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相澤
1954년 4월 17일 ~ 2009년 9월 14일 (향년 5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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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사 만화가. 정확히는 단칸 만평을 그리던 사람이다.2. 활동
1954년 4월 17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1977년 상지전문대학 미술과를 졸업한 뒤 예천군에서 잠시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상경하여 충무로 영화계에서 3년간 연출부 조수 노릇을 했다. 그러나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고 잠잘 곳도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는 등 "죽어라고 고생만 했다"고 한다.이후 친구의 소개로 1983년 경향신문에 도안 담당으로 입사했다. 처음에는 1~2년간 목돈을 모아 다시 충무로 영화계에 복귀할 생각이었으나 채무 상환, 결혼 준비 등으로 이래저래 발목이 잡혀 결국 경향신문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88년 경향신문에 노동조합이 신설되자 당시 이성수 노동조합위원장 등 선배들의 강권으로 노동조합 회보에 만평을 그리게 되었고, 1988년 말 노동조합으로부터 경향신문 본지 만평란의 담당으로 추천되었다. 이때부터 '김상택 만평'을 게재하면서 시사 만화가로서는 늦깎이로 데뷔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첫 해인 1998년까지 활동하다가 1999년 중앙일보로 이적하였다. 한화그룹에서 분리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경향신문을 떠나[1] 범 삼성가인 중앙일보로 옮겼는데,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앙일보가 거액의 스카웃비용을 제시했다고 한다. 다만 사람들의 눈 때문에 몇달 휴식하다가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경향신문부터 김상택 씨의 그림체는 다른 시사만화가에 비하면 독보적인데, 거의 비가 오는것처럼 보일정도로 펜선을 이용해 칸을 까맣게 보일 정도로 칠해 비교적 어두운 톤의 분위기를 자랑하며, 등장인물들 대부분을 조그맣게 그리고 옆에 昌, DJ, YS 식의 짧은 주석을 달아서 해당 정치인임을 지칭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TV나 스크린같은게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림체가 상당히 지저분하다고 많이들 까였다.
그리고 중앙일보로 이적 이후 조선일보의 신경무보다 더 하면 더했지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중앙일보의 성향이 교묘한 줄타기 신공을 펼치는지라 삼성그룹 관련만 빼면 조중동 중에서는 이념적인 면에서 오락가락하지만, 조중동 안티 사이에서는 당시 논설주간, 주필이었던 문창극과 더불어 욕을 먹었던 중앙일보 인사 중의 하나로 꼽혔다. 거기다 어째서인지 미국 44대 대선 내내 버락 후세인 오바마를 줄기차게 까는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더이상 다루지 않게 되었다.
대표적인 김상택의 오보사건.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3월 14일 오전 10시 20분 열린우리당 정세균 당의장을 예방했으며, 11시에 한나라당을 방문하여 강재섭 대표를 만났다. 만평은 완전히 오보였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4강에서 좌절된 한국 대표팀 히딩크 감독을 비하하는 듯한 만화도 그리기도 하고,[2] 노무현 대통령 사망 당시에도 고인드립성 묘사를 했다.[3] 장례식 당일인 2009년 5월 29일 만평은 노무현 영결식을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으로 묘사했고, 그 다음날 만평에서는 살인자 이명박이라고 외친 백원우를 비꼬았다. 그리고 로켓 날아가듯이 노 대통령을 그린 신경무도 같이 까였다.
다만 중앙일보 이적 후 욕을 먹었다고 해도, 경향신문 시절의 만평은 평이 좋았고, 심지어 정치인에게도 호평을 받았을 정도다. 그 덕분에 '10센티 정치'라는 단행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겨레는 싫어도 박재동의 그림판 때문에 한겨레를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날리던 박재동 화백은 사석에서 요즘 김상택이 치고올라오는 게 무서울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
2009년 9월, 암 투병끝에 사망. 그의 마지막 만평은 비슷한 시기에 타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역시 한창 건강이 악화일로였던) 북한 김정일이 조문을 갈까말까 고민한다는 내용을 담았다.[4]
조선일보의 신경무 화백이 2011년에 사망함에 따라 조중동 모두 날마다 고정적으로 만평을 게재하는 만화가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다가 강동헌과 박용석이 중앙일보에 만평을 연재하고 있는 중.
3. 여담
- 둘째 남동생 김영택 또한 중앙일보에서 광고본부 차장으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