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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a4d9b><colcolor=white> 경성공립농업학교 京城公立農業學校 | |
개교 | 1918년 5월 1일 |
유형 | 5년제 중등교육기관 |
형태 | 공립 |
상급기관 | 조선총독부 |
소재지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1] (1918.5.1 ~ 1918.7)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2] (1918.7 ~ 1937) | |
경기도 경성부 토다이몬구 덴노초[3] (1937~1945) | |
개편 | 서울농업대학 - 서울산업대학[4] - 서울시립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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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가 산미증산계획 추진에 필요한 실무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립한 공립농업학교.2. 역사
1918년 5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던 경기도 종묘장(種苗場)[5]을 임시 교사로 사용해 개교했다. 그해 7월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14번지 현재 청량중학교 자리에 신축교사를 건립해 이전했다.구체적으로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쌀(산미)과 면화(양잠)의 수탈을 위한 근대적 농업기술과 인력 양성을 목표로 2년 과정의 농업과 및 2개 학급으로 개교하였다. 첫 시작부터 당대의 일반적인 사립학교들과 달리,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경기도 지방비(地方費)로 설립하도록 지시하였기에 한일공학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입학자격, 수업연한, 학비 등이 모두 일본 본토 소재의 농업학교들과 같았다.
이후 1920년 수업연한이 3년제로 늘어났고, 3학급으로 편성되었다. 1924년에는 학제를 5년 과정으로 대폭 늘렸으며, 양잠과를 신설해 총 8개 학급이 되었다. 1928년에는 10개 학급으로 그 규모가 확장되면서 수많은 전문 인력을 배출했다. 1934년 12월, 학교 규모의 확장을 위해 숭인면 전농리와 휘경리(現 동대문구 휘경동) 부지 8만 평을 매수한 뒤 1936년부터 1937년까지에 걸쳐 기숙사와 신축 교사 등을 준공하였다. 또한 학생 1인당 교육비를 당시 일본 본토의 농업학교들에 비해 두 배 수준까지 책정하여 동양 최고의 농업학교라는 평을 얻었다.
중일전쟁 이후엔 가축병원을 준공하고 농공병진정책에 따라 양잠과를 폐지하고 농업토목전수과를 신설했는데, 이는 1930년대 후반 세계적 공황으로 인해 산미증산계획이 다시 추진되면서 농법 개량과 더불어 개간,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경지 개량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의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에 따라 1939년 수의축산학과가 설치되어 15개 학급으로 규모가 더욱 커졌다. 1941년에는 장제사양성소(裝蹄師養成所)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는 중일전쟁의 격화에 따라 기마군이나 기마 경찰을 지원하기 위한 구체적 수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립농업학교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된다.
광복 후 서울농업고등학교로 개편되어 농업과, 농업토목학과, 수의학과, 임학과 등 4개 학과로 재정비되었다가 서울농업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서울농업대학은 이후 1973년 서울산업대학으로 개칭했고, 1987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교명이 서울시립대학교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