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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897년 10월 11일 |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수항리[1] | |
사망 | 1973년 3월 1일 |
소련 모스크바 | |
묘소 |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프랴진스코예 공동묘지 |
본관 | 진주 강씨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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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상진은 1897년 10월 11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수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고향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가한 후 일제 당국의 수사를 피해 만주 장백현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장백지단 유일우(劉一優) 부대에 참여했다. 이후 1921년 3월 3일 대한독립군비단이 러시아로 이동할 때 2번째 부대의 책임자를 맡아 러시아령 이만으로 이동했고, 그해 7월 군비단이 고려혁명의용군대(高麗革命義勇軍隊)로 개편된 후 조직한 사관학교의 일원이 되었으며, 고려혁명군사의회(高麗革命軍事議會)의 헌병대장을 겸임했다.당시 이만 일대에 집결한 강상진 부대의 인원은 천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1921년 12월부터 러시아 적군 정규군에 편성되어 러시아 백군 및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 전투에 참전한 그는 6연대 1중대 소대장으로서 최초로 철조망 장애물 지대에 접근해 돌격을 감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1922년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1923년부터 3년간 동만주 일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러시아로 귀환했다.
1927년에는 만주 밀산현으로 잠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면서 리리싼을 지지했지만, 1930년 리리싼 노선이 비판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했고, 노동자, 신문사 채자공 등으로 일하다가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동군으로 복무했고, 이후 툴라시의 방위 산업체에서 근무했다. 1957년 소련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개인연금을 받았으며, 1973년 3월 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상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8월 14일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광복절을 기념해 모스크바 노보-프랴진스코예 공동묘지에 묻힌 강상진과 김규면의 묘를 찾아 헌화하는 행사를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