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衿陽雜錄. 조선 성종 23년, 1492년에 발간된 민간 농서. 강희맹(姜希孟)[1]이 저술한 것을 훗날 아들 강구손(姜龜孫)이 발간한 것이다.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농사직설이 국가에서 편찬한 관찬농서인 것과 달리 금양잡록은 강희맹 개인이 경험하고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현재 일본 도쿄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병조판서였던 강희맹이 1475년 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금양현(현재의 서울 서남부 지역 및 광명시, 즉 옛 시흥군 일대)의 작은 집[2]에 은거하며 직접 농사를 지을 때, 그곳 농민들에게 가르침 받은 내용과 자신의 체험, 견문을 토대로 저술한 농서다. 2년 뒤 이조판서로 중앙에 복귀하는 강희맹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저술을 마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가 사망하는 1483년 이전에는 완성되었을 것이다.개인이 홀로 저술한 책이지만 후대에는 농사직설과 쌍벽을 이루는 농서로 여겨졌으며, 권별은 해동잡록에서 "‘금양잡록 한 편을 보면 조선의 모든 곡식의 품질과 모양의 구별, 씨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 작업의 순서 등이 모두 사리에 들어맞는다. 특히 <제풍변(諸風辨)>, <농담농구(農談農謳)> 등의 편은 분별하여 기술함이 매우 자세하여 농가의 수고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라고 하며 극찬하였다. 훗날 농가집성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용은 농가곡품(農家穀品), 농담(農談), 농자대(農者對), 제풍변(諸風辨), 종곡의(種穀宜), 농구(農謳)의 6개 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국 고유의 농사기술과 벼의 품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중국, 일본에서 국내로 들여온 벼 품종에 대한 소개도 있다.
농업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지만 동시에 국어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자료다. 이두와 한글이 많이 써져 있어 15세기 조선 전기의 언어사적 자료 중 하나다. 예) 콩 : 백승태(百升太, 온되콩), 화태(火太, 불콩), 자을외태(者乙外太, 쟐외콩)
금양잡록의 금양을 경기도 시흥시 일대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지역들이 한때 시흥군이라는 행정구역에 속한 적은 있으나 그건 경술국치 이후의 일이고 정작 현재의 시흥시는 저술 당시의 금양 지역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설명이다. 다만 강희맹이 연꽃을 심었다고 전해지는 관곡지와 강희맹 부부의 묘가 있는 연성동 지역이 시흥시에 속하는 등,[3] 금양잡록과 별개로 강희맹 본인이 시흥시와 관계가 깊기도 해서 혼동하기 쉬운 부분이다.
[1] 원예서인《양화소록》으로 유명한 강희안(姜希顔)의 친동생으로, 신찬국조보감,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편찬 등에 참여했다. 어린 연산군이 크게 의지했던 인물.[2]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4동 807-14번지이다. 2020년 현재 그 자리에는 빌라가 있으며 한켠에 '강희맹 살던 곳'이라는 표석이 위치하고 있다. (링크)[3] 강희맹 시대에는 안산군에 속했으며, 애초에 '연성(蓮城)'은 강희맹이 관곡지에 심은 연꽃에서 유래한 안산의 별칭이었기에 안산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