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1961년생 대한민국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만겸(1961)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47a0> 출생 | 1886년 |
함경북도 경원군 | |
사망 | 1938년 10월 18일 |
소련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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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에서 대한민국민의회에서 활동하며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고려혁명군을 지원한 독립운동가.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김만겸은 1886년에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한국 전통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러시아에 있는 조선인 소학교를 졸업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0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혁명에 참여하였고 1910년에 일제의 조선 강점에 항의하며 성명회의의 회원으로 참여하여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 한족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12년에는 러시아 신문인 『달료까야오끄라이』의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다 일제를 비판하여 강제 추방을 당하였다.[1]1916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국인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 우스리스크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대회에 참가했으며 한인신문인 『청구신보의 편집인을 맡게 되었다. 1919년에 전로한족대표자대회가 대한민국민의회로 재편성하는 데 참여하였고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을 지지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번역하였다. 그 해 4월에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고 1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재형, 김좌두 등과 함께 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 3월에 대한국민의회의 부회장으로 당선되었고 그 해 5월 중국 상하이로 이동하였고 고려공산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1월 상해에서 『공산』이라는 잡지를, 1921년에는 『신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21년 5월 12일 국민대표기성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7월에는 이르크츠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의 책임비서도 맡게 되었다.[2]
1922년 초에 고려공산당이 조직한 무장군대에 참여하였고 시사책진회라는 조직에 참여하였다. 고려혁명군이 결성되자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2년 말부터 1924년 초까지 코민테른 극동총국 소속의 한국 전담 기관이었던 꼬르뷰로의 위원을 맡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연해주로 돌아간 그는 1927년에 소련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 집행위원회 고려부 수석위원으로 활동하며 각종 소책자를 발간하고 재러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연해주소비에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9년 숙청 과정에서 소련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그 후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였다.[3]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