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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마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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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에티엔 마르셀
Étienne Marcel
생몰년도 1302년에서 1310년 사이 ~ 1358년 7월 31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시몽 마르셀
어머니 이자벨 바르부
아내 담마르틴의 잔, 마르그리트 데 에사르
직위 파리 상인의 장관

1. 개요2. 생애3. 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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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부르주아. 푸아티에 전투 후 왕실과 귀족들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등에 업어 파리의 소규모 장인과 직공의 권리를 옹호하고 왕권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카를로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샤를 도팽을 사실상 포로로 삼고 파리를 장악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자크리의 난에 호응했다가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고, 결정적으로 잉글랜드 용병대에게 파리 수비를 맡기려 했다가 시민들의 분노를 사 피살되었다.

2. 생애

1302년에서 1310년 사이에 포목업자인 시몽 마르셀과 왕실을 경호하는 장교의 딸이라고 전해지는 이자벨 바르부 사이에서 출생했다. 마르셀 가문은 파리에 거주한 부르주아 중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다. 제 7, 8차 십자군을 일으켰던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피에르 마르셀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고, 그 대가로 상업적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마르셀 가문은 플란데런 백국과 브라반트 백국에서 직물을 수입해 비싼 가격에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거뒀고, 부동산에도 크게 투자했으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를 활용해 추가 사업을 벌여 큰 부를 쌓았다. 이들은 이렇게 쌓은 재산을 국왕과 왕족들에게 적극적으로 빌려줘서 그들의 신임을 얻어냈으며, 다른 강력한 파리 부르주아 가문과도 인맥을 쌓았다.

에티엔은 1330년대에 직물 무역을 시작했다. 그는 플란데런과 브라반트에서 수입한 대리석 베르델레(verdelet)를 궁정에 판매해 큰 수익을 얻었으며, 플란데런 공동체의 부유한 상인들과 인맥을 두텁게 다졌다. 또한 파리의 부유한 시의회 의원의 딸인 담마르틴의 잔과 처음 결혼했고, 잔이 사망한 후에는 은행가 피에르 데 에사르의 딸인 마르그리트와 재혼했다. 그는 막대한 집안의 부를 활용해 시테섬에 거주했고, 파리의 수많은 건물을 소유했다.

그러던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한 것에 격노한 파리 시민과 영주들은 패배를 초래한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에티엔의 장인인 피에르 데 에사르는 더 많은 동전을 찍기 위해 동전의 귀금속 함량을 낮추는 조치를 지속적으로 시행해 통화 가치를 지나치게 떨어뜨려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을 받고 투옥되었다. 에티엔은 장인을 구하고자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에게 선처를 호소했고, 프랑스 당국은 곧 피에르에게 이렇다할 판결을 내리지 않고 감옥에서 나오게 했다. 그러나 피에르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349년에 사망했다.

피에르의 상속인 중 한 명이었던 에티엔은 재판이 끝나면 고인의 재산에 부과될 벌금이 막대할 것이고, 아내의 지참금도 걱정되었기에 상속을 거부했다. 반면 또다른 강력한 부르주아이며 피에르의 또다른 사위였던 로베르 드 로리스는 상속을 받기로 했고, 재판이 유야무야 끝나버리고 벌금도 부과되지 않으면서 50,000 리브르에 달하는 피에르의 재산을 단독으로 물려받았다. 이에 에티엔은 로베르가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측근으로서 사전에 벌금이 내려지지 않을 것을 인지해 사기를 친 것이라 여기고 깊은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왕의 금융가로 지명된 로베르가 파리의 포목업자들을 배제하고 켄트, 루뱅 또는 브뤼셀에 직접 거래할 수 있다는 칙령이 내려지자, 파리 포목업자들 역시 로베르에게 불만을 품었다.

