 ~ 1879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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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50a9><colcolor=#FFF> 배우자 에츠코
약력 가고시마번 병기봉행
도쿄부 나졸총장
경시청 대경시[1]
내무성 경시국 대경시[2]
군사 경력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877년 3월 ~ 1877년 7월
최종 계급 소장
주요 보직 별동 제3여단장
참전 금문의 변[3]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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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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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지 도시요시는 일본 제국대경시, 경찰, 정치인, 사무라이이다. 세이난 전쟁 등에서 발도대를 이끌고 활약한 군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834년 6월 17일 사쓰마번 무사 가문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지키신카게류라는 검술이나 한학[4]을 배우고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따라 에도에 가거나 번의 명령을 따라 비각[5]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금문의 변에서도 조슈번의 장수 키지마 마타베를 저격해 쓰러뜨렸고[6] 보신전쟁에서도 사쓰마군 소속으로 도바 후시미 전투, 우에노 전투, 아이즈 전역 등에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남에 따라 도시요시 또한 유럽을 견학하였고, 프랑스 경찰을 본떠 일본 경찰 제도를 확립했으며, 1874년 대경시[7]의 자리에 오른다.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많은 사쓰마 인사들이 낙향하지만, 도시요시는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겠다며 경찰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경찰력을 활용하여 사가의 난 등 사족들의 반란에 관련된 첩보 활동을 하였고, 사이고 다카모리 시찰을 위해 요원들을 내려보냈으나 요원들이 붙잡혀 고문을 포함한 심문 도중 사이고 암살을 위해 잠입했다고 자백해 세이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남 전쟁 중에는 육군 소장으로써 발도대를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사쓰마의 군세와 싸웠다.

이후 동향인 구로다 기요타카가 술에 취해 부인을 죽였다는 루머가 퍼졌을 때 사실이 아니라며 그를 두둔해주기도 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사건 당시 사건 전에 전직 카가 번사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도 카가번(이시카와현) 출신자들을 무시하며 이를 묵살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이후 유럽 경찰 시찰을 위해 프랑스를 방문하던 도중 병을 얻어 급히 귀국했으나 결국 1879년 4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3. 여담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는 듯이 도입부에 등장한다. (국내 번역은 대망 31권)
[1] 오늘날의 경시총감[2] 오늘날의 경찰청 장관[3] 이 전투에서 가와지는 조슈번의 기지마 마타베를 저격하는 공적을 세웠다.[4] 중국 전래의 학문을 일컫는 말[5] 파발꾼과 비슷한 일을 하며 첩보, 정보 전달 등을 수행하기도 했다.[6] 죽이지는 못했지만 치명상을 입혔고, 마타베는 자결했다. 그런데 마타베가 등장하는 시대극에서는 마치 사쓰마의 총격에 사망하는 것처럼 여러 번 연출된다.[7] 현재의 경시총감이다. 경시장, 대경시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 1881년에 현재 명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