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 [ruby(関白相論, ruby=かんぱくそうろん)] |
1. 개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고셋케 내부에서 관백직을 두고 벌어졌던 정치적 논쟁. 고노에 가와 니조 가 사이에 벌어진 다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양 가문 모두 이 상론의 결과 관백에 오르지 못했고, 그 대신 관백직을 차지한 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도요토미 정권의 방향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2. 배경
2.1. 혼노지의 변과 히데요시의 집권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쓰러진 뒤(혼노지의 변), 그 원수를 갚고 순식간에 세력을 키워 키나이를 장악한 것은 바로 히데요시였다. 그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제거하고, 키요스 회의에서 가중에서 본인의 위치를 상승시켰으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격파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의 천하인으로서의 위치는 굳건한 것이 되어갔다.초기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처럼[1] 조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행했다. 이는 그가 아직 명목상 오다 가의 가신 신분이었기 때문에 조정의 권위를 업지 않고서도 오다 가의 권위로 천하를 다스릴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로 주군에 해당하던 오다 노부카츠를 굴복시킨 이후, 히데요시는 더 이상 오다 가문의 충신인 양 행세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부터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내부의 위치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닌, 하시바 가문 스스로의 권위를 만들어내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조정에 접근, 관위를 획득하여 조정 권위를 가문 권위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다른 방향으로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통하여 막부의 권위를 업어보려 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후 그가 조정에 협력하고 내대신(内大臣)의 관위를 받은 것은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2.2. 조정 관위의 상황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이 당시 조정에는 이미 특정 가문들이 주도하는 관직 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관직을 조정 귀족들이 그 가격(家格)에 따라 맡는 질서가 만들어져 있었고, 특히 고셋케(오섭가)라 불리는 후지와라 계통의 다섯 가문, 즉 고노에, 구조, 이치조, 니조, 다카쓰카사가 조정의 상위 관직들을 돌아가며 차지, 사실상 독점하는 양상이 이미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러한 질서에 전통 공가가 아닌 가문이 끼어드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 쇼군 중 대신의 관위에 임명된 이도 있었고, 당장 얼마 전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우대신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노부나가의 우대신 임관과 히데요시의 임관은 상황이 달랐다. 노부나가의 경우 우대신에 임관해있던 기간은 2, 3년에 불과하였으며, 우대신 이상의 관위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내대신에서 더 나아가 승진하기를 원하였다. 이는 고셋케의 관위 회전과 얽힐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얽혀서 문제를 일으켰다.
3. 전개
히데요시가 내대신이 되고 얼마 후, 조정에서는 그를 우대신으로 승격시키고[2] 관백직을 회전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 이유로 히데요시가 댄 것은 우대신 자리가 불길하며, 저주를 받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불길로 사라진 것이, 그가 전 우대신 신분이었을 때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이 이유로 우대신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며, 대신 좌대신에 임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보였다.당시 내대신 히데요시의 상위에 있는 공경은 관백 니조 아키자네, 좌대신은 고노에 노부스케, 우대신은 키쿠테이 하루스에[3] 3인이였다. 원래 히데요시의 승진을 위해 3인 중 직위나 가문이나 가장 하위인 키쿠테이가 물러날 예정이었으나, 히데요시가 좌대신 직위를 바라며 일이 꼬였다. 이를 수습하려면 니조 아카자네가 관백에서 물러나고 고노에 노부스케가 이를 계승받아야 했으나, 고노에 노부스케는 경력상 관백에 오를 수 있는 요건이 부족한 상태라 니조와 고노에 간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이를 명분삼아 갈등을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자신을 관백으로 임명하라는 억지를 부렸다. 무가 출신, 그것도 원래 평민이었던 히데요시가 감히 가장 고귀한 자리인 관백에 오를 수 있는가를 두고[4] 조정에서는 재판까지 열었으나, 돈과 힘을 쥔 히데요시 앞에 조정은 결국 굴복하고 히데요시가 고노에 사키히사의[5] 양자로 입적하는 방식으로 고셋케의 일원이 되어 관백의 자리를 받아내었다.
4. 이후
고노에 가에 입적하고 관백에 오른 히데요시는 한동안 스스로를 고노에 히데요시, 또는 후지와라노 히데요시라 칭하였으나, 이듬해 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노 아손(豐臣朝臣)을 수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그러나 관백상론과 이후 히데요시의 행보는 계속 조정의 관위 순환에 악영향을 미쳤다. 히데요시는 자기가 관백에 오른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에게 복속시킨 타 다이묘들도 공가와 조정의 관위 체계에 편입시켜 은상을 부여하고 자신의 권위를 새웠다. 그러나 안그래도 공가 귀족들에게 돌아갈 관위도 부족해서 갈등이 있던 판국에 무가가 대규모로 조정 중앙 관위를 얻다 보니 공가 귀족들이 상위직을 얻을 승진 요건을 채우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나 도쿠가와, 모리, 우에스기, 마에다, 우키타, 코바야카와 등의 다이묘 가문이 청화가의 격을 부여받아 정3위, 종3위 관직들을 부여받은 것이 결정타였다. 때문에 히데요시 말년에는 태합[6] 겸 태정대신으로 승격한 본인을 제외하면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정 최선임자가 되는 이상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혼란을 겪은 도쿠가와 가문은 에도 막부 설립 이후 공가와 무가 간 관위를 분리하였다. 이를 무가관위라 칭하며 공가 측에서 같은 관위를 받은 사람이 있어도 중복으로 임명될 수 있게 하였다.[7] 덕분에 에도 시대에는 이러한 혼란상이 없어져 공가는 자신들의 관위를 지킬 수 있었다.
[1]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몰아낼 즈음에는 조정에 적극적으로 헌금하고 군사적으로 봉사하였지만, 1578년을 기점으로 모든 관위를 사임하고 조정과 거리를 두었다. 그가 명목상 내세운 근거는 후계자 오다 노부타다에 대한 가독 상속을 행하는 중이기에, 전임 당주가 되는 자신은 관위를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부나가의 태도는 조정에게 당혹감을 불러 일으켰다.[2] 히데요시가 오기마치 덴노가 양위 후 살 고쇼의 건축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그 공을 사 승진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는 오다 정권 말기부터 오기마치 덴노가 보인 양위에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일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승진시킬 정도로 논공을 할 만한 일이었다.[3] 오섭가 다음가는 고위 가문인 청화가의 일원인 키쿠테이(菊亭) 가문의 일원이었다.[4] 관백은 천황을 대리하는 자리다. 그만큼 가문의 격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지위가 결정되는 전근대 일본에서도 가장 고귀한 자리로 대접받아, 관백은 전하라는 호칭이 붙었고 친왕 이상의 의전서열을 받았다.[5] 고노에 노부스케의 아버지. 즉 고노에 노부스케와 히데요시는 형제가 되었다.[6] 전임 관백에 붙는 호칭. 히데요시는 자신의 조카이자 양자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관백직을 양도하였다. 나중에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숙청했지만.[7] 단 태정대신 직위만은 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