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승 高漢承 | |
호 | 포빙(包氷) |
예명 | 고마부, 고사리, 고한용 등 |
출생 | 1902년 8월 27일[A] |
대한제국 경기도 개성시 | |
사망 | 1949년 10월 29일 (향년 47세)[A][B]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
학력 | 보성고등학교 (졸업) 니혼대학 (법문학과 예술과 /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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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2. 생애
1902년 8월 27일,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20년에 극예술협회에서 창립자이자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21년 7월에 송경학우회 연극단의 일원으로 있었다. 1922년 7월엔 강연당으로 옮겨 활동했고, 1923년 4월 개성 문인들과 녹파회를 조직했다. 같은 해 5월에 방정환 등과 색동회를 조직했고, 6월엔 형설회의 국내 순회 연극단에 참여해 경성, 평양, 함흥 등지를 순회했다.[B][5]1924년 2월엔 심대섭과 잡지 "신문예"를 발행했고, 같은 해 5월 개성에서 어린이날을 기념해 강연했다. 1925년 5월엔 소년단체 지도자연합회이던 오월회 조직에 참여했다. 이후 귀국했다.[B]
귀국하고선 문필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경성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1928년 개성에서 주식회사 개성상사의 설립에 참여하고 전무이사로 일하였다. 1929년엔 개성인삼판매조합 이사, 같은 해 7월엔 개성체육회 이사, 9월엔 개성 고려청년회 조직부 이사, 1932년 11월엔 학예부 이사를 맡았다.[B]
1931년 개성부 부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1945년까지 부회의원 직위로 일제에 협력했다. 1933년 2월, 고려시보사 창립을 주도하고 서무주임으로 있다가 다음 해 3월에 탈퇴했다. 1933년부터 39년까지 개성인삼등업조합에서 평의원 겸 이사로 있었으며, 1935년 4월 송도금융조합 평의원, 1939년 10월 개성부 방호단 서분단으로 있다가 장고봉 사건으로 일하던 곳이 개성경방단으로 바뀌자 그곳에서 고문 및 부단장으로 일했다.[B]
1941년 12월에 개성 지역 유지들이 일본 육군과 해군에 비행기를 헌납하려하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고, 1945년 1월에 일제에 전투를 위한 비행기를 제공하던 송도항공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지냈다. 해방 후 1948년 5월 월간 "어린이" 편집인으로 있다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월에 공민권 정지 5년을 언도받았다.[B]
1949년 10월 29일에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따따를 가명으로 썼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