에티엔은 파리의 가장 명망높은 형제단[1]인 노트르담 대형제단과 생자크오펠레랭 형제단에 속했다. 이중 생자크오펠레랭 형제단의 회원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가겠다고 맹세했다. 나바라 왕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나라였으며, 그곳의 왕인 카를로스 2세도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에티엔은 이 형제단에서 영향력을 계속 키워간 끝에 형제단의 지도자로 거듭났고, 형제단의 지원에 힘입어 1354년 장 드 파시의 뒤를 이어 파리 상인의 장관이 되었다.

파리 상인의 장관은 1246년 루이 9세가 창설한 직위로, 파리의 물자 공급, 공공 사업, 세금 기반 관리를 수행했다. 이론적으로는 상업 업무에만 국한되었지만, 왕족의 특권 남용으로부터 파리 부르주아의 권리를 보호하는 역할도 맡으면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에티엔은 파리 상인의 장관의 응접실을 호텔드빌 광장의 '기둥의 집(Maison aux Piliers)'으로 옮기고 파리 상인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1355년 11월에는 파리 분견대인 피카르디 연대의 지휘를 맡아 파리 시를 자체적으로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파리의 요새를 수리하고 오른쪽 강둑에 새로운 성벽을 세웠다.

1355년 5월 8일, 장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재정을 메꾸기로 하고, 장 폴레방과 니콜라 브라크를 화폐 주조관에 선임했다. 두 사람은 세금을 새로 부과하는 대신 동전의 귀금속 함량을 또다시 낮추기로 했다. 이리하여 통화 가치가 다시 한 번 평가절하되었고, 급료와 임대료는 부르주아, 귀족, 고위 성직자 모두를 경악시킬 정도로 감소되었다. 이에 파리 민중과 귀족, 성직자들의 반감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도 군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자, 장 2세는 1355년 12월 2일 파리의 팔레 드 라 시테 성당의 대회당에서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30,000명의 군대를 모아서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르려 한다며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삼부회에 참석한 인사들은 화폐가 1년 만에 82%에 달하는 가치를 상실했고, 이로 인해 화폐를 수입원으로 삼던 이들에게 심한 피해가 가해지고 있다며, 강력한 가치를 보장하는 새 화폐를 발행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징수된 자금의 실행 및 사용을 통제할 수 있고, 강력한 통화가 발행되는 조건으로 리나르 당 8데나리온의 상업 거래에 대한 세금 부과를 수락했다. 또한 세금을 징수할 9명의 임원을 각 주마다 선발해 세금을 걷도록 했다.

장 2세는 삼부회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세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기껏 발행한 새 화폐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에 삼부회는 1356년 3월에 재차 열렸다. 이들은 상업 거래 뿐만 아니라 토지 소득에도 세금을 부과해 과세 기반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납세자의 소득을 정량화할 수 있는 행정체계가 필요했지만, 당시 실정으로는 어려웠다. 이렇듯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군자금을 마련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 장 2세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추격했다. 이때 각 도시의 민병대들이 왕을 돕고자 몰려왔지만, 장 2세는 중간에 이들을 해산시키고 기병들만 이끌고 에드워드를 추격했다. 명목상으로는 에드워드를 따라잡아서 끝장내겠다는 거였지만, 실제로는 크레시 전투 이후 날로 심화되어가는 귀족과 왕실에 대한 민중의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귀족과 기사, 용병대만으로 구성된 부대로 승리를 거두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356년 9월 19일에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프랑스군은 또다시 참패했고, 장 2세는 용맹히 싸웠으나 끝내 생포되었다. 전장을 겨우 빠져나온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도팽은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하면서 잉글랜드와 협상을 벌였지만, 동원 해제된 용병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결성해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샤를 도팽은 용병대를 토벌하기 위해 30,000명의 영구 군대를 창설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삼부회를 다시 소집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그러나 샤를 도팽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는 이제 겨우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동생인 필리프와는 달리 푸아티에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불신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1356년 10월 17일에 개최된 삼부회는 패배를 초래한 장 2세의 측근들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에티엔은 랑의 대주교 로베르 르콕과 동맹을 맺었고, 당시 장 2세에 의해 두에의 아를뢰 요새에 수감된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과 결탁했다. 그를 비롯한 삼부회 인사들은 샤를 도팽에게 통화 가치를 위험한 수준으로 평가절하한 왕실 고문들을 해고하고, 국왕을 돕는 의회를 정기적으로 선출하고 개최하도록 허용하며, 카를로스 2세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샤를 도팽은 현 상황에서 왕권을 다소 통제하는 건 받아들일만 하다고 여겼지만, 카를로스 2세의 석방은 발루아 왕조를 위험에 빠뜨릴 게 분명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제안을 즉시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그는 아버지의 의향을 물어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응답을 미루다가 삼부회를 해산시켰다.

