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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디아이 - 라베타이 왕국 8대 군주 Γένθιος | 겐티오스 | ||
제호 | 한국어 | 겐티오스 |
그리스어 | Γένθιος | |
라틴어 | Gentius | |
존호 | 왕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167년 이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81년 ~ 기원전 1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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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디아이 - 라베타이 왕국 8대 군주.2. 행적
라베타이 왕국 2대 군주 플루라토스 3세와 에우리디케의 아들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형제로 플라토르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카라반티오스가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8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플루라토스 3세는 로마 공화국에 충성을 바치며 마케도니아 왕국,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 때 로마를 지원했다. 반면에, 그는 로마로부터 독립하고 일리리아의 패권을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먼저, 그는 왕권 강화에 착수했다. 폴리비오스는 그가 신하들을 매우 잔인하게 대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일리리아의 왕 겐티오스는 방탕한 습관으로 밤낮으로 술에 취해 많은 음란 행위를 하였다. 모노니오스의 딸과 결혼하려던 형제 플라토르를 죽이고 그 여자와 직접 결혼했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일리리아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하려는 그리스 작가의 왜곡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가 다르다니아의 군주 모노니오스의 딸 에테바 또는 에투타와 결혼한 것은 분명하다. 이 결혼은 지역 강국인 다르다니아와 협력하여 세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로마는 그런 그를 경계했다. 기원전 180년, 로마 법무관 루키우스 두로니스는 그가 소유한 10척의 일리리아 배를 압수하여 브룬디시움으로 가져갔다. 두로니스는 원로원에 일리리아 선박들이 아드리아 해의 동쪽 해역에서 해적질을 하고 이탈리아 상인들을 납치한 사실이 적발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그가 이 해적 행위를 선동했으며, 로마와 이탈리아 선박들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코르기라 네그라(코르쿨라) 섬에 감금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절단을 원로원에 파견하여 해명했고, 원로원은 두로니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 그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한편, 이전까지 플루라토스 3세의 지배하에 있던 일리리아 부족인 달마티아 족은 겐티오스 즉위 후 독립했다. 그는 이 일이 다른 부족들의 동요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행정 개혁을 단행하기로 했다. 당시 그의 왕국은 북서쪽으로 도르시 강과 나로 강 계곡까지 미쳤고, 동쪽으로는 스카르도 산과 드린 강 하류를 지나 리흐니도스 호수에 이르렀다. 남쪽으로는 리소스에서 시작하여 아르다크산의 상류를 따라 칸다비 산맥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일리리아 해안 지대에 이르렀다.
그는 이 나라를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 구역으로 나눴다. 주요 도시 주변에는 여러 개의 성채를 세웠고, 각 구역에 일리오룸(illyriorum)을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스코드라에 왕궁을 세우고 라베타이인들을 메디온으로 이주시켰다. 스코드라의 남동쪽에 거주하는 또다른 일리리아 부족인 페네스티 족은 별도로 행정 단위를 형성했다. 그들은 우스카나를 수도로 삼고, 그와 동등한 동맹을 맺었다. 그의 이같은 행정 개혁은 산간 지방에는 미치지 않았다. 이 지역은 도시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행정 기관을 설립하는 건 부적절했다. 단지 각 부족장이 세운 작은 요새만이 세워졌을 뿐이다.
그는 행정 개혁과 더불어 화폐 시스템을 통합하려 했다. 먼저 스코드라에서의 기존의 동전 생산을 중단하고, 새로운 동전을 생산 및 유통했다. 이 동전의 한 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다른 면에는 일리리아의 선박이 실렸다. 또한 기존의 동전에서는 측면에 투구와 방패가 새겨겼지만, 새 동전에서는 그의 칭호와 명칭이 새겨졌다. 그리고 리소스 시의 화폐 자치권을 폐지하고, 스코드라와 같은 형식의 주화를 주조하게 했다. 이 새로운 통화는 그의 초상화와 일리리아 선박이 그려진 주화, 방패와 투구가 있는 주화, 그리고 그의 칭호와 이름이 새겨진 리소스 주화 등 세 가지 주요 주화로 주화되었다. 처음 2가지 주화는 스코드라에서 주조되었는데, 왕과 선박의 초상화가 있는 주화가 가장 높은 가치를 지녔다.
