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10:31:05

김수(조선)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최종적 평가5. 관련 문서6. 여담

1. 개요

金睟

1547년(명종 2) ~ 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구 안동(舊 安東),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시호는 소의(昭懿).

2. 생애

1547년(명종 2) 사재감 정(司宰監正:정3품)을 지낸 아버지 김홍도(金弘度)와 어머니 한산 이씨 진사 이계백(李繼伯)[1]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2등 16위로 입격하고 1573년(선조 6) 알성시 문과에 병과 1위,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

선조 때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왕명을 받고 경상우도 관찰사(종2품)으로 부임해 경상우도 도내의 진주성 등 성 11채를 보수하는 등 전쟁 대비에 힘썼다.

그 뒤, 여러 차례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활동을 이어나간다. 이후 김수는 조정에서 활동하며 전시의 재정 관리와 군량 확보에 주력했고 종전 후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정1품)에 오르는 등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손자 김비(金祕)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는 등 말년이 썩 좋지는 않았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재무 능력이 출중하고 청백리란 긍정적 평가를 받던 인물이다.

또한, 왜군에게 투항하여 순왜가 되었다는 의심받는 부산진 전투정발동래성 전투송상현을 끝까지 변호하였고, 이는 훗날 두 사람이 명예회복에 성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서 언급된 곽재우와의 갈등도 애초에 지방토호가 개인 사병을 갖는 것에 병적으로 경계하던 조선에서는 군벌이 될 수 있는 의병에 경계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다.[2]

3.2. 부정적 평가

전쟁대비를 하기 위해, 시험 난이도를 너무 높여서 시험에 탈락한 유생들도 성곽 수리와 군사훈련에 동원하여 당시 곽재우 등 지방 유림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사게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게다가.막상 전쟁이 터지자 한양까지 쭉 밀리면서 적병을 피하여 도망만 다녔다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또한 곽재우와의 불화까지 심해 눈총을 샀다.

게다가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도민들이 그를 싫어했으며, 파천 중이던 선조에게까지 이 사안이 보고되어 조정에서 그를 체직하거나 권한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상당했다고 한다.

4. 최종적 평가

행정, 재무 관료로서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전시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보신주의적이고 속 좁은 행태를 보이는 등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 할만하다.

후방에서의 행정과 군수물자 관리하는 일에는 어울리는 인물이었지만 반대로 야전에서 작전을 짜고 군을 지휘하는 일에는 영 약했다.[3]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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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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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37년(중종 32) 식년시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2] 실제로 의병 핑계로 민가와 관아를 약탈하던 자들이 처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3] 애초에 김수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 이는 동시대 인물인 김명원과 같은 케이스.