1356년 12월 10일, 샤를 도팽은 삼부회를 거치지 않고도 금고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통화를 시행하는 칙령을 반포한 뒤 형제 루이에게 파리를 맡기고 메츠로 떠났다. 이에 파리 상인들은 격분했고, 에티엔은 소규모 장인과 직공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키게 했다. 이리하여 파리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샤를 도팽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명령을 취소했다. 이후 에티엔 마르셀은 통제된 군주제와 행정 재편을 위한 광범위한 개혁안인 <1357년 대조례(Grande ordonnance de 1357)>를 작성하고, 1357년 3월 메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임된 황제 카를 4세와 면담한 뒤 파리로 돌아온 샤를 도팽에게 대조례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했고, 샤를 도팽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감독 위원회가 설립되어 잘못을 저지른 공무원, 특히 부도덕한 세금 징수원들을 해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샤를 도팽의 고문 9명이 해고되었는데, 그중에는 에티엔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던 로베르 드 로리스도 있었다. 여기에 6명의 대표가 왕의 평의회에 참여해 국정을 함께 논의하게 되었으며, 재정, 특히 금전적 변화와 특별 보조금은 위원회에 의해 통제되도록 했다.

이제 프랑스에는 샤를 도팽이 이끄는 섭정 정부와 삼부회의 2개 국가 기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각지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고 카를로스의 추종자들은 카를로스를 석방하라고 압박했다. 특히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힘을 합쳐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샤를 도팽은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를 아를뢰 성에서 석방시키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아미앵에 잠시 들렀다가 삼부회의 초대를 받아 파리로 갔다.

1357년 11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카를로스는 민중들에게 자신을 투옥시킨 자들을 규탄하는 연설을 감행했다. 이에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파리 시민들이 "나바라 국왕을 부당하게 대우한 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도팽은 일단 카를로스와 협상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에 가해진 모든 피해를 보상할 것, 자신과 추종자들을 사면할 것, 장 2세에 의해 처형된 동료들을 명에롭게 매장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이와 더불어 노르망디 공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신에게 정식으로 넘기라고 촉구했다. 샤를 도팽은 이를 거부할 수 없었고, 카를로스와 나바라인에 대한 사면령에 서명했다.

