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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B1F26><colcolor=#fff> 제3대 경북대학교 총장 김상열 金相悅 | Kim Sang-yeol | |
사망 | 1973년 9월 8일 |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동 자택 | |
학력 |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 / 학사) |
경력 | 경북대학교 제3대 총장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 초대교장 재단법인 난강학원 제2대 이사장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교육과 교수 교남학교(현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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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 9월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근무했고 대구여자상업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교장을 지냈으며, 재단법인 난강학원[1]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교육과 교수를 지냈다. 고병간 총장의 뒤를 이어 1960년 5월 12일부터 1961년 9월 30일까지 경북대학교 총장서리를 맡았고 제3대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화학회 대구·경북지부 초대지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2. 총장 재임기 행적
제1,2대 경북대 총장을 맡은 고병간 총장이 4.19혁명 이후 스스로 경북대 총장직을 사임하면서 총장서리를 맡았다. 1960년 8월 27일,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정식임명되었다.총장 재직 시절인 1960년 경북대 의대생 2명이 정창수, 이규택 두 의대 교수를 학교에 납치, 연금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병도[2] 문교부 장관은 "마땅히 난동을 주동한 학생들은 처벌되어야 하며, 검찰에서 조처를 해주길 바라며, 또한 학교는 학교대로 교칙에 따라 총장서리가 처리할 문제이다"라고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상열 총장서리는 7월 6일 문교부에 나타나 "학생들이 두 교수를 모셔간 것이지 연금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며 두둔하였다.
3. 총장 퇴임 이후
1961년 9월 30일, 경북대 총장에서 퇴임했다. 재임 중에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였는데, 5.16 군사정부가 제정, 공포한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서 임기를 일찍 마치고 정년퇴임하게 되었다.총장 퇴임후 1973년 9월 8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4. 여담
- 『경북대신문』에 따르면 직선제로 선출된 첫 번째 총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고병간 총장은 학교설립되고 정부로부터 임명되었지만 재임은 교수들이 투표해서 선출했기 때문에 이 소개가 정확한 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 교남학교 교사 시절, 운동장 북쪽 모퉁이에 10평 내외의 가옥에서 살았는데 반은 학교 심부름꾼이 쓰고, 나머지 4~5평 되는 공간에서 7~8명 가족들과 살았다고 한다. 교남학교 교사 시절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기사
[1]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의 재단법인이다.[2] 역사학자로 유명한 그 이병도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