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6:45:46

후호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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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条鱗, ほうじょううろこ
고호조씨의 가문
[ruby(後北条氏,ruby=ごほうじょうし)]

1. 개요2. 후호조씨의 자립
2.1. 호조 소운2.2. 호조 우지츠나
3. 후호조씨의 전성기
3.1. 호조 우지야스3.2. 호조 우지마사
4. 몰락5. 역대 당주6. 관련 인물7.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후호조씨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간토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 가문이자 오다, 다케다, 우에스기랑 함께 천하를 노릴 수 있을 법했던 가문이었다.

전국시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가문이다. 우선 이 가문은 유력한 학설에 따르면 센고쿠 시대를 개막했고[1] 간토대평야를 지닌 간토 일대에 세를 불려나가면서 무로마치 시대의 기성 가문들을 모조리 멸망시킨 데다[2][3] 오늘날 일본의 수도권인 간토 지방을 평정하고 개척하면서 후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영향을 줬다. 역시 유력한 학설에 따르면 센고쿠 시대는 호조 우지나오 대에 오다와라 성 전투에서 이 가문이 패전하여 멸망당하면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즉, 무로마치 시대를 무너뜨리고 센고쿠 시대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가문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간토대평야라는 엄청난 곡창지대와 이를 통해 나오는 엄청난 인구수 때문에 후호죠가 천하인이 되기에 조건은 충분했지만 후호죠에 대한 반감이 더 강해 중원인 교토로의 진격이 막힌데다가 가장 인접한 대다이묘급 가문인 다케다 가문을 견제하던 누마타성을 빼앗긴 이후 광적인 집착으로 쓸데없는 전투를 한 것도 매우 컸다.

시조는 이세 씨(伊勢氏)의 빗추 분가 출신인 이세 신쿠로[4] 모리토키다.(伊勢新九郎盛時. 후의 호조 소운.) 편의상 소운도 호조 소운이라 부르지만 소운은 생전에 호조라는 성을 쓴 적이 없고, 호조씨를 자청한 것은 2대 당주인 호조 우지쓰나 때부터이다. 호조 소운이라고 부르는 건 사실상 비공식 추존에 가깝다. 그들의 기반이 옛 가마쿠라 막부가 있던 곳으로 이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우지쓰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운 하치만궁을 복구하기도 하였다.

호조 도키유키의 후손임을 내세웠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정권을 잡았던 호조씨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기 때문에[5] 둘을 구별하기 위해 이세씨의 호조는 후호조(고호조)라 부르게 되었다. 이세씨의 호조는 초대 소운부터 마지막 당주인 우지나오까지 5대로 '고호조 5대'라고도 한다. 다만 후호조씨 2대조 호조 우지쓰나의 정실이자 호조 우지야스의 어머니 요쥬인도노가 호조 도키유키의 후손이라 일컬어지는 요코이 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니 어떻게 보면 후호조씨도 아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국시대의 다이묘 가문 중에는 드물게 민생에 많은 신경을 쓴 가문이기도 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게 2대 당주 우지츠나가 후계자 우지야스에게 남긴 말이다.
"一、侍中より地下人百姓等に至迄、何も不便に可被存候、惣別人に捨りたる者ハこれなく候"
(하나, 사무라이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불편함이 있어서는 아니 되니, 이 세상에 버려도 되는 사람 따위는 없기 때문이니라.)
때문에 후호조씨의 통치를 받은 백성들은 후호조씨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다. 때문에 후호조씨 멸망 이후 후호조씨의 간토 영지로 전봉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초기에는 후호조씨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크게 고생했다.

말기에는 250만 석이라는 전국 최대 규모의 다이묘로 성장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로 몰락했다. 하지만 호조 우지모리가 이후 1만석의 작은 다이묘로 복귀하여 가문 자체는 메이지 유신까지 살아남았다.

2. 후호조씨의 자립

2.1. 호조 소운

호조 소운의 여동생 (혹은 누나)은 당시 이마가와 씨의 당주였던 요시타다에게 시집 와 있었고, 소운은 여동생을 따라왔던 이마가와 씨의 식객이었다.

그러던 중 요시타다가 전사하여 후계자 때문에 내분이 일어났고, 소운은 그 틈을 이용하여 여동생의 아들, 즉 조카인 우지치카를 지원하여 당주에 앉히고 그 공적으로 코코쿠지성(興国寺城)을 받게 된다. 이 즈음 결혼하여 적자 우지쓰나가 태어난다.

