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권응모(權應模) |
자 | 희서(希瑞)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0년 7월 20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 |
사망 | 1935년 12월 28일[2] |
경상북도 영덕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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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태응은 1890년 7월 2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권영송(權永松)과 어머니 한양 조씨 조언한(趙彦翰)의 딸 사이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 등이 주도한 영해읍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그날 오후 1시경 남효직, 남진두, 남계병, 남교문, 정규하 등 3천 명의 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후 다시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권태응은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며 건물 등을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탈취 파기하였다.
오후 2시경, 그는 정규하 등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연도의 군중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영해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平海)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과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 파괴하였다. 그러는 동안 평해에서 응원하러 온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결국 시위대는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인해 체포된 권태응은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5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태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