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4 09:52:51

곡부 전투

곡부 전투
曲阜戰鬪
Battle of Qufu
시기 기원전 309년
장소 제나라 곡부
(오늘날의 산둥성, 지닝시, 취푸)
원인 제의 태산을 중심으로한 유격전 발발,
제의 유격전으로 인한 조선조정의 전면전 결심
교전국 조선朝鮮제齊
지휘관 임치군수 문소
하관하대부 고나
설군태수 감무
객장 도도[1]
병력 조선군 4만7천제군 3만 3천 2백[2]
피해[3] 조선군 약 8천 5백여명제군 약 1만 3천여명
결과 제군 패배, 조선군 곡부점령 및 사수상류 장악
영향 조선과 제 사수와 양관을 양국의 경계로 삼고 화친
화친의 대가로 제왕 전벽강이 공식적으로 사죄와 책임자 인도

1. 개요2. 배경
2.1. 제의 사정2.2. 조선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맹상군의 시간벌기3.2. 문소의 병자궤도3.3. 도도 곡부에 도착하였으나3.4. 곡부성 공방전
4. 결말
4.1. 조선의 곡부점령 및 사수상류 장악
5. 전후처리
5.1. 조제화친 및 전벽강의 사죄
6. 영향
6.1. 전후 조선상황6.2. 전영의 희생 그리고 전벽강 무너지다6.3. 도도 제를 떠나 조선으로 향하다6.4. 감무의 탈주, 및 역변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309년 조선이 제와 곡부에서 맞붙은 전쟁이다. 조선왕 기유가 승하하고, 그 후계자 기설이 새로이 왕위에 오르자 제나라는 왕위교체의 혼란의 틈을 노리고 태산을 근거지로 삼고 제북 일대에 유격전을 벌인다. 이에 조선조정은 제나라에게 조선의 건재함을 보이기 위하여 제나라령 곡부로 4만7천의 대군을 보내고 제나라령 설군태수 감무가 곡부의 수성에 들어갔다.

2. 배경

2.1. 제의 사정

조선의 배신으로 임치일대를 잃어버린 제는 초와 동맹을 맺고 전열을 재정비하며 다시금 임치의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구 제나라령 조선 영토에서 소요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조선의 왕 기유가 승하하고 아직 관례도 치루지 못한 기설이 즉위하자 이를 기회로 보고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산동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군사를 끌어모아 대군을 이끌고 정면으로 조선군에 맞설 여력이 없었기에, 설군태수로 있던 감무는 군을 이끌고 태산을 근거지 삼아 태산과 이어진 제북일대에 유격전을 벌였다. 이 유격전으로 조선령 제북군과 임치군에 소요가 일어났지만, 각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문소와 가현의 활약으로 빠르게 진정세로 돌아섰다.
한편 제나라 조정은 이 유격전을 빌미로 조선이 다시금 재침하지 않을까 걱정하였지만, 감무는 지난 산동대전과 진나라내전에 개입한 조선에 여력이 없을것이고 약관의 어린 왕이 즉위했으니 한동안 조선조정은 혼란기에 들어갈 것이기에 교동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장담하였다. [4]
그러나...

2.2. 조선의 사정

제의 예상과는 반대로 조선 조정은 제나라와의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나라의 유격전을 방지하지 위해서 치안유지나, 소탕 및 구 제장성의 건축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도려내지 않으면 추후에 비슷 한일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5][6]
전면전을 결정한 조선은 임치군수 문소와 하관하대부로 있던 고나에게 4만7천의 병력을 맡겨 제나라의 곡부를 점령할 것을 명하였다.[7][8]
이는 뒷일을 생각했던 것도 있지만 산동대전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고 천하정세를 좌지우지함으로써 조선의 드높은 자존감도 한 원인이 되었다.

3. 전투의 전개

3.1. 맹상군의 시간벌기

예상돠 다르게 조선이 곡부로 군사를 보내자 제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유격전을 위해서 태산 산지 인근의 현들을 보강하느라 곡부의 방비여력이 저하되어 있었고 이대로는 조선군을 막아내기 요원해 보이는 상태였다. 이에 맹상군은 한가지 꾀를 내니 급히 조선군에 사자를 보내어 협상을 요청하여 조선군의 진공을 지연시키는 사이 설에서 급히 병력과 물자들을 동원하여 곡부로 보내는 것이었다. 마침 지난 산동대전의 패전으로 파직된 도도가 맹상군의 식객으로 있었기에 맹상군은 도도에게 지원병력과 물자를 맡겨 곡부로 보냈다.