이후 샤를 도팽은 급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는 용병대로부터 파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2,000명의 병사들을 파리에 끌어들였다. 이 군대의 존재로 인해 파리 시민들은 압박감을 느꼈다. 1358년 1월 11일, 샤를 도팽은 레 알 드 파리에서 시민들에게 자신이 군대를 모집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삼부회가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맡게 되었는데도 국가의 방어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월 14일, 삼부회는 통제된 왕권 문제와 새로운 세금 부과에 대해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이에 여론은 삼부회를 무능하다고 질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357년 대조례의 집행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삼부회가 임명한 세금 징수원들은 가난한 농민과 장인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감독 위원회에 들어간 6명의 대표는 지극히 소수였으며, 도팽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통제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자연히 공무원들은 그들 대신 샤를 도팽을 지지했다. 또한 당시에는 여행길이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했기 때문에, 지방 의원들이 파리로 가는 건 매우 힘들었다. 결국 프랑스 각지에서 뽑은 의원이 삼부회를 구성한다는 기존의 발상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고, 곧 파리의 부르주아들만이 삼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런던에 억류되어 있던 장 2세가 1357년 대조례의 적용을 금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생포되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잉글랜드에 끌려가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그의 지시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여기에 장 2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정에 합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에 카를로스는 평화 협정이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에티엔에게 이대로 대조례가 무산되는 걸 좌시하지 말고 거사를 단행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장 2세가 합의한 평화 협정에 프랑스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기옌, 생통주, 푸아투, 리무쟁, 쿠에르시, 페리고르, 루에르그 및 비고르가 잉글랜드에 넘어간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한 파리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자, 에티엔은 이를 이용해 거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1358년 1월 10일, 카를로스 2세는 루앙 대성당에서 장 2세에게 처형된 추종자 4명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을 거행한 뒤 이들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1월 24일, 파리 환전소의 하인이 샤를 도팽의 친척을 살해하고 교회에 피신하던 중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이후 2개의 장례 행렬이 거행되었는데, 하나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렬로 샤를 도팽이 이끌었고, 다른 한쪽에는 살인자의 행렬로 에티엔을 비롯한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이끌었다. 이후 샤를 도팽의 측근들이 곧 숙청을 단행할 거라는 소문이 횡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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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장관 에티엔 마르셀과 샤를 도팽>, 루시앙-에티엔 멜랭, 1879년.

2월 22일, 에티엔은 마침내 민중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고 파리에 수감된 죄수들을 풀어주고 도팽의 군대에 맞섰다. 이내 3,000명에 달하는 무리가 집결했고, 일전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간의 합의안을 도출하고 파리에 보고했던 르노 다시(Regnault d'Acy)는 이들에게 체포된 뒤 목이 베어진 후 장대에 꽂혔다. 이후 에티엔은 군중을 이끌고 샤를 도팽이 있던 팔레 드 라 시테 궁전으로 쳐들어가 샤를 도팽을 따르던 장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샤를이 있던 방에 난입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티엔은 샤를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전하, 이제 보시는 일로 인해 놀라지 마십시오. 이 일들은 우리가 정한 것이요, 그 일이 이뤄지는 것은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직후,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샤를 도팽 앞에서 피살당했고, 그들의 피가 샤를 도팽의 옷에 묻었다. 에티엔은 샤를에게 폭도들이 입고 있던 빨간색과 파란색 후드를 착용하라고 강요했고, 자신은 도팽의 모자를 썼다. 그러면서 1357년 대조례를 갱신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도팽은 공포에 질린 채 받아들였다. 그 후 플레이스 드 글레브(Place de Grève) 광장으로 가서 '왕국의 반역자'를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한 군중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방 정부에 서신을 보냈지만, 오직 아미앵과 아라스만이 지지를 표했다.

이제 샤를 도팽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에티엔 마르셀이 주도하는 삼부회가 행정과 재정을 주관했다. 여기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평화 협약은 무효로 간주되었다. 이 새로운 조례를 비준하려면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파리에서 모이기를 거부하고 상리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샤를 도팽은 이들과 회담을 가진 후 파리로 돌아올 테니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에티엔은 10명의 부르주아를 대표단으로 선임하고 그들의 감시를 받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나온 샤를 도팽은 4월 9일 프로뱅에서 열린 상파뉴 삼부회에 참석해 그곳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던 10명의 대표단을 구금했다. 이후 샤를을 추종하는 기사단은 몽뜨호와 모 요새를 점거했다.

샤를에게 속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에티엔은 카를로스에게 속히 파리로 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카를로스는 파리로 가려던 중에 병에 걸려 몸져누웠다. 그 사이에 샤를은 프랑스 동부에서 병력을 규합해 반격에 착수했다. 이후 파리 주변의 영토는 카를로스가 파견한 노르망디군과 샤를 왕자가 보낸 선봉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에티엔은 카를로스에게 샤를 왕자와 협상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1358년 5월, 그동안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다가 샤를 도팽이 부과한 새 세금에 격분한 프랑스 북동부의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해 귀족들을 집단 학살했다.(자크리의 난) 에티엔은 자크리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프랑스 북부 기사들은 카를로스에게 자크리 토벌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들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고, 1358년 6월 10일 멜루 전투에서 지도자 기욤 칼레를 비롯한 자크리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파리로 들어와서 민중을 소집한 뒤 자신을 "파리의 대장"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크리와 손잡았던 에티엔 마르셀을 토벌하지 않고 손잡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샤를 도팽 쪽으로 등을 돌렸다.