그 후 이즈를 침공, 호리고에 쿠보의 내분을 틈타 아시카가 챠챠마루를 습격하여 추방하고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이즈를 공략한다. 결국 이즈를 손에 넣고 영국화를 시작했고, 메이오 4년(1495년)에는 사가미의 오오모리씨를 쫒아내고 오다와라성을 탈취하여 본거지로 삼는다. 에이쇼 13년(1516년)에는 미우라 요시아츠를 죽이고 사가미를 평정한다.

1518년에 우지츠나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1519년 세상을 떠난다.

활발한 정복 활동을 보인 소운이지만 소운은 이마가와로부터 독립한 상태가 아닌 이마가와 소속 가신으로 우지치카의 후견인 입장이었다.

2.2. 호조 우지츠나

가독을 상속받은 우지츠나는 이세씨에서 호조 씨로 개성한다.

세력 확대를 위해 무사시로 진출하며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씨와 대립한다. 간토로 진출하는 한편, 카이의 다케다 노부토라[6]와도 대립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마가와의 당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타케다와의 대립을 끝내기 위해 노부토라의 딸과 혼인 관계를 가지며 동맹을 맺는다. 이 동맹으로 인해 호조와 이마가와의 주종 관계는 단절되고 우지츠나는 항전하게 된다. 이 결과 고호조 씨는 이마가와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후호조씨의 전성기

3.1. 호조 우지야스

3대 당주 호조 우지야스는 가독을 상속받은 이후 굴러 들어온 돌 후호조씨에 대한 반감으로 뭉친 주변 다이묘들의 포위망에 위기를 맞게 된다.[7] 하지만 다케다 신겐의 중재로 이마가와 가문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며 이들은 3국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로서 후방이 안정되자 우지야스는 코가 쿠보, 양 우에스기씨와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들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깨뜨리며 간토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수장 노리마사가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겐신)에게 의탁하며 에치고의 나가오 가문과 대립하게 된다. 겐신이 간토를 침공하자 우지야스는 본성 오다와라까지 밀리며 위기를 맞으나 전국 최대 규모라 할 정도로 거대하고 막강한 오다와라 성은 겐신조차 뚫지 못했고 결국 겐신이 공세를 포기하고 후퇴하며 세력권을 회복했다.

이후로는 우에스기 겐신, 그리고 3국 동맹을 파기한 다케다 신겐과 대립하였다.

3.2. 호조 우지마사

4대 당주 호조 우지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다케다가 멸망하고 우에스기도 수세에 몰린 틈을 타 계속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혼노지의 변 이후 지배력이 붕괴한 관동의 오다 세력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분할하며 250만 석이라는 후호조씨의 최대 판도를 이륙했다.

4. 몰락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정권을 확립한 이후에도 우지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지 않으며 세력 확대를 계속했다. 이는 히데요시가 선포한 다이묘 간의 사적 충돌을 금지하는 총무사령을 위반하는 행위였고 히데요시는 상락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후호조씨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다.

결국 사나다 가문과의 누마타 분쟁에서 우지마사가 히데요시의 중재를 따르지 않으며[8] 히데요시의 인내심을 박살냈고 히데요시는 전 일본의 다이묘들에게 후호조씨 토벌을 명하였다.

우지마사와 가독을 승계받은 5대 당주 호조 우지나오는 다테 가문과의 동맹을 믿고 항전하였으나, 다테 마사무네가 결국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고, 이전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히데요시를 따라 토벌에 참여하며 승산이 없어졌다.[9] 결국 후호조씨는 항복하였으며, 우지마사는 할복하고 우지나오는 출가하여 전국 다이묘로서의 후호조씨는 멸망했다. 그리고 후호조씨의 세력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봉되며 그대로 계승받게 된다.

5. 역대 당주

초대 - 호조 소운 (北条早雲)
2대 - 호조 우지츠나 (北条氏綱)
3대 - 호조 우지야스 (北条氏康)
4대 - 호조 우지마사 (北条氏政)
5대 - 호조 우지나오 (北条氏直)

이후 우지야스의 사남 우지노리(北条氏規, 1545 ~ 1600)의 아들 호조 우지모리(北条氏盛, 1577 ~ 1608)가 우지나오의 양자가 되고 카와치(河内国) 사야마 번(狭山藩)[10] 1만석의 다이묘가 되어 그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하며 자작으로 임명 받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산 운용을 잘못해서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6. 관련 인물

7.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후호조씨

다이묘 캐릭터는 위의 역대 당주들. 그러나 우지나오 치세에도 실권을 잡고 있던 아버지 우지마사가 대신 나온다.

