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1 11:53:29

김근배(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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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9년 12월 16일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외리
(현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8년 ~ 1959년
임관 육군사관학교[1]
최종계급 준장
사망' 1967년 9월 14일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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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군인. 평양 학병의거의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2. 생애

1919년 12월 16일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외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소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의해 일본 제국 육군 평양사단 예하 '오카노(岡野)' 47포병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평양사단은 42·43·44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그해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집단 항거를 계획하였다. 이에 김완룡이 총책, 박성화가 참모장에 선임되고. 참모로는 전상엽, 최홍희, 이도수, 부대 조직책에 최정수가 담당하였다.

그해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면서 본격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였고, 평양사단 내 각 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이때 평양사단 학병들의 항거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내 병영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를 탈출한 후 조선-만주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동정을 탐지한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 동지인 김완룡(金完龍)[2]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집단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47보병부대 소속으로 이 계획에 가담했던 그도 1944년 9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귀국하여 그해 9월 서울에서 학병동맹 결성에 참여, 경리부위원에 취임했다.# 12월 학병단이 학병군으로 개편될 때, 참모장에 취임했다.# 육군사관학교 7기 후기반에 임관했다. 1949년 여순사건 검찰관으로 김지회 등 피고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1955년 박시창, 조재미 등과 함께 준장에 진급했다. 1956년 제5관구사령부 부사령관, 1957년 육군 휼병감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군수품횡령사건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예편하였다.

그후 1967년 9월 14일 별세하였으며, 사후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7기 특별반[2] 육군 법무감, 예비역 육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