3.2. 문소의 병자궤도

한편 문소는 맹상군이 보낸 사자에게 이번 유격전의 책임자를 조선으로 압송하면 군을 물리겠지만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대로 진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자가 조정에 상신하겠다 하고 물러나고 시야에서 벗어나자 문소는 망설임없이 전군에 재진격을 명하였다. 부관으로 동행하던 고나가 당황하며 기다린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자 문소는 곡부에 그 책임자가 있으니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면서 진격을 재촉했다. 문소가 노린것은 협상한다고 안심하고있을 곡부를 들이쳐서 일거에 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문소의 기대와는 다르게 곡부성의 군기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감무는 사자의 협상요청에 즉답을 내놓은 조선군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서 경계상황을 늦추지 않은것이었다.

3.3. 도도 곡부에 도착하였으나

맹상군의 명으로 병력과 물자를 운반하던 도도는 곡부인근에 도착하였으나 하늘도 무심하게 그녀를 맞이한것은 곡부를 공격하기 위해 사수를 넘어온 조선군의 본대였다. 곧이어 고나를 비롯한 조선군이 도도들을 공격하였고 도도는 저항해보았지만 병력의 차와 질이 압도적이어서 끝내 지원병력 3천2백은 궤멸하였고 수송해온 지원물자는 고스란히 조선군의 손에 들어왔다. 도도는 추격해오는 조선군을 뿌리치며 간신히 도주에 성공하였다.[9]
한편 아군이 도륙당하고 물자가 노획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제군이었지만 감무의 지휘와 그래도 곡부라는 대도시였던 만큼 물자는 풍족하였기에 사기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3.4. 곡부성 공방전

제군의 지원군을 격멸시킨 조선군은 그대로 곡부를 포위하고 공성전에 들어갔다. 서전의 승리로 사기가 오른 조선군의 맹공과 고나의 활약에 초전은 조선군의 유리로 보였지만 감무는 침착하게 이에 대응하면서 조금씩 조선군에 피해를 주었다. 감무를 낙하산이라 여겨 깔보던 문소는 조선군의 피해가 점점 커져가자 초조해져갔다.
그러나 감무도 너무 조선군 본대에 시선이 잡혀서 별동대를 이끌고 다른성문을 공격하던 고나를 신경쓰지 못하였다. 고나와 고나가 이끄는 조선군은 성문에 맹공을 가하였고 이내 성문을 박살내며 성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군이 곡부 내로 진입하자 제군은 크게 동요하며 무너졌고 감무도 이런한 상황에서 더이상 싸울 수는 없다 여기고 그대로 도주하였다. 총지휘관인 감무가 도주하자 곡부는 그대로 조선군에 점령되었다.

4. 결말

4.1. 조선의 곡부점령 및 사수상류 장악

곡부가 조선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근지역 일대가 말그대로 뒤집어졌다. 조선군이 진군해온 경로와 사수 이남, 곡부 인근일대를 비롯하여 문수 이북과 양보산 이동이 그대로 조선에 투항하였고 사수 상류지역이 통째로 조선에 장악된 것이었다.[10][11]

5. 전후처리

5.1. 조제화친 및 전벽강의 사죄

제나라 조정은 급히 상경 혜시를 곡부로 급파하여 협상을 제안했다. 문수 이북과 태산, 그리고 이번 유격전의 책임자 감무의 신병을 조건으로 양보산 일대와 곡부를 교환할것을 요청하였다. 제나라의 요청대로라면 조선과 제의 새로운 경계는 사수와 양관이 되는것이었다.
조옹은 전자의 교환에는 납득하였지만 후자의 태산/책임자와 곡부인근의 교환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비의는 배상금 요청이나 제왕의 사죄를 조건에 더할것을 제안하였고 조정은 논의끝에 제왕의 공식적인 사죄를 교환조건에 추가하여 악구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사신으로 파견된 악구의 조건을 들은 제왕 전벽강은 속으로 열이 끊어오르기 직전까지 갔지만, 간신히 억누르고 조건을 수락하였다.[12] 이렇게 조선과 제는 사수와 양관을 경계삼고 화친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태산 일대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

6. 영향

6.1. 전후 조선상황

전쟁에 승리한 조선이었지만 산동대전에 진나라내전에 이어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한 탓에 재정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13][14] 조옹이 이에 대비책을 묻자 비의는 단호하게 태산장성과 맥성운하를 언급하였다. 즉 재정에 여유분을 확보하고 싶으면 진행중인 대규모 사업 2개를 보류해야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둘다 조선에게 시급히 진행되어야하는 사안이었기에 조옹은 재정에 관하여는 자신보다 비의가 더 잘아니 더는 거론않겠다 하면서 한발 물러났다.
한편 임치군에 남아있던 제인들은 제군이 곡부에서 대패하고 전벽강이 조선에 무릎꿇자 이것이 대세인가 한탄하면서 서서히 조선의 점령을 인정하게되었다.