본거지는 사가미의 오다와라 성. 이 오다와라 성은 아즈치 성, 오사카 성과 함께 게임상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성으로 나와, 혁신에서와 같이 거성 업그레이드를 지원하기도 한다.

혁신 이후로 나온 가문고유기술이나 고유정책은 내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혁신의 독자기술은 작품에서 유일한 내정 기술인 소가마에인데, 효과인 농성시 군량 소모는 거의 없는 기술 취급받았다. 이걸 개발할 때까지 오랫동안 수세에 몰려 있는 플레이란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나올 수 없기 때문. 천도에서도 이름은 유지하고 효과만 거점 전법피해 반감인데 역시나 의미 없는 기술. 창조의 독자 정책은 중도계의 오개조의 훈령인데 영민병의 규모가 증가하는 효과로 드디어 써먹을 만한 독자 요소를 갖게 되었다. 대지에서는 소운을 제외한 다이묘 4명이 공통적으로 '녹수응온'(禄寿応穏)이라는 내정계 지(志)를 받았다. 신생에서는 창조와 비슷한 이름의 '오개조의 훈계' 고유 정책이 있는데 군을 제압할 때 건물을 보전시켜 주는 효과라 개사기 정책으로 취급받는다. 구글에서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호조라는 뜻의 일본어 信長の野望 新生 北条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信長の野望 新生 北条 強すぎ(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호조 강해요)가 올라오는데, 이런 신생의 호조 강세에 한몫하는 요인.

다이묘들의 능력치는 3대인 우지야스까지는 일본 전국에서도 수위에 오르는 괴물급이지만, 우지마사는 그 정도까지는 못 되고 우지나오는 우지마사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지마사는 창천록에서는 전부 50대의 능력치로 저조했으나 천하창세부터 조금씩 올라가, 혁신에서는 정치 80대에 올라섰고 마침내 신생에서는 통솔도 80대를 찍었다.
[1]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오닌의 난이 아니라 후호조씨의 초대 당주인 호조 소운이 이즈를 침공해 사유화하며 최초의 센고쿠 다이묘로 등극한 시점으로 보는 설. 센고쿠 시대 자체가 시작과 끝을 결정짓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 여러 설이 난립하나 이 설은 그중에서도 꽤나 지지를 받는 축에 속한다.[2] 간토의 아시카가 가문이야 일단은 무로마치 쇼군가니 막부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고, 우에스기 가문도 대대로 간토 지방의 최고 가문 중 하나였다.[3] 호조 가문이 3대 우지야스 대에 크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원래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하던 우에스기 가문과 간토 아시카가 가문이 간만에 힘을 합쳐 쳐들어온 카와고에 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건 덤이다.[4] 신쿠로라는 이름은 이후로 역대 호조씨의 당주들이 물려받게 된다.[5] 사실 혈통적으로 따지자면 싯켄 도쿠소 호조씨와 고호조씨의 근원인 이세 씨 모두 간무 헤이지 타카모치류 반도 헤이지 계통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먼 친척쯤은 된다. 물론 공통된 조상이 헤이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먼 친척이므로 사실상 남남이나 마찬가지. 한국에서 알기 쉬운 비유를 하자면, 유비헌제가 서로 '유' 씨긴 하지만, 남남인 것과 같은 소리다. 사실 이세 씨는 이세 헤이시에서 갈라져나온 분파이므로 혈통상으로는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의 숙적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헤이케와 더 가까운 가문이다.[6]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7] 후호조씨를 둘러싼 이마가와, 다케다, 우에스기, 간토 아시카가씨 모두 간토에서 오랜 시간을 군림한 유서깊은 가문들이다. 특히나 우에스기와 간토 아시카가씨는 간토 간레이가마쿠라 공방이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최상위 역직을 차지했던 명가이자 막부의 수뇌부였다.[8] 히데요시의 중재도 우지마사에게 더 유리한 판결이었다.[9] 거기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장기인 공성용 성 급조로 후호조씨의 사기를 꺾었다.[10] 현재의 인구 6만의 오사카부 사야마시(大阪狭山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