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장항리 절터 부처
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3년,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장항리 석굴암 동쪽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이름 없는 한 신라시대 폐사지(장항리 사지)에서 발견된 8세기 경 신라의 대형 석조 불상 1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현재 높이 2m 50cm, 추정 높이 5m 40cm.
8세기 경에 신라에서 제작한 경주 지역의 석조불상으로, 원래는 크기가 6미터에 육박하는 거대 불상이었으나 일제에 의하여 지금은 2미터 50센티 정도 크기만이 남아있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경주 우는 부처'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이던 1923년, 석굴암 근처의 한 이름없는 절터에서 이 석불이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에는 1,300여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거의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석굴암에 준하는 국보급 문화재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이곳에서 본 석불 및 오층석탑 2기가 발견되자 기존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석굴암을 대신하여 이 작품들을 일본으로 반출하기로 결정, 자기들 나름대로는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석불과 석탑들을 여러조각으로 해체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이 불법반출 과정에서 켕기는게 있어 급하게 작업을 서두르다보니 자세한 연구 없이 그냥 근처 금광에서 폭약을 마구잡이로 가져다가 사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결국 폭발로 인해 불상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는 석탑 속에 들어있을 불사리장엄구를 탐내 일부러 폭약으로 무너뜨렸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처럼 상상도 할 수 없는 야만적인 방식으로 문화재 약탈이 버젓이 자행되었다.
이렇게 불상과 석탑이 그만 산산조각이 나버리자 짜게 식은 일제는 처참하게 훼손된 유물들을 그냥 내버려두다가 10여년이 지난 1932년에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파편들을 일부 옮겨놓았고, 훗날 대한민국에서 2009년부터 절터부근에서 채취한 돌가루를 사용한 접착과 성형으로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수십여년의 시간 동안 불상 하단부 등 상당수의 파편들이 세월의 흐름에 밀려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다합쳐 총 2미터 50센티 정도의 크기만이 남아있다.
사진 출처 : 한국의 성형부처 - 경주 장항리사지 석조여래입상
폭파되기 전 원래의 크기는 약 5미터 40센치나 되는 대형 거불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석조불상이 이 정도로 아름답고 세련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8세기 경 신라의 석조 공예기술이 그야말로 극에 달해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남아있는 대좌는 팔각형으로 옆면에 사자상과 신장상 등이 안상에 조각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불상을 세웠던 구멍이 있는데, 그 모양과 크기로 보아 원래 이 불상은 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광배와 몸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고 촘촘히 새긴 나발 위로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이마에 백호(白毫) 자리가 파여 있고 눈썹은 타원형을 이루며 날렵하게 뻗었다. 눈은 반쯤 내려 감았으며, 아랫입술과 턱은 파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목에는 신라 불상 특유의 삼도가 뚜렷하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몸의 굴곡과 조화를 이루면서 흘러내려 신체의 볼륨감을 드러내고 있다. 광배는 전체적으로 배 모양이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둘레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안쪽에는 연꽃대좌에 앉아 구름을 타고 있는 화불(化佛)을 조각하였다. 화강암을 원숙한 솜씨로 조각한 8세기 경 신라의 사실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공식 페이스북 - 장항리 절터 ‘부처’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석조불상으로, 근처의 석굴암과 함께 8세기 경 한국의 세련된 석조기술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