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성일(聖一) / 성암(惺庵)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83년 4월 21일 |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서면 한천리 (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한천리) | |
사망 | 1951년 2월 3일 |
충청북도 제천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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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권희목은 장조카로, 맏형 권도상(權道相)의 장남이다.
2. 생애
권명상은 1883년 4월 21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서면 한천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한천리)에서 아버지 권숙(權潚)과 어머니 청송 심씨 심의구(沈宜龜)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읍내리[2]로 이주하였다.아버지 권숙은 1882년(고종 19) 별시 제2회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종4품)에 올랐으나, 1895년 2월 유인석 의진에 체포되어 같은 달 15일 친일개화파라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졌다. 맏형 권도상(權道相)은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475위로 입격하여, 구한말 봉화군수(奉化郡守)를 역임하고 일제강점기 때는 충청북도 제2부 및 제3부의 도참사를 지내기도 했다. 둘째 형 권보상(權輔相)은 1894년(고종 3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27위로 입격하고 한성부 중교의숙(中橋義塾) 영어과를 거쳐 190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에 교외생(校外生)으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엘리트였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특파원 신덕영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았다는 정인옥의 말을 듣고 조국독립을 위해 군자금 모집에 헌신할 뜻을 굳혔다. 그리하여 그는 정인옥·이내수(李來修)·홍승욱 등의 동지와 더불어 대한민국 군본부인(軍本部印) 및 사령관인 군자금 납입을 권유하는 내용의 유고문(諭告文)·격방문(檄榜文) 등을 인쇄한 후 본격적인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또한 그는 1919년 12월 강원도 영월군에 거주하는 장응식(張應植)·장한식(張漢植) 형제에게서 군자금 1,000원을 모금하였으며, 홍승욱은 1920년 4월 22일 홍순창(洪淳昌)[3]과 함께 충청북도 괴산군의 조성환(曺成煥)[4]으로부터 군자금 40원을, 동지인 정재흠·김창선(金昌先) 등은 1922년 10월 15일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에 거주하는 오팔봉(吳八奉)으로부터 헌금 150원과 명주 20척을 모금하는 등 경상북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동료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3년 1월 27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공주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23년 3월 24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3년 10월 1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리고 상고했으나 10월 22일 상고를 취하하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 펑톈으로 망명하여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으며 1951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명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