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말루어 전투 영어: Battle of Glenmalure 아일랜드어:Cath Ghleann Molúra | ||
시기 | ||
1580년 8월 25일 | ||
장소 | ||
아일랜드 왕국 위클로주 글렌말루어 | ||
원인 | ||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진압하려는 잉글랜드군의 공세 |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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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제임스 유스터스 | ||
병력 | ||
2,000명 | 700명 | |
피해 | ||
360~800명 | 미미함. | |
결과 | ||
아일랜드 반란군의 승리. | ||
영향 | ||
잉글랜드군의 데스몬드 반란 조기 진압 실패. |
1. 개요
제2차 데스몬드 반란 시기인 1580년 8월 25일, 아일랜드 왕국 위클로주 글렌말루어에서 잉글랜드군과 아일랜드 반군이 격돌한 전투.2. 배경
1579년 7월에 발발한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은 잉글랜드인 총독의 억압과 차별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은 아일랜드인들이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를 중심으로 호응하고 스페인 제국에서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먼스터 전역에 확산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이 1580년 초 아일랜드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펠럼과 조지 케어우는 잉글랜드를 꿋꿋이 지지한 아일랜드 영주인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와 함께 병력을 규합한 후 먼스터로 진군해 리머릭 주, 코크 주, 케리 주 북부에 걸친 데스몬드 가문 영지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그곳에 사는 민간인을 살육했다. 이러한 전술은 데스몬드 백작 가문의 추종자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인적 피해를 줘 반란에서 이탈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1580년 3월, 잉글랜드군은 섀넌 강 어귀에 있는 캐리거포일 성을 포위했다. 1,4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윌리엄 펠럼은 윌리엄 윈터가 이끄는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캐리거포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뒤, 그곳에 주둔한 반란군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제 그들은 북쪽에서 반란군을 차단하고 외국군이 먼스터의 주요 항구인 리머릭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다른 데스몬드 가문 요새들도 빠르게 함락되었다. 애스키턴 성은 스페인 수비대가 성벽을 폭파하면서 버려졌고, 뉴캐슬 웨스트, 발리로건, 래스킬, 벨리더프 수비대는 곧 항복했다. 맥카시 모르 등 반란에 가담했던 많은 영주도 잉글랜드가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이제 반란은 곧 진압되는 듯했지만, 1580년 7월 클로우 산맥을 기반으로 삼던 피아흐 맥휴 오바인이 아일랜드 동부의 렌스터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마바나(Kavanagh), 오툴스(O'Tooles), 오무어스(O'Moores)를 포함한 지역 영주 및 씨족 지도자들의 연합을 결성했는데, 이중 다수는 이미 수년 동안 잉글랜드 수비대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반란군은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상징적인 거부의 의미로 잉글랜드가 정복하기 이전에 렌스터에서 왕을 칭한 조상을 둔 크레온 맥머러프 카바나흐를 렌스터의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오바인은 페일의 잉글랜드 출신 영주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앙심을 간직해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에 불만을 느꼈던 제3대 볼팅글래스 자작 제임스 유스터스와 합류했다.
렌스터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나자, 잉글랜드 당국은 1580년 8월에 아일랜드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제14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아서 그레이에게 2,000명을 맡겨 렌스터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는 아일랜드로 파견된 잉글랜드군 중 가장 큰 규모였다. 그러나 아서 그레이는 아일랜드에서 전쟁을 치른 경험이 부족했고, 20년 동안 군 복무를 하지 않았으며, 아일랜드 통치 방식에 대한 정보를 거의 받지 못했기에 현지 사정에 어두웠다. 오바인, 볼팅글래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대규모 잉글랜드군이 몰려오자 클랜말루어로 철수한 뒤 아서 그레이에게 협상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아서 그레이는 잉글랜드 당국으로부터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았기에 무시했다.
1580년 8월 18일, 아서 그레이는 군대를 나스로 이동하여 길 안내자들을 모은 뒤, 위클로 산맥을 우회하여 남동쪽에서 오바인의 군대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진군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보니 반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아서 그레이는 적을 추격하고자 위클로 산맥 깊숙이 진군했지만, 그 과정에서 폭이 무척 좁은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 사이, 오바인은 아서 그레이의 군대에서 이탈한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했고, 좁은 길을 뒤지는 진홍색과 파란색 코트를 입은 장병들의 존재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3. 전투 경과
1580년 8월 25일, 며칠째 반란군을 찾아 헤매던 아서 그레이는 적 선봉대로 보이는 병력이 앞에 나타난 걸 확인했다. 아일랜드에서 오랫동안 복무했던 숙련된 장교들은 일단 행군을 멈추고 매복이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아서 그레이는 드디어 나타난 적을 얼른 격멸하고 싶은 생각에 즉시 교전하라고 명령했다. 조지 무어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선봉대는 적군을 협곡으로 추격했다. 협곡은 4마일(약 6.4km) 길이의 강이 양분하는 울창한 계곡으로, 가파른 경사와 울창한 수풀로 뒤덮였으며, 어떤 곳은 해발 2,000피트(약 600m)까지 솟아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협곡으로 점점 깊이 끌려들어가면서 후퇴하는 아일랜드군과 전투를 벌였다.주변이 온통 바위, 늪, 나무로 뒤덮인 걸 인지한 무어 대령은 좀더 높고 방어하기 쉬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협곡 북쪽 경사면으로 진격하게 했다. 이에 병사들이 가파른 경사를 오르던 중, 숲에 숨어 있던 아일랜드군이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 잉글랜드군은 오랫동안 아일랜드군의 저격을 받다가 규율이 무너져서 계곡 아래로 도망쳤고, 아일랜드인들은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해 칼, 창, 도끼로 아일랜드인들을 공격했다. 수십 명이 전장에서 탈출하려다 추격하는 적군에게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레스드럼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수 마일 동안 아일랜드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다만 아서 그레이의 기병대와 후위대가 윌리엄 스탠리의 지휘하에 적군의 추격을 막아준 덕분에, 잉글랜드군이 완전히 섬멸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