6.2. 전영의 희생 그리고 전벽강 무너지다

곡부에서 패전하고 제왕이 무릎을 꿇자 제나라의 여론은 시끄러워졌다. 특히 왕인 전벽강과 차기 재상후보인 맹상군에 대한 여론 크게 나빠지고 간신히 회복한 지배체계가 무너질 기미를 보이자 상방 전영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책임소재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그 대가로 전영은 상방에서 파직되었고, 설군의 군위도 회수되었으며 벽지로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들 맹상군 전문에게 사실상 자신의 목숨 바꿔서 얻은 기회이니 잘하라고 격려 후 담담하게 유배지로 향하였다.

문제는 전벽강이었다. 제수에서 광장이 전사하고 제군이 궤멸되어 임치를 떠날때도 조선왕에게 무릎 꿇고 사죄할 때도 간신히 참고 인내하던 전벽강은 동생 전영이 희생되는 사실에 끝내 무너져 내려버렸다.
왕도나 백성은 고사하고 제일 가까운 동생 둘까지 희생시켜서까지 끝끝내 목숨줄은 붙여놓는다.
이런 쓰레기를 왜 낳으셨나요 아버지? 히힛, 히히힛........
- 전벽강의 술주정
이날을 기점으로 전벽강은 정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하루하루를 주색잡기로 보내었다. 보다못한 혜시가 맹상군을 상방으로 삼아서 국정을 대리케 하게 해달라 요청하였지만, 전벽강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15]
결국 한동안 제나라는 맹상군을 사회자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고 당연히 중앙의 힘이 약해지고 각 지방의 힘이 커지게되었다.[16]
그렇게 전후 제나라는 혼란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6.3. 도도 제를 떠나 조선으로 향하다

도도는 앞선 전투의 패배로 맹상군에게 객의 등급이 낮아짐을 통보 받았다.[17] 이에 도도는 자신 정도의 능력에 이러한 대우로는 만족할수 없다며 맹상군에게서 떠나[18] 조선으로 향하였다.
인재는 천하의 공물이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이니
설령 어제까지의 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내가 하는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조선으로 향하는 도도의 각오
다행히 조선입국 과정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도도에 대한 여론도 나쁘지 않았다.

6.4. 감무의 탈주, 및 역변

감무는 제나라 조정이 화친의 대가로 자신을 조선으로 압송한다는 사실을 듣고 망설임없이 제나라를 떠났다. 제를 떠난 감무는 송을 거쳐 초나라로 향하였고 이때 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모습을 바꾸고 이름도 감무에서 감지로 바꾸었다.[19] 초나라에 들어온 감지가 향한곳은 바로 . 초나라의 명장 경취가 있는곳이었다.
경취는 자신을 찾아온 감지를 받아들이고 곧 그가 겪은 조선과의 전쟁 경험을 듣고 차후에 있을지 모를 조선과의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20]

[1] 이전 산동대전의 패전으로 관직에서 짤리고 현재는 맹상군의 식객[2] 곡부 주둔군 3만, 지원군 3천 2백[3]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4] 맹상군도 지난 진나라 내전때의 위의 행동을 보고 위가 이번일에 개입하지 않을것이라 말하며 감무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5] 승상 비의는 유화적인 해결을 생각했지만 섭정으로 있던 조선상 조옹은 힘에 의한 해결을 선호하여 전면전을 주장했다.[6] 메타적으로 참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동수가 나와서 결국 다이스로 전면전이 결정되었다.[7] 임치군수였던 문소가 빠지자 그 업무는 이태가 대신 맡았다.[8] 제일 좋은것은 즉묵이었지만 그럴 여력은 없었다.[9] 이때 맞붙은 고나는 일신의 무위하나는 엄청나다면서 감탄하였다.[10] 제나라 제남이 조선의 사정권안에 들어온것이다.[11] 조선측도 황당한게 어디까지나 힘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툭 친건데 제나라가 억하고 죽기직전까지 간것이다.[12] 사죄내용에 "남번의 미천한 신하가 대왕께 누를 끼쳤습니다." 가 들어간것으로 추정된다.[13] 10년간 최대 동원가능한 병력이 5만3천[14] 기존의 임치군, 제북군, 동군과 새로이 점령한 사수군이 본령화되면 이 제한은 서서히 풀린다[15] 거절의 사유가 가관인것이 "맹상군은 경험이 일천하다." 이다. 일찍이 위에서 상경까지 하던 맹상군의 경험이 일천할수가 없다. 그냥 이번사태의 주 책임자였던 맹상군이 싫었던 것이다.[16] 이 체제는 태자인 전지가 나설때까지 유지되었다.[17] 식객도 등급에 따라서 차별대우를 받는다.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이나 잠자리, 수레제공여부 등등[18] 떠나기전 이 전쟁의 책임은 지시를 잘못내린 맹상군의 탓이지 자신이 아니다 라며 악담을 퍼붓고 떠났다.[19] AA도 이때 변경되었다. 로드 엘멜로이 2세 -> 디스티 노바[20] 이때 감지를 통하여 들은 경험담은 훗날 그가 조선의 기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