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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1892)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2년[1] 12월 2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2])
사망 1924년 4월 8일[3] (향년 31세)
중화민국 지린성 빈장도 빈장현 다오와이 푸가뎬 난스바다오거우[4]
본관 풍산 김씨(豊山 金氏)[5]
회일(會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0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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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892년 12월 2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아버지 김낙선(金洛璇, 1855 ~ 1895.1.22.)[6]과 어머니 야성 송씨(冶城 宋氏, ? ~ 1892.9.19.)[7]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23촌 지간의 족숙(族叔) 김낙운(金洛雲, 1859 ~ 1924)[8]에게 입양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같은 집안 사람인 김지섭·김재봉·김응섭(金應燮, 1878.11.15. ~ 1957.5.29.)[9]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항일투쟁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1913년 중화민국 간도로 망명했다.

1918년 이상룡지린성 지창도(吉長道) 화뎬현(樺甸縣)[10]둔전 형태의 병영인 길남장(吉南莊)을 설치한 뒤 농병(農兵)[11]이 될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집하자, 이에 응하여 몇 달 간 농사를 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잠시 길남장을 떠났다가 1919년 가을 이상룡이 서로군정서 독판(督辦)에 취임하자 다시 찾아가서 서로군정서에 입대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 산하에 헌병대가 조직되자 헌병대원으로 배치되었고, 1923년 헌병대원에 배속된 최병호와 깊이 친해졌다. 이후 참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고등정탐부장 쿠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 경부보와 형사부장 마쓰시마(松島)가 지린성 지창도 창춘현(長春縣) 및 빈장도 빈장현 일대의 여러 조선인 동포들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독립군에 부역한다고 몰아 함부로 악형을 가한다는 악명을 듣고는 최병호와 함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이 사람을 암살·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동지 10여 명을 모집하여 '건국청년모험단(建國靑年冒險團)'을 결성하였다. 이에 1923년 12월 초에 지린성 빈장도(濱江道) 빈장현(濱江縣)으로 가서, 다오와이(道外) 푸자뎬(傅家甸) 난스바다오거우(南十八道溝)[12] 어느 중국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거처를 정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했다. 1924년 4월 초에는 길남장에서 농병으로 있을 때 친구였던 유기동을 우연히 다시 만나 계획을 설명한 뒤 거사를 실행할 동지로 합류시켰다.

그러나 일본 제국 경찰이 사전에 이를 탐지하였고, 1924년 4월 7일 자정에 쿠니요시 세이호와 9명의 순사에게 세 사람이 머물던 거처가 포위되었다. 이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야마우치 시로(山內四郞)의 압력을 받은 하얼빈 교섭원공서(交涉員公署)에서 빈장 진수사(濱江鎭守使) 장자오탕(張召棠)과 하얼빈 경무청(警務廳) 특수임무경찰대장 장전둥(張鎭東)에게 요구하여 각각 출동시킨 봉천군벌보병·기병 각 1개 중대와 경무청 특수임무경찰대원 40명에 의해서도 탈출로가 막히고 겹겹이 포위되었다. 이후 장전둥이 세 사람에게 대화를 청하며 신원을 묻자, 이에 대해 한국독립군의 일원임을 밝히고 "왜적사생결단의 승부를 겨루려 한다"라고 말했다. 장전둥이 "조용히 잡혀주면 국사범(國事犯)으로 대우하고 일본 제국에 인도하지 않겠다"며 회유하자, 딱 잘라 거절하고 그냥 물러가주기를 요구하였다. 대화를 끝내고 거처로 돌아가려 하자, 쿠니요시가 순사 2명을 데리고 총을 겨누며 쳐들어오려 하자, 이때 권총으로 쿠니요시를 저격하여 가슴을 명중시켜 죽였다.

이에 일본 제국 경찰은 뒤로 물러나고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가 1인당 300엔의 현상금을 내걸고 봉천군벌에서 적극적으로 진압하도록 유도하였다. 이후 수백 발의 총탄이 난사되는 공격이 시작되자, 이에 맞서 권총으로 대응사격을 하며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형사부장 마쓰시마를 비롯한 일본 제국 경찰 및 봉천군벌 경무청 경찰 10여 명을 사살하는 등 4월 8일 아침까지 대치하였다. 그러던 오후 1시, 봉천군벌 경무청 경찰이 여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부수고 구멍을 내어 5~6개의 폭탄을 집안으로 던졌고, 동시에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었다. 이에 세 사람은 5분 정도 총격전을 벌이다 탄환이 점점 떨어져가자 결국 가슴에 총을 쏘아 자결,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13] 이후 하얼빈 적십자회에서 유해를 수습하여 조선인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한편, 동아일보 1924년 4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일본 제국 경찰의 강요를 받은 봉천군벌 경무처 경찰이 폭탄을 던져 벽을 폭파한 뒤 일본 제국 경찰과 함께 일제사격을 가해 3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반면 독립신문 1924년 4월 26일 기사에 따르면, 경찰이 폭탄을 던진 뒤 진입하니 세 사람은 이미 자결한 뒤였다고 한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 풍산김씨세보 중권(中卷) 심곡공파 652쪽에는 189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고,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1894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2] 풍산 김씨(豊山 金氏)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구현·김재봉·김지섭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사망일이 4월 7일, 한국독립운동사 기록에는 4월 9일에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사망일이 4월 8일로 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4]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와이구 난스바다오가(南十八道街).[5] 심곡공파(深谷公派) 26세 수(秀) 병(秉) 항렬. 출생 당시에는 학호공파(鶴湖公派)였다.[6] 자는 기백(璣伯).[7] 송재곤(宋在崑)의 딸이다.[8] 자는 치오(致五).[9]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차 임시의정원 의원 및 법무차장을 지냈다.[10]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화뎬시(樺甸市).[11]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무장하여 군인이 되는 사람.[12]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와이구 난스바다오가(南十八道街).[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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