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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기욤 칼레 Guillaume Caillet | |
별명 | 자크 봉옴므 Jacques Bonhomme | |
생몰년도 | 미상 ~ 1356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보베 멜루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클레르몽 | |
직위 | 자크리 반란군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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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농민. 자크리의 난을 이끈 인물이다.2. 생애
출생년도, 기원 및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파리 북쪽 보베의 멜루 마을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당대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농민들 중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갖췄으며, 웅변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에게 '자크 봉옴므(Jacques Bonhomme)'라는 별명을 붙였다. 자크는 고대 프랑스어에서 농부를 뜻하는 호칭으로, 전형적인 농부들이 입는 짧은 조끼인 "자퀘(Jacque)"에서 유래했다. 봉옴므는 선한 사람을 약탈하고 잡아먹는다는 의미로, '선한 사람'은 귀족 및 성직자들을 의미한다.1358년 5월, 보베 지방 농민들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왕을 버리고 도망친 귀족들을 몹시 불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샤를 도팽이 바닥을 드러낸 왕실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인두세를 걷기로 했다는 소식이 접하자 격분했다. 크레유 인근의 생뢰데세링 농민들은 곤궁한 처지에 놓인 자신들에게 세금을 또 걷는 건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다며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순식간에 보베 전역에 확산되다. 이때 그들은 기욤 칼레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고 "왕" 또는 "평지의 주권자"라고 칭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가 그 자리에 맡기를 거부했지만, 반란군이 자기들을 이끌어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기록에 따르면, 구호기사단의 일원이었던 자크 베르니에 드 몽타테르가 그의 동지였다고 한다.
기욤은 주로 국내외 귀족들의 공격으로루터 농민들을 지키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귀족 경호원과 가신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보베 일대를 장악한 뒤 수백 명의 귀족, 가신, 그들의 아내와 가족을 살해했다. 이후 상리스, 클레르몽, 크레유 마을의 반란군과 합류해 총 5,000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는데, 이중엔 지난날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파산해버린 하급 귀족들도 일부 있었다. 한편, 파리를 장악한 뒤 샤를 도팽과 맞서 싸우고 있던 에티엔 마르셀은 이들과 손 잡으면 샤를 도팽에 대적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농민들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고 장 베일런트가 지휘하는 300 가량의 민병대를 파견해 그들과 합세하도록 했다.
1358년 6월 8일 멜루 언덕에 집결한 농민 반란군은 6월 9일 파리 외곽의 모앙브리 요새로 쳐들어갔다. 당시 그곳에는 루이 왕자와 왕실 및 귀족 여인들이 피신해 있었다. 왕자와 왕녀, 귀부인들이 반란군에게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 출신 잉글랜드 장성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는 그들을 돕기로 하고, 40명의 기사와 함께 모앙브리로 질주했다. 그들은 모앙브리를 포위하고 있던 농민 1,000명을 격파하고 귀족 여인들을 구원했다. 한편,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북부 기사들로부터 농민 반란군 토벌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따르기로 했다.
6월 9일, 카를로스 2세가 이끄는 군대가 멜루로 접근했다. 그는 자크 칼레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안했다. 이에 기욤 칼레는 그와 한 편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협상하러 찾아왔지만, 카를로스 2세는 그를 곧바로 체포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카를로스 2세는 뜨겁게 달아오른 쇠 삼각대로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죽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카를로스 2세가 멜루에 남은 농민 반란군을 공격해 모조리 섬멸해버린 뒤 클레르몽의 플레이스 드 그레브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1] 빅토르 니콜라스 작, <자크 봉옴므 석고 조각상>, 19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