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길도 (Gildo) |
출생 | 미상 |
사망 | 398년 |
직위 | 마기스테르 밀리툼 |
반란 대상 | 호노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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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반란자. 아프리카 속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장군으로,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충성하였으나 테오도시우스 사후 호노리우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동방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에게 충성하며 반기를 들었지만,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에 의해 진압되었다.2. 생애
길도는 베르베르 족장이며 로마군 장군이자 부유한 기독교 신자였던 누벨의 아들들 중 하나였다. 그는 형제 피르무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373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부친인 대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 그는 즉시 합류했다. 테오도시우스는 그에게 아프리카 속주에서 수탈을 일삼고, 베르베르 족의 침입으로부터 속주민들을 지키는 임무를 방기한 로마누스 총독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겼다. 테오도시우스는 즉시 로마누스 일당을 체포하여 테오도시우스에게 바쳤다. 그 후 그는 반란에 가담한 페리키우스 등도 추가로 체포했다.385년 또는 386년, 길도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383년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살해하고 서방의 황제가 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길도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고 주장한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피르무스의 반란을 진압할 때 길도가 '막시무스'와 연합하여 작전을 펼쳤다고 기술했는데, 이 막시무스가 마그누스 막시무스라는 것이다. 실제로 막시무스는 383년 그라타아누스를 공격할 때 아프리카의 유명한 기병대인 마우리타니아 기병대를 자기 편으로 회유했다. 하지만 막시무스가 길도를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는 걸 입증할 기록은 현존하지 않으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그를 총독에 임명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388년 테오도시우스가 막시무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 길도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392년 테오도시우스의 장군이었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갑작스런 사망 직후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내세우며 테오도시우스와 대적했을 때, 그는 여전히 테오도시우스를 따랐다. 테오도시우스 장군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의 딸 살비나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첫번째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리아의 조카 네브리디우스와 결혼한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시우스는 이에 보답하고자 393년 길도를 아프리카 민병대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394년 테오도시우스가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를 무너뜨린 뒤, 길도는 아프리카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에 선임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 1세가 수종으로 사망했다.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는 자신이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섭정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스틸리코의 영향력은 서방에 국한되었다. 395년과 397년,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고트족을 격파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은 스틸리코가 동쪽으로 진군하여 수도를 장악하려고 핑계를 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렇듯 서방과 동방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던 397년, 길도는 호노리우스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반기를 들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길도의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두 황제의 통치 초기에 아프리카의 총독이었던 길도는 테오도시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부의 말처럼, 시기심에 의해, 또는 아프리카를 동방에 합류하려고 하거나, 두 어린 소년의 통치에 대한 전망이 거의 없다고 믿으려고 했다. 무엇보다 이 둘을 제외하면 이전에 최고 권력자로 남겨진 소년 중 어느 누구도 성인이 될 때까지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틸리코가 고용한 궁중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길도의 반란에 대한 장문의 설명을 남겼지만, 길도가 서쪽 조정에 대한 충성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기술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걸 자세히 서술하는 게 스틸리코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듯 하다. 클라우디아누스는 길도가 폭군이고, 강도이며, 야만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길도를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에우게니우스에 이어 "제3의 찬탈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길도가 원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를 점령한 것에 대해 서술했지만, 2년 후 아르카디우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몰락했을 때는 길도가 동방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조시무스 역시 길도가 아프리카 속주를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정권에 양도했다고 기술했다.
길도가 아프리카 속주를 동방 정권에 넘기려 한 정확한 동기는 불확실하다. 역사가 카메론은 길도가 에우트로피우스와 정치적 이익을 공유한 관계였을 것이라며, 에우트로피우스는 스틸리코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선을 돌리길 바랬고, 길도는 가까이 있는 로마로부터 엄격한 통제를 받기 보다는 멀리 떨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느슨한 감독을 받길 선호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딸 살비나와 사위, 손자들이 살고 있는 동방에 더 강한 연줄이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길도는 동방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로마에 보내던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그러자 원로원은 388년 초 스틸리코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길도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스틸리코는 길도의 동생이었으나 길도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 두 아들을 잃고 달아난 마스케젤에게 5천명 규모의 원정군을 맡겼다. 양군은 비사세나의 아르달리오 강 근처에서 맞붙었는데, 마스케젤에게 회유된 장성들이 배신하면서 길도가 대패했다. 그는 동방으로 도망치려고 작은 배를 탔으나, 역풍이 부는 바람에 타브라카 항구로 돌아갔고, 주민들은 길도를 붙잡아서 마스케젤에게 넘겼다. 마스케젤은 398년 7월 31일 길도를 처형하였고, 그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어 로마 황실에 넘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