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01:08

구수서

파일:구수서.png
성명 구수서(具守書)
생몰 1894년 6월 20일 ~ 1949년 7월 2일
출생지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
사망지 경상남도 창원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구수서는 1894년 6월 20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초, 당시 진전면 봉암리 구장이었던 그는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에 고무되어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 이곳의 청년 유지들과 함께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면민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의 냇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주민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1919년 4월 3일 아침, 구수서는 봉암리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박영섭의 집에서 변상현·변상섭·변상술 등을 만나 봉암리 주민의 동원을 부탁 받고 오전 9시, 동리사람 수십명을 동원하여 양촌리 냇가로 집결하였다. 여기서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속에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행진했다. 이때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진전면으로부터 시위행진하여 오는 시위대열을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일제와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이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마산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 보조원, 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8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된 구수서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창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9년 7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구수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