1358년 6월 29일, 에티엔은 카를로스 2세 진영에서 이탈한 기사들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잉글랜드 궁수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파리를 방어하는 잉글랜드 용병들은 파리 시민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파리 근교로 진군한 샤를 도팽의 군대와 카를로스 2세와 에티엔의 군대가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르던 7월 21일, 술집에서 벌어진 사소한 싸움이 시가전으로 변질되면서 34명의 잉글랜드 궁수들이 학살당했다. 다음날, 에티엔과 로베르 르콕, 카를로스 2세는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플레이스 드 글레브에 군중을 집결시켰다. 군중들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동료를 살해한 파리 시민들에게 분노한 용병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을 가하면서 시가전이 또 벌어졌다.

이로 인해 600~700명이 피살당했고, 파리 시민들은 카를로스가 용병들에게 자신들을 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카를로스의 형제인 필리프가 10,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은 도시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할 것을 우려했다. 한편, 에티엔은 나바르군의 입성을 준비하는 한편, 7월 30일부터 31일까지의 밤에 샤를 도팽을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곧 발각되었고, 에티엔이 잉글랜드군에 파리를 넘겨주려 한다는 의혹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부르주아들 역시 에티엔을 더 이상 따랐다가는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워진다고 확신하고, 에티엔을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파일:에티엔 마르셀 암살.jpg
에티엔 마르셀 암살.

1358년 7월 31일 새벽, 에티엔은 카를로스 2세의 재무관과 함께 삼부회 의원 장 마이야르에게 생데니스 성문 열쇠를 주려 했다. 그러나 장 마이야르는 이를 거부했고, 에티엔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 하는 순간에 경보를 울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모았다. 그들은 깜짝 놀란 에티엔에게 이렇게 외치라고 요구했다.
"Montjoie au roi et au duc!(왕과 공작에게 몽주아!)"

에티엔은 망설이다가 따라 외쳤다.
"Montjoie au roi.(왕에게 몽주아)"

이후 에티엔이 "이게 무슨 소리죠?라고 묻는 순간, 군중이 무기를 들어 그를 포함한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카를로스 2세는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고, 샤를 도팽은 8월 2일에 파리에 입성한 뒤 에티엔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한 주동자 15명만 처형하고 파리 시민들을 사면했으며, 반역죄로 처형된 이들의 친척들을 약탈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국왕의 조세 수취권 제한 등 왕권의 제약과 삼부회의 상설화, 파리 부르주아 및 상인 계급의 정치적 권리 확보 등을 이루려 했던 에티엔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3. 후대의 평가

에티엔은 피살된 이래 프랑스 왕국 시대 내내 왕실을 능멸하고 잉글랜드에 파리를 넘기려 한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후, 그는 '혁명의 선각자'로 떠올랐다. 신임 파리 시장 장 실뱅 바이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에게 파리의 색상인 파란색과 빨간색 후드를 쓰게 했는데, 이는 에티엔이 샤를 도팽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행위였다. 이후 19세기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에는 강대한 권력에 대항하여 소규모 장인들을 수호한,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각광받았다.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들은 그를 "갈리아의 가장 저명한 시민 중 한 명", "14세기의 당통"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1884년 7월 14일, 에티엔 마르셀의 승마상이 파리 시정 정원에 세워졌다.


[1] 서구 세계에서 상호 형제적 지원을 촉진하거나 특정 종교 전통을 활성화하고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평신도 그리스도인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