한편, 리존에서는 자체 은화를 계속 주조하고 리흐니도스에서는 방패와 배의 일부가 새겨진 자체 청동 주화를 계쏙 주조했으며, 북부의 라베타이와 다오르시 부족이 개별적인 주화를 생산하는 등,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 지역에서는 각 부족들이 기존에 쓰던 주화를 계속 생산했다. 다만 왕실 주화는 왕국 대부분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일리리아 북부, 몬테네그로, 디라키움 및 아폴로니아 등 여러 지역에서 왕실 주화가 발견된 데서 확인된다. 이 사실은 무역 활동이 활발했음을 암시하며, 산간 지역의 경제가 왕실과 연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행정 및 통화 개혁을 단행하면서 국력을 키운 그는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공략했다. 기원전 172년, 그리스의 식민 국가 중 하나인 이사 섬이 원로원에 대표단을 파견해 일리리아 왕이 자기들의 땅을 2차례 공격했다고 비난했으며 마케도니아와 공모하여 로마에 대항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는 즉시 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해 해당 주장을 부인했고, 로마는 이사 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17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 왕이 페네스티 일대에서 로마군을 격퇴했다. 이리하여 마케도니아와 그간의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그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폴리비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페르세우스는 플루라토스와 베로아의 아다이아오스를 겐티오스에게 사절로 보내어, 그가 로마인과 다르다니아인과의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에페이로스인과 일리리아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중략) 겐티오스는 즉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그에게 지시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우정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원이 부족하여 돈을 받지 않고서는 로마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는 까닭을 밝혔다. 아다이아오스와 그의 동료는 이 답변을 받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왔다. 페르세우스는 스티베라에 이르러 전리품을 팔고 군대를 쉬게 하면서 사절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절단으로부터 겐티오스의 대답을 들은 그는 아다이아오스와 그의 경호원 중 하나인 글라우키아스, 일리리아어를 익숙하게 구사하는 플루라토스를 재차 파견했다. 그들이 떠나자, 페르세우스는 그의 군대와 함께 떠나 히스카나로 진군했다.
사절단이 겐티우스를 재차 찾아왔지만, 페르세우스에게 별다른 지시를 받은 게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추가 제안을 하지 않았다.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합류하는 걸 고려할 수 있지만 돈이 필요하다며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페르세우스는 그들에게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히피아스를 보내 확실한 협정을 맺도록 했다. (중략) 히피아스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와서 겐티오스가 300달란트와 적절한 보증인만 있으면 로마와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켄티오스의 협력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첫 친구 중 한 명인 판타우코스를 사절로 임명해 먼저 동맹 서약을 교환하게 했다. 이후 겐티오스는 판타우코스가 지정한 인질을 즉시 보냈고, 펜타우코스는 페르세우스가 서면으로 지명한 인질을 보냈다. 그 후 판타우코스는 300달란트를 전달할 준비가 마련되자 즉시 출발하여 라베타이의 메테온에 도착하여 겐티오스를 만났고, 곧 겐티오스가 페르세우스와 함께 로마에 대적하도록 유도했다.
사절단이 겐티우스를 재차 찾아왔지만, 페르세우스에게 별다른 지시를 받은 게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추가 제안을 하지 않았다.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합류하는 걸 고려할 수 있지만 돈이 필요하다며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페르세우스는 그들에게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히피아스를 보내 확실한 협정을 맺도록 했다. (중략) 히피아스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와서 겐티오스가 300달란트와 적절한 보증인만 있으면 로마와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켄티오스의 협력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첫 친구 중 한 명인 판타우코스를 사절로 임명해 먼저 동맹 서약을 교환하게 했다. 이후 겐티오스는 판타우코스가 지정한 인질을 즉시 보냈고, 펜타우코스는 페르세우스가 서면으로 지명한 인질을 보냈다. 그 후 판타우코스는 300달란트를 전달할 준비가 마련되자 즉시 출발하여 라베타이의 메테온에 도착하여 겐티오스를 만났고, 곧 겐티오스가 페르세우스와 함께 로마에 대적하도록 유도했다.
이 협상은 약 1년간 지속되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 긴 기간을 무기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으려는 겐티오스의 시도로 설명한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두 사람의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페르세우스는 발칸 반도에서 로마를 완전히 몰아내길 바랐지만, 겐티오스는 왕국의 주요 지역에서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희망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그는 로마의 적으로 인식되었다.
기원전 168년, 로마군은 피드나 전투에서 페르세우스를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후 그들은 일리리아를 응징하기로 했다.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진군했고, 겐티오스는 1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리소스 인근에 집결시켰다. 또한 일리리아 함대는 디라키움과 아폴로니아를 공격했으나 아폴로니아에 본거지를 둔 로마 함대가 이들을 격파했다. 그 후 양군은 스코드라 성벽 아래에서 격돌했다. 전투 결과 로마군이 완승을 거두었고, 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추격병에게 사로잡혔다. 그 후 가족과 함께 로마로 끌려간 그는 기원전 167년 개선식에서 '전리품' 취급 받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탈리아 페루자 지역의 구비오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여담
용담이 상처 치유에 탁월하다는 걸 밝혀낸 인물이기도 하며, 이 식물은 고대에 동물에 물린 상처나 다른 상처를 치료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학계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이 식물의 학명을 "겐티아나 루테아(Gentiana lutea)"로 명명했다.알바니아 2000레크 지폐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