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12:18:51

강석숭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역사가.

2. 생애

1932년 9월 18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생, 1928년생 등 부정확한 출생일자가 남한에 유포되었으나 사망 이후 묘비가 제작되고 나서야 다 틀린게 확인되었다. 평양 숭실학원을 중퇴한 이후 철공소 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평양학원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를 졸업, 1949년 모스크바 종합대학으로 유학하였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인민경제대학과 중앙당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칠골 강씨이기 때문에 김일성의 먼 외가친척이라서 가능했다는 썰이 있었지만 황장엽은 강석주, 강석숭 형제가 칠골 강씨라는 주장에 대해서 황당한 소리라고 부정했다.

1954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가 1957년 10월,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었으며, 1961년 내무성 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어쩐 일인지 1962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내무국장으로 내려갔다가, 1963년에 다시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중앙당학교 강사로 일하다가 과학교육부장 허석선을 수정주의자로 맹렬히 비난하면서 김일성, 김정일의 총애를 받아 송도정치경제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학장으로 사업하면서 간부양성사업을 맡았다.

1969년, 잠시 자강도 책임비서를 맡았다가 1971년에 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으로 옮겼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5년부터 당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장을 맡았다. 1975년 7월 5일, 북한에서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조선혁명군 결성 45주년을 기념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결성하신 조선혁명군은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력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을 쌓아올리었다>라는 강연을 하였다. 1977년 4월 5일에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이라크를 방문하였으며 8월에는 가이아나 인민민족회의 2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다. 1979년 3월에 말리 인민민주연맹 창립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다.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이 발표되지 않아 확인하긴 어렵지만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재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8년에 중앙위원회 사적부장을 겸하고 백두산 밀영을 발굴하겠답시고 사적대원들을 이끌고 백두산을 미친듯이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 10월, 소말리아 10월 11일 혁명 12주년 기념식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그리고 1982년 5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3년 2월에 PLO 16차 평의회에 참석, 9월에는 포르투갈 사회당 5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등 매우 활발한 당대당 외교 활동을 벌였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5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 수석자문위원으로 서울을 2차례 방문하였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고,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음으로 김일성훈장 2중 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김일성 장의위원이 되었으며 1995년 오진우 장의위원도 지냈다. 1995년 금성정치대학 학장을 잠시 맡았으나 겸임이었는지 임시로 옮긴건지 1996년부턴 다시 당역사연구소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말년까지 김정일을 수행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북한 선전물에 따르면 50대 시절부터 각종 질환에 시달려서 김정일을 걱정하게 했으며, 그때마다 고집스럽게 현역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2001년 5월 11일 오후 11시 40분에 68세를 일기로 급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의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과 수령의 높은 신임에 의하여 (...) 동지는 다년간 당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소장의 중책을 지니고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옹호고수하고 빈채이기 위한 사업에 모든것을 다 바쳤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죽은 지 8년이 지난 2009년 3월 1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3107호를 통해, 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금별메달이 추서되었다. 강석숭 소개편집물에 따르면 이는 김정일이 현지지도 도중에 문득 강석숭이 백두산 밀영 '발굴' 공이 있는데 크게 해준 것이 없으니 이제라도 공화국영웅 칭호를 내려주자고 제의했기 때문이다.

3. 여담

북한 외무성 제1부상, 내각 부총리, 정치국원을 지낸 강석주가 그의 동생이다.

4.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18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